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06화 (306/366)
  • 306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곳에 98번째의 세빈이가 존재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빈이는 98번째의 나를 콱 끌어안은 채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덜덜 떨리는 손과 불안한 듯 입술을 씹는 행동이 그가 잔뜩 겁을 먹은 상태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강세빈.”

    “이기적인 거 알아. 이럴 자격 없는 것도 알고.”

    98번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세빈이가 곧바로 대답했다.

    “지의 네가 회귀를 하고 내 품에 있던 시체마저 사라졌을 때, 나는 그냥 죽고 싶었어.”

    “……….”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그저 세상의 일부가 되어, 모든 것이 재구성되는 걸 바라보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끔찍했거든.”

    세빈이의 두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피를 닮은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밑으로 떨어지자 98번째의 내 어깨가 축축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단 한 번 겪은 것만으로 이렇게 괴로운데, 지의 넌…….”

    “조용히 해.”

    98번째의 나는 자포자기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건조한 대답에 세빈이는 화들짝 놀랐지만 끌어안은 팔을 풀진 않았다. 마치 제 물건을 뺏기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그 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세상의 어떤 틈새에 네 죽음을 기리는 추모 공간을 만드는 것밖에 없었지.”

    “…그때 내가 봤던 그 공간이구나.”

    내 말에 세빈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시선만 살짝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어.”

    새카만 눈동자가 순간 반짝거렸다.

    “100번째 회귀가 이뤄진 순간 세상을 떠돌던 나와 지의에게 형태가 생겼고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됐어. 그, 그리고 세상에 조금 간섭할 수 있게 되었고.”

    세빈이는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낸 후 숨을 잠시 골랐다.

    “죄책감보다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어. 나는 진짜 그른 인간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지. 그래서…….”

    “말 길게 할 필요 없어.”

    98번째의 내가 세빈이의 말을 단번에 끊었다. 날선 목소리만큼이나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몸을 돌려 세빈이를 밀쳐내더니 곧 말을 이어갔다.

    “나까지 네 일부가 되면 얘는 정말로 혼자가 돼. 동료들을 전부 죽이고 내 계획을 망쳤지만 외톨이가 되는 건 또 싫은 거지.”

    “야…….”

    “그건 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안 그래?”

    사색이 되다 못해 신체 자체가 투명해지려 하는 세빈이 때문에 ‘나’의 말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나’의 말은 더욱 강도가 세졌다.

    “강세빈이 혼자 남겨지든 말든 상관 안 해. 내가 원하는 건 '우리'의 해방이야.”

    ―탁.

    98번째의 내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지의, 너는 오직 그것만 생각하면 돼.”

    “잠깐, 지의야……!”

    ―파스슥.

    98번째의 나마저 가루가 되어 흩어지더니 내 그림자 안으로 들어왔다. 세빈이의 손이 허무하게 허공을 헤맸고 내 앞에 우뚝 섰다. 고개를 올리자 세빈이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 텅 빈 제 손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마음이 안 좋네.’

    98번째의 내가 세빈이에게 모질게 말한 마음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양심과 인간성을 버리고 사도를 죽이면서까지 이뤄낸 일을 완전히 망쳐버린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세빈이를 완전히 내치지 못한 것 역시 그의 결정이었다. 미래의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세빈이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기억을 지웠으니까.

    ―텁.

    나는 세빈이의 손을 잡았다. 검은 물감을 몇 겹씩 쌓은 듯한 눈동자가 나를 향해 천천히 굴러왔다.

    “나도 네가 벌인 짓이 옳은 짓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아.”

    “…응.”

    “혹시 내가 전에 한 말 기억해?”

    세빈이가 말없이 눈만 깜박거렸다. 딱 봐도 기억나지 않는 눈치였다.

    “98번째의 내가 기억을 지운 건 널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야.”

    “……….”

    “방금은 모질게 말하긴 했지만, 널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후두둑.

    세빈이의 두 눈에서 또다시 검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세빈이의 그림자 위로 떨어질 때마다 호수에 이슬이 떨어지듯 원형의 파동이 널리 퍼졌다.

    “맞아. 지의는 그런 애였지.”

    “……….”

    “그렇게 다정하고 사려 깊은 애한테 난…….”

    “강세빈!”

    ―탁!

    스스로를 절망 속으로 빠트리려는 세빈이의 양팔을 흔들자 그의 눈물이 내 쪽으로 튀어 얼굴에 닿았다.

    “읏!”

    뜨거운 물에 덴 것처럼 눈물이 튄 곳이 따끔거렸다. 세빈이가 느끼는 죄책감이 열로서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팔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98번째의 내가 뭘 원한다고 했지?”

    “…지의들의 해방.”

    “맞아. 네가 정말로 걔에게 속죄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그 바람을 이루어 줘.”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세빈이가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꾹 깨물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길었던 회귀로 인한 고통의 굴레에 반드시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 아니라 세빈이의 삶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려면 98번째의 세빈이도 지금의 세빈이와 하나가 되어야 해.'

    세빈이는 이미 말의 씨앗이 개화한 상태다. 하나가 돼서 다시 학살자의 업이 씌워진다고 해도 카르마의 탄환으로 쉽게 제거할 수 있어.

    “세빈아,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응. 알겠어.”

    ‘뭔지도 안 듣고 알았다고 하는 건 변하질 않네.'

    지금의 세빈이와 겹쳐 보이는 모습에 잇새로 웃음이 샜다. 어리둥절한 세빈이를 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지금의 세빈이에게 흡수되어 줘.”

    “…청산시킬 생각이구나.”

    “응.”

    “그럼 난 정말로 자유로워지는 거네.”

    그 말을 하는 세빈이의 얼굴은 후련해 보이기도, 조금은 아쉬워 보이기도 했다. 난 그런 세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 이전 삶들도 자유로워질 거야. 너무 외로워하진 마. 그리고…….”

    ―쿠구궁.

    갑자기 공간이 크게 울리더니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균열이 점점 영역을 넓혀 새하얀 공간을 집어삼켰고 나와 98번째의 세빈이의 사이가 멀어졌다.

    흠칫 놀란 세빈이는 이내 상황을 받아들이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직 제일 중요한 말을 못 했다고!'

    하지만 난 그 인사를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눈앞의 저 세빈이에게 99번째의 세빈이 어쩌다 자신의 존재를 지웠는지 물어봐야 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본 그라면 분명히 알고 있을 테니까.

    “자, 잠깐만! 세빈아, 너 99번째 회귀에서 왜 존재를 지운 거야?!”

    “어? 아, 그건……!”

    ―쿠구구궁!

    공간 전체에 커다란 금이 가더니 곧 조각조각 깨져 무너져 내렸다. 세빈이가 무어라 말하고 있지만 입 모양으로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난 내 말이 세빈이에게 닿을 거라 믿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지금의 세빈이가 절대로 자신의 존재를 지우지 못하게 해 줘! 다시는 그런 실수 안 하게 바로 잡아줘!”

    ―콰그작!

    누군가 이 공간을 손으로 짓이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내 의식이 완전히 날아갔다.

    * * *

    “헉!”

    “신지의 헌터가 깨어났습니다!”

    눈을 뜨자 헌터로 보이는 낯선 사람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에 있던 치료소인 것 같았다.

    커다란 천막 아래엔 줄지어 누운 부상자들과 치유계 헌터와 협회에 소속된 의료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쿵, 쿵.

    “윽…….”

    그때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누가 내 몸을 내리치는 것처럼 신체 전체가 울렸고 머릿속으로 수백, 수천 가지의 말 소리가 파고들었다.

    ‘모든 시간선의 나를 삼켜서 그런 건가…….’

    뿔뿔이 흩어졌던 기억이 하나의 몸에 들어왔다. 그동안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장면들이 지금 당장 머릿속에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망각은 축복이라는 말이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시, 신지의 헌터!”

    “한진우 헌터, 무사하셨군요…….”

    “하아… 다행히 인지 능력에도 문제가 없는 것 같네요.”

    지옥도가 열린 후 처음 보는 한진우 헌터였기에 그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는지 한진우 헌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온몸으로 안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죠?”

    “한 3시간 정도요. 맥박이랑 호흡도 정상이었는데 하도 안 일어나셔서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같이 온 강세빈 헌터랑 최민 헌터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히든 몬스터는 완전히 소멸한 게 맞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한진우’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감탄]

    한진우 헌터가 입을 쩍 벌리며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곧 말을 덧붙였다.

    “아, 죄, 죄송해요. 방금까지 기절했다 깨어났는데 몬스터의 생사 여부부터 묻는 게 진짜 신지의 헌터다워서요…….”

    ‘한진우 헌터 머릿속의 나는 대체 어떤 이미지인 거지?’

    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진우 헌터가 짧게 감탄하는 동안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물었다. 내가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였다.

    파괴자의 의지들은 내가 ‘절제’를 쓰러트림으로써 모두 소멸했고, 그와 동시에 세 번째 차례에 소환됐던 게이트들이 전부 사라졌다고 했다.

    네 번째 페이즈가 시작된 지 이제 한 시간을 넘겼다고 했는데, 어떤 이유인지 개수가 확연히 줄었다고 했다.

    ‘파괴자의 의지를 쓰러트리면 게이트의 생산성이 떨어져서 그렇겠지.’

    구원자의 눈동자로 봤던 정보가 사실인 듯해 마음이 놓였다.

    “일단 알겠어요. 저도 곧 전투 참여할게요.”

    “더 안 쉬셔도 되겠어요?”

    “네. 지금 정말로 멀쩡해요.”

    한진우 헌터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 보이자 그가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곧 미소로 대답했다. 나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 헌터넷의 지도 화면부터 살폈다.

    [최민 (S)]

    여기서 동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최민 헌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겐 조율자를 불러낼 수 있는 목걸이가 있다.

    ‘녀석을 이용해서 본격적으로 김강희를 압박해 볼까.’

    대부분의 패를 잃은 김강희를 몰아세울 기회다. 나는 지도에 나타난 최민 헌터의 위치를 확인한 후, 그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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