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05화 (305/366)
  • 305화

    ―타앙!

    [현재 체력 : 342,166]

    숨을 참은 채 방아쇠를 당기자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눈을 감고 공격해야 했던 아까와 비교했을 때 훨씬 수월한 전투가 가능할 것 같았다.

    “원거리, 공격 시작해 주세요!”

    “네!”

    지면에 있던 헌터들이 일반 전투 대열로 선 후 공격을 시작했다. 첫 번째 페이즈로 피해 조건을 파악했기 때문인지 내 지시 없이도 헌터들은 숨을 참고 스킬을 시전했다.

    ―콰광

    ‘절제’는 폭풍으로 자잘한 공격을 무력화했지만 그중 몇몇 스킬은 녀석의 몸에 닿았고 체력을 조금씩 깎아 놓았다.

    나도 자아를 바주카로 바꿔 본격적인 공격 준비를 했다. 숨을 멈추고 발포하자 심장 박동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녀석에게 시선을 단단히 고정했다.

    ―쾅, 쾅.

    천둥이 치는 듯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포탄이 녀석의 몸에 박혔다. 검은색 연기 같은 녀석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인지 원상태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절제는 숨을 죽입니다.]

    [자신과 함께 금욕의 삶을 사는 자들을 조용히 관찰합니다.]

    [현재 체력 : 234,772]

    체력은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 애초에 공격을 피할 생각도 없는 녀석이니 아예 박격포로 한 번 크게 공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휘이잉.

    검은 바람을 피해 위로 뛰어오른 후 자아의 포구를 밑으로 향하게 했다.

    ―콰드득.

    그때 세빈이가 녀석의 얼굴 밑에 생긴 그림자에서 검은 손들을 뽑아내더니 그대로 녀석의 눈을 공격했다. 녀석이 양손으로 눈을 감싸며 순간적으로 뒤로 휘청거렸고 매듭을 지은 것처럼 꽉 얽혀 있던 가부좌 자세도 흐트러졌다.

    ‘지금이다.’

    ―끼리릭.

    내 손을 떠나간 자아는 박격포의 형태로 빠르게 바뀌었다. 지지할 지면이 없어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던 박격포의 포구는 정확히 ‘절제’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다들 벽 뒤로 숨으세요!”

    ―콰과과광!!

    헌터들에게 소리치자마자 숨을 참았다. 그러자 포탄이 녀석의 몸을 제대로 관통했고, 몸을 이루고 있던 검은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져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얼마나 폭발이 컸는지 최민 헌터가 세운 불의 벽까지 흔들릴 정도였다.

    [현재 체력 : 98,371]

    ‘됐다!’

    만족스러운 피해량이다. 절제는 뒤로 완전히 넘어간 채 손으로 제 몸에 생긴 구멍들을 더듬었고, 고통스러운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절제는 생각합니다.]

    [자신을 따라 절제의 삶을 산 존재 중, 자신에게 가장 가깝게 닿았던 인물이 누구였는지 말입니다.]

    [현재 체력 : 98,371]

    ―파지직.

    검은 번개와 함께 녀석의 관절 위치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절제’는 다시 가부좌를 튼 자세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더니 손까지 가지런히 모았다.

    세빈이의 공격으로 녀석의 눈 부분은 텅 비어 있어, 뒤에 펼쳐진 우주 풍경이 훤히 보였다.

    ‘어차피 체력도 별로 남지 않았으니까…….’

    ―쿵.

    그때였다. 녀석이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녀석의 얼굴에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들었다. 숨을 쉬는 걸 까먹은 듯한 착각이 들어 겨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어?’

    착각이 아니었다. 코로 숨이 들어오지 않았고 입을 열고 숨을 들이마셔도 폐는커녕 조금의 산소도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했다.

    “신지의 헌터?”

    ―치지직.

    최민 헌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다가온 순간 설명창이 다시 나타났다.

    [“너로구나.”]

    [“네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나의 깊은 곳까지 다가왔다.”]

    [“네게 금욕의 축복을 내리마.”]

    [“오직 너만이 내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절제’가 각성자 ‘신지의’에게 금욕의 축복을 내립니다.]

    [각성자 ‘신지의’만이 ‘절제’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절제’의 방어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주위는 순식간에 적막해졌고 헌터들이 놀란 듯 숨을 들이켜는 소리만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해 그 소리도 서서히 멀어졌다.

    ―쾅!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기력과 목소리의 소모가 큰 박격포 대신 바주카로 녀석을 제압해야 한다.

    [현재 체력 : 95,367]

    [현재 체력 : 90,998]

    .

    .

    .

    [현재 체력 : 68,572]

    방어력이 상승한 탓에 확실히 공격이 아까보다 덜 들어갔다. ‘절제’는 바위처럼 우뚝 자리한 채 내 공격을 전부 맞았고, 나는 녀석의 체력이 줄어드는 걸 계속 확인하며 방아쇠를 쉬지 않고 당겼다.

    ―퍼엉.

    ‘제기랄. 슬슬 시야가 흐려져.’

    의식이 멀어지자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아를 든 양팔은 무거워져 조준의 정확도가 확연히 떨어졌고 그 때문에 포탄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탁

    그때 최민 헌터가 뒤로 다가와 내 팔과 바주카를 받쳐 들었다. 방아쇠에 걸었던 손가락 위로 그의 손가락이 겹쳤다.

    ―쾅!

    몸을 반쯤 그에게 기댄 채 방아쇠를 당겼다.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난 손가락을 얹었을 뿐이고 당긴 건 최민 헌터가 했다.

    [현재 체력 : 60,316]

    그래도 녀석의 체력은 확실하게 줄고 있었다. 어떻게든 의식을 잃지 않으려 눈에 최대한 힘을 주었다. 물이 들어간 것처럼 뿌옇게 변하는 시야의 한가운데, ‘절제’의 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이 언뜻 보였다.

    [현재 체력 : 32,664]

    “잘 하―, 괜찮…….”

    바로 옆에 있는 최민 헌터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절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주는 게 내 최선의 행동이었다.

    ―쾅!

    그렇게 내 정신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던 그때.

    [현재 체력 : 0]

    녀석은 결국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부처라도 된 양 고고하게 명상을 하던 녀석은 허무하게 소멸한 것이다.

    “헌터… ―지의 헌……!”

    긴장이 풀린 나는 누가 내 영혼을 끌고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 *

    “왔어?”

    “헉……!”

    내 정신을 단번에 깨운 건 여러 개의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자 사방이 새하얀 공간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의 주인은 늘 그렇듯 과거의 ‘나’들이었다.

    ‘정신만 잃었다 하면 계속 만나네.’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존재들이니 내가 사경을 헤맬 때마다 세상에 개입해 나를 구하거나 내 의식을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불러내는 것 같았다. 마치 창조자와 조율자가 제 사도들을 마음대로 불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나 죽은 거 아니지?”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해!”

    ―우웅, 우웅

    똑같은 목소리가 수십 겹씩 겹쳐서 들리자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떠니 ‘나’들이 머쓱했는지 금방 말을 덧붙였다.

    “그냥 의식을 잃은 거야. 그 틈에 우리가 널 데려온 거고.”

    “사실 할 말이 있거든.”

    “뭔데?”

    갑자기 ‘나’들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말꼬리를 늘리며 대답을 망설이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회귀자의 업을 없애는 법을 도저히 못 찾겠어.”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다시 붙는 기분이었다. 시한부 선고나 마찬가지이니, ‘나’들이 대답을 망설인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예상했던 거잖아.’

    100번이나 중첩된 업이다. 그렇게 쉽게 없앨 수 있을 리가 없지.

    ‘나’들이 어디선가 날 보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러자 나를 둘러싼 이 새하얀 공간에 순간적으로 노이즈가 생겼다.

    “너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괜찮아. 그동안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그리고 지금도 김강희가 뿌린 이상한 몬스터들에 대해 알아내 줬고.”

    “하지만…….”

    “그리고 너희들을 위한 건 곧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해.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인 건 아니다. 좋든 싫든, 결국 우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 업을 없앨 방법을 찾긴 찾아야 하는데…’

    가볍게 눈을 감은 채 업을 없앴던 순간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레일리, 조슈아, 비스, 그리고 센의 얼굴이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처음엔 내 목숨을 노리거나 경계했다. 그들이 창조자의 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들의 동료가 되어 업을 파괴했다. 연계 패시브 스킬인 ‘말이 씨가 된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잠깐.”

    순간 머릿속으로 어떤 방법이 스쳐 지나갔다. 터무니없지만, 가능하다면 가장 확실하게 이 업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래?”

    내 행동에 ‘나’들이 반응했다. 난 침을 삼킨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너희들이 세상의 일부에서 다시 나로 돌아오는 게 가능할까?”

    ―치지직.

    또 동요하는 듯 공간에 큰 균열이 생기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안 될걸.”

    “그야 이미 네가 존재하잖아.”

    “그래, 그러니까 너희들이 ‘나’로 돌아오는 게 가능한지 궁금한 거야.”

    ―쿠구궁.

    균열 사이로 수백 개의 내 눈동자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마주한 적나라한 시선에 순간 몸을 떨었다. 나는 밤색 눈동자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카르마의 탄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업을 청산시킬 수 있는 탄환이야. 조율자나 창조자에겐 써본 적도 없고, 애초에 선행 조건인 말의 씨앗조차 심을 수 없었어.”

    나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균열 너머의 눈동자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너희들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내가 나 자신에게 말의 씨앗을 심고 개화해 볼게. 그러면 우린 전부 해방될 수 있을 거야.”

    ―쿠구구궁.

    균열이 가로로 확 넓어지더니 이번엔 손들이 슥 내려와 나를 향했다. 그 손들은 내 팔이나 손을 잡으며 연달아 물어왔다.

    “너로 다시 흡수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하지만 지금처럼 널 도와줄 순 없어. 창조자나 김강희가 만들어낸 존재들로부터 널 구할 수도 없고, 정보를 알아다 줄 수도 없어.”

    “그리고 우리가 겪어 왔던 모든 기억들이 어제 겪은 것처럼 선명하게 생각나겠지.”

    ―쿵.

    99개의 내 얼굴이 나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도 우리들을 받아들일 거야?”

    겹겹이 쌓인 목소리들이 똑같은 문장을 내뱉었다. 염려로 가득한 그 목소리가 절박하게 느껴져 내 가슴을 후벼파는 듯했다. 99명의 ‘나’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담고 있는 감정은 비슷했다.

    염려, 불안, 그리고 무력감.

    ‘우리를 이렇게 만든 세상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기꺼이 이 위험을 받아들일 수 있어.’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나’들에게 이야기했다.

    “응. 받아들일게.”

    ―파지직.

    내 대답에 ‘나’들의 형체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울상이었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선택을 존중하는 듯했다.

    ―파스슥.

    과거의 ‘나’들이 하나둘씩 모래처럼 흘러내리더니 균열을 넘어 내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균열 안에 있던 얼굴이 사라지고 이제 남은 건 98번째의 나뿐이었다.

    그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그 순간의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후련한 얼굴이었다.

    “나는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실패했어.”

    “……….”

    “하지만 너는 가장 귀찮고 성가신 방법으로 행동하고, 결국 우리 중 성공에 가장 가까워졌지.”

    98번째의 내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의 발악이 헛되지 않게 하자.”

    “그래. 같이 해방되자.”

    내가 98번째의 나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탁!

    누군가의 손이 내 손을 치곤 98번째의 나를 균열 안으로 끌어당겼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양팔로 98번째의 나를 뒤에서 끌어안자, 나와 그는 동시에 시선을 뒤로 옮겼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해?”

    “너……!”

    피로 범벅이 된 얼굴과 절망을 가득 담은 검은 눈동자.

    학살자의 업을 진 98번째의 강세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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