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04화 (304/366)

304화

[절제가 명상을 시작합니다.]

[모든 혼돈과 번뇌를 일으키는 것들을 배제합니다.]

[현재 체력 : 600,000]

―콰드득.

녀석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인왕산의 풍경이 순식간에 새카만 우주로 바뀌었다. 땅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져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고, 헌터들도 깜짝 놀라며 다리를 들었다.

“환각은 아닌 것 같네.”

세빈이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 인원을 전부 어딘가로 옮겨 왔단 얘기야?”

“일단 눈속임은 아니야. 그림자를 쭉 뽑아 봤는데 끝이 없었거든.”

고개를 내리자 세빈이의 발밑에서부터 시작된 그림자가 끝도 없이 뻗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있던 인왕산이었다면 나무나 펜스 따위에 부딪혔을 테지만, 세빈이의 말대로 그림자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철컥.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수십 명이 되는 인원을 특수한 공간으로 불러들일 정도면 ’절제‘는 ’욕망‘보다 훨씬 강한 존재일 것이다.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

[절제는 아무것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관찰이라는 행위로 자신의 판단이 흐려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콰과광!!

녀석이 눈을 감으며 손으로 허공을 헤집자 엄청난 돌풍이 일었다. 몸이 자연스레 뒤로 날아가 중심을 잃었고, 곧바로 날카롭게 갈린 바람의 창이 비처럼 쏟아졌다.

“큭!”

―쾅!!

쉴드를 펼쳐 창을 한참 막을 때쯤 최민 헌터의 방공호가 열렸다. 일시적으로 모든 공격을 차단한 후, 돔 형태의 방공호는 서서히 높은 벽으로 변해 '절제'와 헌터들 사이를 막는 거대한 방패가 되었다.

나는 낮말을 듣는 새로 뛰어 올라가 벽의 밖으로 나왔고 녀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현재 체력 : 600,000]

역시 조금도 닳지 않았다. 방금 녀석이 아무것도 보지 않을 것이라 했으니, 눈을 감고 공격하면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세빈아, 잠깐 공격 좀 막아줘!”

“알겠어!”

―콰과광!

세빈이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검은 손을 뽑아 올려 내 주위로 향하게 했다. 촉수 같은 손들이 내 주위를 배회하며 바람을 막았고 공격이 날아오면 당장이라도 녀석을 찢으러 갈 것처럼 꿈틀거렸다.

“흐읍……!”

―탕!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고 그대로 녀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절제는 자신을 따라 절제의 길에 오른 이들을 환영합니다.]

[현재 체력 : 597,174]

그러자 보기 좋게 녀석의 몸에 구멍이 뚫려 그 틈으로 검은 바람이 솔솔 빠져나갔다. 녀석은 체력이 떨어진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자아를 입 앞으로 가져와 벽 뒤에 있는 헌터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다들 상태창 보셨죠? 이 몬스터의 행동을 따라 한 상태로 공격해야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눈을 감은 채로 공격해야 한다는 뜻이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2인 1조로 나뉘어서 공격과 방어 담당을 나눠 주세요. 공격 담당은 눈을 감은 채로 공격, 방어 담당은 방향 지시와 방어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서로 스킬에 휘말리지 않게 원거리 공격과 근거리 공격 순서를 정하고 공격을 넣어 주세요!”

[발언 결과 : 수긍]

몬스터 분석을 끝내고 나니 확실히 막막한 기분이 사라졌다. 방법은 있고, 그것을 그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되니까.

―후웅.

“그런 몬스터였군요.”

“아, 최민 헌터.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자아를 내려놓자 최민 헌터가 내 옆으로 조용히 날아왔다. 그는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손을 내밀었다. 손과 그를 번갈아 볼 때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눈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응?’

최민 헌터는 한껏 비장한 얼굴을 한 채 엉뚱한 소리를 했다. 잠깐 사고가 정지했지만, 곧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 푸흡… 방어 담당해 주시겠다는 뜻이죠?”

“신지의 헌터만 괜찮으시다면요. 지면엔 다른 헌터들이 많으니 공중에서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가끔 보면 신기한 화법을 쓴다니까.’

그는 내가 왜 웃는지 파악하지 못한 건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탁.

최민 헌터의 손을 잡아 가볍게 악수를 한 후 세빈이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이미 내 쪽을 보고 있던 건지 한 번에 눈이 마주쳤다.

“세빈아, 제압 위주로 공격 부탁할게! 위험하게 혼자서 눈 감고 하지 말고, 알겠어?”

“응. 조심할게.”

‘괜찮겠지?’

얼굴에 살짝 그림자가 진 것 같지만 미소 띤 얼굴은 내가 알고 있는 세빈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쿵!

너무 시간을 오래 끈 모양이었다. ‘절제’가 또다시 바람의 창을 소환했고 우리를 향해 퍼붓기 시작했다.

최민 헌터는 내 팔을 잡아끌며 불의 방패를 만들었고 난 그와 동시에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현재 체력 : 582,692]

다행히 어딘가에 맞긴 했나 보다. 눈을 뜨니 녀석의 체력이 줄어든 것이 보였다.

―콰과광!

내 공격을 신호탄 삼아 다른 헌터들도 하나둘씩 공격을 개시했다. 원거리 공격계 헌터들의 차례인지 최민 헌터가 세운 불의 벽 뒤쪽에서 온갖 속성의 공격이 퍼부어졌다.

“저희도 시작하죠.”

“알겠습니다.”

서 있던 자리에서 ‘절제’를 조준한 채 눈을 감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과 고막을 파고드는 여러 폭발음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탕, 탕, 탕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손끝의 떨림이 느껴졌다. 제대로 맞히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최민 헌터가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면 공격이 나름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콰광!

“윽!”

그때 굉음과 함께 몸이 뒤로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곧바로 눈을 뜨자 허공에 검은 폭풍들이 시야에 잡혔다. 우리가 서 있던 공간뿐만 아니라 지면에도 소환되어 있었고, 헌터들은 기존 대열에서 벗어나 뿔뿔이 흩어졌다.

―쾅, 쾅.

최민 헌터가 다시 불로 된 벽을 만들며 안전지대를 확보했고 그동안 나는 폭풍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폭풍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자 검은 폭풍은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그대로 소멸했다.

‘2인 1조로 나누긴 했지만 역시 눈을 감는 건 위험하구나.’

최민 헌터가 막아주긴 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피하는 것보단 확실히 속도가 느렸다. 땅에 있는 헌터들도 마찬가지인지 불의 벽 뒤로 부상을 입은 헌터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광활한 우주에 긴장이 감돌았다. 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네? 어……!”

―바스락.

그때 최민 헌터가 아예 나를 안아 든 채 비행을 시작했다. 떨어질 것 같아서 왼팔을 그의 목에 걸었고 그러자 최민 헌터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당기기만 하세요. 위치는 제가 맞추겠습니다.”

검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졌다.

‘내가 긴장한 걸 알아챈 건가?’

사명으로 엮여 있는 탓에 최민 헌터 앞에서 감정을 숨기는 건 불가능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최민 헌터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부담을 줄이려는 듯한 그의 행동에 긴장이 사르르 녹았다.

“고마워요.”

씩 웃자 그도 가볍게 미소 지었다. 양쪽 볼에 얕은 보조개가 생겼다.

―쿠궁.

‘절제’의 고개가 우리 쪽으로 천천히 옮겨왔다.

[절제는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습니다.]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현재 체력 : 491,580]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다. 녀석이 눈을 감은 채로 호흡하자 또다시 검은 폭풍이 녀석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작할게요.”

“알겠습니다.”

―타앙!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발포 음이 이리저리 섞여 들렸다. 최민 헌터가 말한 대로 나는 그저 팔을 들어 올린 채 방아쇠를 당기기만 했다.

내 탄환이 녀석의 어디를, 그리고 어떻게 맞히고 있는진 알 수 없었다. 최민 헌터를 전적으로 믿고 방아쇠를 당길 뿐이었다.

한참 공격을 퍼붓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땐 설명창으로 시야가 범벅이 된 후였다.

[절제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시각을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체력 : 399,529]

설명창 너머로 보이는 녀석의 전신은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나름 폭풍으로 우리들의 공격을 쳐내곤 있었지만,녀석의 행위에서 큰 의욕은 느껴지지 않았다.

―콰드득.

그때 그림자 손이 덩굴처럼 올라가 녀석의 사지를 옭아맸다. 손을 밟고 올라선 세빈이가 녀석과 거리를 좁혀 달려가더니 곧 양손으로 검을 쥐어 횡으로 벴다.

[현재 체력 : 357,174]

깊은 공격에 녀석의 체력이 훅 떨어졌다. 아무런 방어 스킬도 없이 ‘절제’의 바로 코앞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휘이잉!

그 틈을 놓칠 리가 없는 ‘절제’가 검은 폭풍을 세빈이를 향해 날렸다.

“하여간 강세빈……!”

―투웅.

자아의 방아쇠를 당겨 세빈이 앞으로 쉴드를 뽑아내자 곧바로 세빈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잠시 후 세빈이가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노련한 대처에 한시름 놓긴 했지만 아찔했던 상황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려가시겠습니까?”

“네?”

“강세빈 헌터에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최민 헌터가 조용히 물어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기보단 그냥 일방적인 나의 걱정이었다.

지금까진 세빈이가 어긋나지 않게 잘 잡아 왔고, 세빈이 스스로도 성숙해졌다고 확신하지만 100% 자부할 수 없으니 말이다.

최민 헌터를 향해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괜찮아요. 혼자서 잘할 거라 믿어요.”

“알겠습니다.”

최민 헌터도 두 번은 묻지 않았다. 담백한 대답과 함께 다시 ‘절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쿠구궁.

얼마 지나지 않아 ‘절제’가 눈을 떴다. 시각의 절제가 끝난 듯했다.

[절제는 숨을 쉬지 않을 것입니다.]

[호흡이라는 행위를 멈춤으로써 명상의 정점에 오르고자 합니다.]

‘이젠 숨까지 참아야 하는군.’

한 번에 끝났던 욕망과 다르게 절제는 두 번의 페이즈를 갖고 있었다. 그것도 숨을 쉬지 않은 채로 공격을 이어가야 하는 조건까지 들이밀었다.

―철컥.

물론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최민 헌터의 품에서 내려온 후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탕!

방아쇠를 당기는 동시에 두 번째 전투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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