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파괴자의 의지―허무’]
[파괴자의 다섯 가지 의지 중 무의식을 다루고자 하는 힘]
[다섯 가지 의지 중 유일하게 정신계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파괴자의 의지가 둘 이상 모이면 새로운 개체가 탄생한다*]
[*파괴자의 의지 전체 소멸 시 지옥도 생산력 대폭 하락]
무용 자세를 취하고 있는 파괴자의 의지에서 시선을 떼고 내 옆의 헌터들을 슥 훑었다. B급 공격계 헌터 두 명과 C급 방어계 헌터 셋이었다. 전면전에 나서기엔 위험하지만 공격 보조로는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세빈이가 있으면 훨씬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다면 세빈이는 패시브 스킬 덕에 정신계 스킬에 강한 면역이 있었다. 파괴자의 의지가 어떤 종류의 정신계 스킬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빈이가 있어서 나쁠 건 하나도 없었다.
상황 돌아가는 것 봐서 세빈이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일단 그 생각은 접어둔 채 나는 헌터들을 향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방어계 스킬 있으신 분은 저 몬스터가 경기장 밖으로 나가지 않게 지붕 부분을 잘 보호해 주세요. 그리고 다른 헌터들 엄호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공격계 헌터분들은 타이밍 재서 공격 들어가 주세요. 일단 저 녀석 시선은 제가 끌겠습니다.”
“네!”
녹두 쪽으로 고개를 들자 녀석도 공중에서 공격을 도울 준비를 했다.
―철컥.
나는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녀석은 정신계 스킬을 쓸 확률이 높아요. 혹시 당하게 되더라도 빠르게 인지해 주세요.”
“저 몬스터를 보신 적이 있는 건가요?”
공격계 헌터 한 명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고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몬스터를 다 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텍사스에서 비슷한 녀석을 본 적 있거든요. 지능이 높고, 사람의 정신을 파고드는 인간형 몬스터를요.”
연기자 녀석을 떠올리며 대충 둘러댔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도 깊게 묻진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쿵.
그때 파괴자의 의지가 다리를 넓게 벌리며 도약하더니 이내 우리의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녀석들이 입고 있는 반투명한 치마가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진짜로 무대 위의 발레리나라고 해도 믿을 법한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녀석들이 움직이자 방어계 헌터들이 순식간에 쉴드를 만들어 안전지대를 확보했고 나와 공격계 헌터들은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탕, 탕, 탕!
탄환이 발사되는 소리와 함께 전투의 막이 올라갔다. 녀석들은 총총 뛰어가며 내 탄환을 피하더니 곧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다들 피하세요!”
―쿠웅.
방어계 헌터의 경고와 동시에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몸을 옆으로 굴러 피하니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곳이 움푹 파인 것이 눈에 보였다.
‘중력을 다루는 건가?!'
파괴자의 의지가 도는 것을 멈췄다. 곧바로 땅을 짓누르는 무형의 힘이 사라졌고, 잔뜩 헤집어진 흙의 잔해만 처참히 쌓여 있었다.
―우웅.
우선 음파로 경기장 전체를 진동시켰다. 두 녀석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헌터가 쏜 바람 총알 하나가 녀석들의 몸을 관통했고 검은색과 흰색 액체가 바닥에 물감처럼 뿌려졌다.
“지금입니다!”
내 신호에 공격계 헌터들이 일제히 스킬을 퍼붓기 시작했다. 저격 총을 멘 헌터가 자세를 낮춘 채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고 그 틈에 한 헌터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녀석의 몸을 향해 내리찍었다.
―쾅!!
파괴자의 의지가 간발의 차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녀석들은 거울처럼 똑같은 동작을 취했고 서로의 손을 천천히 맞잡았다.
―콰과광!
“큭!”
그러자 새하얀 화살이 수평으로 날아왔다. 허리를 숙여 화살을 피한 후 탄을 발사하기 위해 방아쇠를 잠깐 뗐다 다시 당겼다.
―탕, 탕, 탕!
움직임이 다시 가벼워진 녀석들은 춤을 추듯 탄환을 피하곤 제자리에서 빠르게 돌았다.
―퍼버벙!
똑같은 공격에 두 번 당할 순 없다. 중력이 내 몸을 짓누르기 전에 바주카로 소리 포탄을 발포했다. 날아간 방향을 따라 공기를 진동시키더니 결국 녀석들의 옆구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 다리를 들고 우아하게 서 있던 녀석들의 몸이 옆으로 확 꺾여 조금 기괴한 모습이 되었다.
‘공격 패턴은 단순하네.’
제자리에서 돌면 중력 공격, 그리고 손을 맞대면 화살 공격. 아직 사용하지 않은 정신계 공격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 외에는 특별해 보이는 공격은 없었다.
“이야압!!”
―쾅!
얼마 지나지 않아 기합과 함께 도끼를 든 헌터가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도끼가 새하얀 녀석의 목을 치자 너무나 쉽게 녀석의 머리가 떨어졌다. 그것은 물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하더니 곧 잔디 위를 끈적하게 덮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두 녀석의 움직임이 동시에 멎었고, 모두의 시선이 녀석들에게 꽂혔다.
“끼야아아악!”
“컥!”
“귀가……!”
정적도 잠시, 고막을 찢는 듯한 비명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귀는 물론 머리까지 징징 울려 중심 잡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결국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녀석을 향해 자아를 조준했다.
―서걱.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이질적인 절단 음이 들렸다. 검은 녀석이 우리를 향해 손바닥을 펼친 모습이 내 손 너머로 보이더니 서서히 시야가 빙글 돌기 시작했다.
“커, 커헉……!”
고통보다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목 밑으로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 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내 몸을 짓누르는 게 아닌, 말 그대로 감각 자체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쿵.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파괴자의 의지의 머리가 남기고 간 흔적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이해했다.
‘지금 내 머리도 저 녀석처럼……’
“컹!”
“헉……!”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고 시야의 한가운데 있는 녹두와 눈이 마주쳤다.
―텁.
녀석에게 말을 걸기 전에 일단 내 목부터 만져 보았다. 파괴자의 의지의 것처럼 잘린 줄 알았던 목은 너무나도 멀쩡했고 작은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젠장할. 이런 정신계 스킬이구나.'
녀석의 스킬에 걸리기 전에 손바닥을 펼쳐 보인 것이 생각났다.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녹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신이 좀 들어?'
‘응. 멀쩡해. 깨워줘서 고마워.'
이제 보니 종아리 부근에 녀석의 잇자국이 살짝 나 있었다. 끔찍했던 악몽에서 나를 깨우려 고군분투한 흔적일 것이다. 주위에는 다른 헌터들이 모두 바닥에 엎어진 채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쿠구궁.
녹두의 배리어에 녀석들의 새하얀 화살이 박혔다. 배리어를 부수기엔 약한 공격이었지만 녀석이 다른 의지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서 떠날 수도 있으니 오래 버텨서 좋을 건 없었다.
나는 자아를 단검으로 바꿔 헌터들을 향해 다가갔다.
“헉, 으으, 컥……!”
그도 나처럼 목이 잘렸다고 생각한 건지 연신 목을 쓰다듬으며 금방 기절할 사람처럼 눈동자의 초점이 자꾸 흐려졌다. 그의 팔을 억지로 잡아내려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찌르고 나서야 그가 정신을 차렸고 또렷해진 눈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정신계 스킬이에요. 하나도 안 다쳤으니까 안심하세요.”
“아, 아… 하아아…….”
그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목이 잘렸던 그 감각이 아직 생생한 모양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는 동안 다른 헌터들도 차례로 스킬을 풀어 주었다. 아예 기절해 버린 헌터는 숨을 쉬는 것까지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괴자의 의지 녀석들은 이 경기장이 무대라도 되는 양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새하얀 녀석은 언제 동요했냐는 듯 머리 없이도 차분하게 춤을 이어 나갔다.
‘자신이 당했던 공격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같네.’
우리가 녀석의 머리를 날렸기 때문에 그것과 동일한 환상을 보여준 것이다. 스킬 사용 신호는 아마 비명과 함께 손바닥을 펼치는 것이겠지.
헌터들을 눈으로 슬쩍 훑자 슬슬 싸울 준비가 끝난 듯 보였다.
“방금 저희가 겪은 게 녀석의 정신계 스킬이에요. 비명을 지르고 손바닥을 펼치면 녀석이 당했던 공격을 우리에게 환상으로 보여주는 것 같고요.”
“하아아…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았네요.”
도끼를 멘 헌터의 얼굴이 한껏 수척해졌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를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일단 스킬이라는 건 알았으니 다음엔 더 빨리 풀 수 있을 거예요.”
“스킬을 쓰기 전에 해결해 버리는 게 제일 좋긴 하겠네요.”
방어계 헌터가 무기를 고쳐 들며 파괴자의 의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 정도 수준이면 한 번에 해결할 수도 있겠는데?'
나는 배리어 너머로 파괴자의 의지와 사람들을 번갈아 본 후 입을 열었다.
“딱 5초만 저 녀석들의 움직임을 묶어 주시겠어요?”
“5초요?”
“네.”
―끼리릭.
자아를 떨어트리자 그것은 박격포 형태로 조립되어 바닥에 묵직하게 착지했다.
“그럼 확실하게 보내버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놀라움]
내 태도에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저 몬스터에 대한 증오심이 만나 투지가 불타는 듯했다.
―쿵.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파괴자의 의지 쪽으로 몸을 틀었다.
“확실하게 잡아드리죠!”
“감사합니다. 3초 후에 배리어 해제할게요!”
배리어 내부에서 어떤 말이 오가는지 알 리가 없는 파괴자의 의지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우리의 배리어를 깨트리려 하고 있었다.
‘셋, 둘, 하나.’
그렇게 3초가 흐르고 배리어는 반짝임만 남긴 채 모습을 감췄다.
“으랏차!”
―쾅!!
그와 동시에 도끼를 든 헌터가 가장 먼저 뛰쳐 나가 녀석들의 허리를 단번에 쳐올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파괴자의 의지가 당황한 듯 손을 마주 잡고 화살을 날렸지만, 흙으로 된 방어벽이 그것들을 막아 피할 시간을 충분히 벌어 주었다.
―쿵, 쿵, 쿵.
곧이어 녹두의 빛줄기가 하늘에서 떨어져 녀석들의 퇴로를 막았다. 파괴자의 의지는 뒤로 물러나는 것을 포기하고 높이 뛰어올라 우리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그 위치가 정확히 박격포의 포구 바로 앞인 것도 모르고 말이다.
‘됐다.’
―콰과광!!
두 녀석의 고개가 박격포를 향한 순간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포탄이 녀석들의 몸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