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최민 헌터……!”
“최민 헌터다!”
헌터들이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방금까지만 해도 절망하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최민 헌터의 등장에 지옥도가 사라진 것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타닥.
그가 내 바로 앞에 착지했다. 최민 헌터는 내 연락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건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툭.
그의 신발 앞코를 두드리며 최대한 멀쩡한 티를 내 보았다. 내 행동이 얼마나 그를 안심시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민 헌터가 내 앞에 쪼그려 앉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확실히 아까보단 몸이 편해졌어.’
아이테르의 로브의 자연 치유 효과 덕에 호흡이 조금 편해졌다. 물론 피가 조금 멎은 정도일 테지만, 고비는 제대로 넘겼겠지.
“저게 히든 몬스터입니까?”
“……….”
“헌터넷 알림을 받았습니다. 정체 미상의 히든 몬스터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히든 몬스터들끼리 만나지 못하도록 처리하라고 하더군요.”
다행히 하미준 헌터가 제대로 안내했나 보다. 최민 헌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입술을 뗐다.
“지금, 저 녀석은… 미래를 볼 줄, 윽! 알아요…….”
“예지 능력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텁.
고개를 끄덕이려 하자 최민 헌터의 손이 내 얼굴과 바닥 사이로 들어왔다. 다른 곳이 하도 아파서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 와보니 얼굴도 많이 긁힌 모양이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이 불에 덴 것처럼 쓰라렸다.
최민 헌터가 엎어져 있던 내 몸을 조심스럽게 눕히는 동안 난 말을 덧붙였다.
“최민 헌터는 한 번 시간선에서, 이탈한 적이, 있으니까…….”
“그래서 절 부르신 거군요. 알겠습니다. 더 이상 말하지 마시고 안정을 취하세요.”
숨이 차서 말이 뚝뚝 끊기자 최민 헌터가 빠르게 대화를 끝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헌터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최, 최민 헌터가 상대하시는 건가요?”
“신지의 헌터도 당했습니다. 조심하셔야 해요!”
―후우웅.
최민 헌터가 방공호를 거두고 우리와 파괴자의 의지 사이에 불의 벽을 세웠다. 그리고는 헌터들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신지의 헌터의 치료와 저의 엄호를 부탁드립니다. 신지의 헌터가 어느 정도 공격을 해놓았으니 금방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시선이 내 쪽으로 내려왔다. 무표정이었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투쾅!
곧이어 최민 헌터가 불꽃 궤적을 남기며 벽을 단숨에 돌파해 녀석을 향해 날아갔다. 이에 몇몇 방어계 헌터들은 벽 뒤에서 나와 그의 전투를 도왔고, 치료계 헌터는 내게 붙어 열심히 스킬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퍼버벙!
벽 너머로 폭발음이 들렸다. 어떻게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옳은 선택을 했길 마음속으로 빌 뿐이었다.
절대자 녀석들은 최민 헌터를 보고 ‘시간의 이탈자’라고 했다. 방공호 안에서 죽는 것을 택하다 시간선으로부터 벗어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조율자 덕분에 다시 시간선에 올라타긴 했지만, 아마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시간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파괴자의 의지―시간’의 능력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최민 헌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른다면 녀석의 전투 능력을 반으로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몸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면, 바로 전투에 복귀해야 해.’
“앗, 신지의 헌터. 아직 상처가…….”
“괜찮, 윽, 습니다…….”
몸을 일으켜 앉는 것까지는 겨우 성공했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 내 몸을 살피니 멀쩡한 곳이 없긴 했다. 핏자국과 멍으로 뒤덮인 팔과 다리를 옷으로 다시 감춘 채 불의 벽 밖으로 고개만 살짝 뺐다.
―콰과광!
파괴자의 의지와 최민 헌터가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최민 헌터는 푸른 불꽃을 온몸에 두른 채 녀석 주위를 날아다녔고 녀석에게 주먹을 꽂을 때 빠르게 가속해 순간적으로 강하게 공격했다.
‘확실히 최민 헌터가 우위에 있어.’
파괴자의 의지가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상태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녀석의 움직임에 여유가 없어진 게 확실히 드러났다. 상대의 행동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듯한 녀석은 창을 휘두르며 최민 헌터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철컥.
자아를 입가로 가져와 목소리를 주입했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면 이번엔 내가 그를 구해야 한다. 최민 헌터의 전투를 말없이 지켜보며 자아를 더욱 꽉 쥐었다.
―콰앙!
푸른 불꽃이 순식간에 녀석을 덮쳤다. 땅을 적셨던 끈적한 액체가 증발할 정도로 뜨거운 온도였다. 파괴자의 의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금이 간 핵은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파들파들 떨렸다.
“최민 헌터 조심하세요!”
―파바박!
하지만 녀석도 쉽게 목숨을 내주진 않았다. 몸이 반쯤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녀석의 창이 허공을 갈라 최민 헌터를 향해 날아왔고, 얼음 가시로 갈라져 그의 목을 노렸다.
다행히 내 경고를 들은 최민 헌터가 빠르게 비행 궤도를 바꿔 그것들을 피했다. 곧이어 폭발을 일으켜 가시들을 한 번에 녹였다.
파괴자의 의지는 약이 오를 대로 올랐는지 바닥에 있던 점액을 전부 얼음 가시로 바꿔 위로 올려보냈다. 당연히 최민 헌터에게 닿지 못했다.
녀석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다 허리를 뒤로 꺾은 순간 붉은 핵이 훤히 드러났다. 기회는 지금이었다. 녀석이 최민 헌터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는 지금이 저 핵을 부술 절호의 기회다.
―퍼버벙!!
바주카로 자아를 바꾸자마자 바로 발포했다. 묵직한 소리 포탄이 주위에 있던 모든 것들을 진동시키며 앞으로 나아갔고 녀석의 가슴팍 한가운데를 정확히 관통했다.
‘됐다!’
붉은 핵이 완전히 부서져 바닥 위로 떨어졌다. 가루가 된 핵은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더니 곧 붉은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치이이익.
그러자 파괴자의 의지의 몸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내 목숨을 뺏어갈 뻔했던 점액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기의 일부분이 되었고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 사라진 거죠?”
“네. 완전 소멸했어요.”
“하아아… 다행이다.”
내 대답에 헌터들이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나도 긴장이 풀려 자아를 바닥에 내려놓았고 하늘을 보고 누운 채로 잠시 숨을 돌렸다.
―후웅.
우리의 앞을 단단히 지키고 서 있던 불의 벽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최민 헌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고개만 내려 나와 눈을 맞추자 나는 씩 웃으며 말문을 텄다.
“와줘서 고마워요. 최민 헌터가 안 왔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하기 싫네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안심]
최민 헌터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자 몸이 단번에 위로 당겨 올라왔다.
‘많이 괜찮아졌네.’
나를 치료해준 헌터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네. 조금 더 쉬면 전투도 가능할 거예요.”
“혹시 모르니 한진우 헌터에게 한번 가보시죠. 지금 광화문 치료소에 계신다고 합니다.”
“길이 맞으면요.”
인벤토리에서 추적 나침반을 꺼내 살폈다. 물방울 문양을 가리켰던 바늘이 빙그르르 돌더니 곧 달과 태양이 겹쳐 있는 문양 쪽으로 기울어졌다. 고개를 들자 최민 헌터도 나침반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가실 겁니까?”
“일단 그래야죠. 아직 던전이 많이 남아 있어서, 다른 상급 헌터들의 힘이 필요한 곳이 있을 거예요.”
최민 헌터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날 바라보기만 했다. 아마 내가 또 다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조용한 걱정에 최민 헌터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지금처럼 부를게요.”
“꼭 그렇게 해주세요.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우웅.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헌터넷 아이콘을 누르자 상단에 파견 요청 알림이 반짝거렸다.
[파견] 신지의 (SS) 히든 몬스터 1건
월드컵경기장 주경기장 내부로 이동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쪽인가 보군.’
지도에 표시된 방향으로 살짝 움직이자 나침반이 정확히 달과 태양 문양을 가리켰다.
“먼저 갈게요.”
“조심하세요.”
―후웅
최민 헌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월드컵 경기장 방향으로 달려 나가며 팔찌 위의 보석 위에 손을 올렸다.
―키이잉.
그러자 어딘가에 소환되어 있던 녹두가 팔찌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튀어나왔다. 녀석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나와 함께 발을 맞춰 달려 나갔다.
‘언니!’
‘갑자기 소환해서 미안. 혹시 내가 급하게 불렀어?’
‘아니. 마침 길거리 돌아다니는 몬스터들 전부 처리한 후였어.’
녹두의 등에 손을 얹자 녀석이 내 뜻을 이해했는지 자세를 낮췄고 난 곧바로 등에 올라탔다.
―쉬이익.
그러자 녀석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목을 꽉 끌어안은 채 녹두의 눈앞에 지도 화면을 내밀었다. 그후 손을 뻗어 정면으로 얼핏 보이는 경기장을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이쪽으로 이동해야 해. 저 멀리 큰 건물 보이지?’
‘응, 보여. 저기로 가면 되는 거지?’
‘응. 부탁할게.’
‘나한테 맡겨!’
녹두는 한 번 더 가속하며 경기장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내 속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경기장에 다다랐을 때쯤 고개를 내려 게이트와 히든 몬스터를 찾아다녔다.
‘언니, 저기야!’
녹두의 고개가 향한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관중석에 떨어진 새카만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게이트 앞엔 흰색과 검은색 구체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공략팀처럼 보이는 헌터 무리가 잔디 위에서 그것과 대치하고 있었다.
―탁.
녹두의 등에서 내려 그들 앞에 착지하자 헌터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아, 신지의 헌터!”
“지금 어떤 상황이죠?”
“공략하던 중에 헌터넷 메시지를 받았어요. 보스 몬스터 대신 저게 소환됐고 게이트 밖으로 나가길래 저희도 따라 나왔죠.”
저격 총을 들고 있는 헌터가 빠르게 설명하곤 곧바로 저격 태세를 취했다. 나도 고개를 돌려 ‘파괴자의 의지’를 바라보았다.
―파지직.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던 구체가 맞닿더니 이내 커다란 스파크를 만들어 냈다. 구체들은 몸집을 키워 점차 사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발레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들은 발레복을 입고 있는 인간의 형체가 되었다. 똑같이 생긴 두 형체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색에만 차이가 있었다. 녀석들은 팔을 높이 올린 채 우리를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