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93화 (293/366)

293화

―우드득.

“으으윽……!”

작살 끈으로 성춘향의 목을 옭아맸다. 녀석이 쓸 수 있는 비단은 이미 최민 헌터에 의해 전부 태워진 후였다. 이몽룡은 세빈이와 고전을 펼치고 있어 자신을 구할 리 만무했다.

―타앙!

성춘향의 몸을 아까처럼 세빈이를 향해 날렸다. 세빈이는 검을 휘둘러 이몽룡을 한번 밀어낸 후 곧바로 그림자를 뽑아내 두 녀석을 한꺼번에 붙잡았다. 세빈이가 내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마자 나는 녀석들 쪽으로 달려가 거리를 좁혔다.

“안 돼, 안 된다……!”

이몽룡은 제 앞에서 조립되는 박격포를 보며 몸을 비틀었지만 그럴수록 그림자가 녀석의 몸을 더욱 옥죌 뿐이었다.

―퍼버버벙!!

두 녀석은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박격포의 탄환에 맞아 온몸이 터져나갔고, 던전 안의 공기 전체가 진동해 관아 근처에 있던 나무들도 흔들렸다.

17시간이 걸렸다. S급 게이트를 20시간도 안 돼서 깨다니, 웬만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할 수 없는 짓을 계속해서 벌이고 있었다. 세빈이와 최민 헌터의 안색을 살피니 슬슬 두 사람의 얼굴에도 피로가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일부러 던전 공략 타이밍을 늦춰서 체력 보충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네.’

세 번째 페이즈로 넘어가기 전에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방어가 뚫린 곳이 없는지 점검해 보아야겠다.

―달칵.

나는 인벤토리에 있던 기력 회복제를 입에 털어 넣으며 던전 밖으로 빠져나왔다.

―쿠구구궁.

우리가 남원 S급 게이트에서 나오자 거대한 나무 문이 그대로 무너져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헌터넷을 켜 클리어 상황을 업데이트하자 지도에 표시됐던 게이트 아이콘 하나가 사라졌다.

‘어느 정도 정리됐네.’

다른 지역들을 살펴보니 C급 이하 게이트들이 10개 내외로 남아 있는 듯했다. 더 제거하면 바로 3번째 페이즈에 돌입할 테니 일단 공략을 멈춘 후 방어 전선을 재정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타닥.

하미준 헌터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한 번 흘러나오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바로 들렸다.

―수고했어.

“하미준 헌터, 잠깐 휴식 어떨까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지.

하미준 헌터가 낮은 음성으로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 딱 소환된 게이트의 70%가 사라졌거든? 여기서 공략 중단하고 3시간 정도 부상자 치료한 후에 나머지 게이트 동시 공략하려고.

“3페이즈 돌입 전에 게이트를 전부 없앨 생각이군요.”

―그럼. 전에 있던 게이트가 계속 남아 있으면 마지막 페이즈 땐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내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하미준 헌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그에게 관리 역할을 맡긴 건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직 차도윤 헌터는 못 찾은 거죠?”

―아쉽게도 그렇네. 회장님도 실종된 마당에 차도윤 헌터까지 사라졌다는 게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큰 혼란이 생길 것 같아서 일단 본부에 있는 일부 직원들만 인지한 상태야.

김강희와 차도윤 헌터의 동시 실종,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까 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직도 김강희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 건가?’

김강희는 부모에게 학대당한 차도윤 헌터에게 처음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민 어른이다. 그것 때문에 차도윤 헌터가 김강희가 가는 길이라면 지옥 끝까지 따라갈 것처럼 굴었던 것이고. 그 끝에 배신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가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무튼 신지의 헌터도 잠깐 숨 좀 돌리고 있어. 지도에 치료소들 표시해 놨으니까 부상 입었으면 가 보고.

“알겠어요.”

전화를 끊자 곧바로 헌터넷 화면에 지도가 크게 떴다. 게이트와 헌터 아이콘 사이 사이에 병원 아이콘이 나타났고 아이콘을 누르니 대기 중인 치유계 헌터들의 프로필이 나타났다.

비상사태를 위해 대비해놓은 시스템이 완벽하게 굴러가고 있음을 보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론 이 시스템의 모든 기반을 만든 것이 김강희라는 것이 떠올라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대체 녀석은 왜 이 세상을 무너트리는 거지?’

―우웅.

핸드폰이 진동하더니 이내 헌터넷 상단에 아까와 같은 붉은 글씨가 떴다.

[긴급] 공략 임시 중단.

다음 페이즈를 대비하기 위해 공략을 임시 중단합니다. 3시간 후 공략을 재개할 예정이며 헌터 여러분들은 현재의 위치를 최대한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부상자 이송은 계속 진행해 주시길 바랍니다.

“게이트 통해서 나오는 것만 처리하고 좀 쉬어도 되겠네.”

세빈이가 핸드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헌터들이 하나둘씩 길거리에 주저앉은 채 숨을 돌리고 있었다. 최민 헌터는 부상자들을 치료소로 이동시킨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나도 움직여야 해.’

이제 슬슬 김강희의 위치를 파악해서 그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손을 써야 하고, 덩달아 사라진 차도윤 헌터도 찾아내야 한다.

“주변 순찰 좀 갔다 올게. 세빈이 넌 여기서 대기해 줘.”

“차도윤 헌터 찾으려고?”

세빈이가 조용히 물어오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목소리를 더욱 낮춰 세빈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김강희도 찾으려고.”

“…위험하면 무조건 알려줘. 바로 갈게.”

“알겠어.”

낮말을 듣는 새로 위로 도약하며 주위 상황을 살폈다. 쉴 틈 없는 전투가 4일 연속으로 이어지다 보니 사람들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언니!’

‘아, 녹두야!’

던전 밖에서 몬스터 처치를 돕던 녹두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녀석도 꽤 오랫동안 소환 상태를 유지하는 중인데 다행히 쌩쌩해 보였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곧장 물었다.

‘녹두야, 혹시 차도윤 헌터 봤어?’

‘그 활 들고 다니는 금발?’

‘응.’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해 보았지만 녹두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차도윤 헌터의 공격 범위는 넓은데다가 파괴력도 상당한 편이다. 그가 어딘가에서 혼자 몬스터를 잡고 있다면 그의 ‘천재지변’을 알아챌 수밖에 없다. 즉, 차도윤 헌터는 부상을 입은 채로 혼자 고립되어 있거나, 아니면 스스로 모습을 감춘 상태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 상황이야.’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지끈거리는 머리를 조금 풀어 주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일단 지금은 휴식 시간이니까 나중에 다시 소환할게.’

‘응. 알겠어.’

녹두와 한번 이마를 맞댄 후 소환을 해제했다. 부드러운 털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팔찌 안으로 녹두가 들어왔다.

―쿵, 쿵.

그때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서초역 근처에서 커다란 석탑이 날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주 C급 던전의 일반 몬스터군.’

나는 재빠르게 그쪽으로 이동해 자아를 장전했다.

―콰그작!

석탑과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쯤 방아쇠를 당겼고, 탄환이 석탑을 꿰뚫자마자 그것은 도로 위로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열려 있던 게이트에선 계속해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앗, 신지의 헌터!”

“뭐? 신지의 헌터가 왔어?”

내 등장에 게이트 앞에서 대기 중이던 헌터들이 술렁거렸다. 얼핏 보니 전부 B급과 C급 헌터들로 구성되어 있는 듯해, 다음 페이즈부터는 조금 버거워 보이는 조합이었다.

“몬스터들은 제가 맡을 테니, 부상자 치료에 신경 써 주세요! 이다음부터는 더 높은 등급의 게이트가 나올 겁니다!”

“하, 하지만 신지의 헌터 혼자서…….”

“이 전투는 장기전이 될 것이라 체력 관리가 중요해요. 저는 괜찮으니까 확실하게 휴식해 주세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긍]

내 말에 헌터들이 쭈뼛거리며 무기를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쿵.

나는 쉴드를 만들어 헌터들과 게이트 사이에 벽처럼 세운 후 곧바로 몸을 돌려 탑을 향해 자아를 조준했다.

몸집이 크니 방아쇠를 당기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기는 족족 석탑에 탄환이 맞았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후…….”

석탑을 열 개쯤 부수고 나서야 게이트가 조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한두 시간 후쯤이면 다시 튀어나오겠지만 일단 이곳의 헌터들이 체력을 보충할 시간 정도는 번 셈이다.

나는 몸을 돌려 쉴드 바로 뒤에 있던 헌터를 향해 이야기했다.

“전 다른 곳으로 가 볼게요. 헌터넷 지령 따라서 잘 움직여 주세요.”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지의 헌터!”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다시 위로 도약했다. 아직까진 무너진 건물도 없고 목숨을 잃은 헌터들도 없는 듯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별말 없는 걸 보니 그쪽도 마찬가지겠지.

“뭐야, 저 사람……?”

그때였다. 넓은 공사 현장의 한가운데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건지 그는 하늘에 떠 있는 지옥도를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타앙.

공사장 바닥을 향해 작살을 날린 후 곧바로 방아쇠를 당겨 그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땅에 착지하자마자 내 기척에 놀란 듯한 검은 뒤통수가 파드득 떨렸다.

“여긴 위험합니다. 대피소로 데려다드릴 테니 지금 바로…….”

그가 하늘을 향했던 고개를 내리는 동시에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런 말 없이 나를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선이 얇은 이목구비와 길고 빽빽한 속눈썹을 가진 마른 체형의 남자…

“차, 차도윤 헌터?!”

차도윤 헌터였다. 머리 색이 달라져 바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자세히 보니 틀림없이 차도윤 헌터였다. 긴장이 풀려 나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쉬었고 그에게 다가가 질문을 쏟아냈다.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예요? 헌터넷에서 위치 정보가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아, 그, 그랬나요?”

“다친 덴 없죠?”

“괜찮, 습니다…….”

‘…뭔가 이상한데.’

머리를 염색해서 그런 건지, 그의 피부는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지금 보니 몸도 살짝 떨리고 있었고, 불안한 듯 연신 입술을 물어뜯었다.

“저, 신지의 헌터…….”

“네? 윽!?”

―콰앙!!

대답하기 무섭게 돌풍이 갑작스럽게 내 몸을 집어삼켜 멀리 날려버렸다. 난 공사장 벽에 부딪힌 후 바닥으로 떨어졌고,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차도윤 헌터를 바라보았다.

“차도윤 헌터……?”

일반적인 상식으로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도윤 헌터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나를 향해 시위를 당기는 풍경은 겪어본 적도, 그리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풍경이었으니까.

“절 따라오셔야 해요.”

―콰과광!!

그는 정체불명의 말과 함께 시위를 놓았고 동시에 엄청난 파열음이 고막을 찢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