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후두둑.
“초동아이 낫자루 잡듯 우악한 놈 상투 잡듯. 양각을 취어드니, 베개는 우그로 솟구치고, 이불이 벗겨지며 촛불은 제대로 꺼졌구나.”
자객들의 잔해가 힘없이 바닥 위로 떨어지자 소리꾼의 목소리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녀석들의 몸은 풍선 터지듯 너무나 쉽게 터져 버렸다. 세빈이의 공격력이 대폭 상승한 탓도 있겠지만, 특성 ‘몰살’이 말 그대로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어, 음…….”
세빈이도 덩달아 놀랐는지 나를 돌아보며 머쓱한 미소를 짓다 곧 그림자를 다시 집어넣었다.
“일단 이동할까?”
“그래… 컥!”
“지의야!”
순간 목이 턱 하고 막혀 거친 기침을 토해내자 입을 가린 손바닥에 피가 묻어 나왔다.
―탁.
순간 머리가 핑 돌아 휘청거리자 세빈이가 곧바로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고, 난 넘어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경고가 있는 특성은 확실히 몸에 무리를 주는구나.’
세빈이와 최민 헌터의 수치를 초기화하고 호흡을 가다듬자 고막을 찌르던 이명과 울렁거리던 속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지의 헌터! 괜찮습니까?”
“괜, 찮아요… 세빈아, 놔 줘.”
아랫입술을 꽉 문 채 화가 난 듯한 세빈이가 내 허리에 두른 손을 고집스럽게 놓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세빈이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떨어트려 놓았다.
“나 정말로 괜찮아. 빨리 가자.”
“…알겠어.”
“신지의 헌터, 잠깐.”
“네?”
―텁.
그때 최민 헌터가 손수건에 물을 적셔 내 오른쪽 손바닥을 닦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핏자국은 금세 지워져 손바닥이 깨끗해졌다.
“곧 보스전입니다. 무기를 놓치면 큰일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최민 헌터는 손수건을 다시 외투 안에 집어넣으며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이제 가도 될까요?”
“그러죠.”
세빈이가 내 오른쪽으로 슬쩍 다가오더니 주의를 환기시켰다. 최민 헌터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갔다.
‘지금 던전 밖 시간으로 17시간 정도 지났네.’
‘몰살’ 특성 덕에 디펜스전에서 시간을 많이 단축했지만, 보스전까지 고려하면 적어도 3시간 안에는 성춘향과 이몽룡을 만나야 한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그의 뒤를 따랐다.
―꾸욱.
“응?”
갑자기 세빈이가 내 오른손을 살짝 잡더니 도장을 찍듯 엄지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고개를 돌리자 세빈이는 다시 내 손을 놓고는 싱긋 웃었다.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얼른 이동하자.”
“야, 야……!”
세빈이는 보스전 장소까지 날아갈 생각인지 공중으로 도약하며 무아를 썼고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신경 안 써도 되겠지?’
지금 제일 급한 건 이 던전을 빠르게 공략하는 것이다. 세빈이의 묘한 행동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나도 길을 따라 달려 나갔다.
* * *
“그때 춘향이 수풀 속에 있는 병사들을 발견하고 외치메! 아이고, 서방님. 아직도 저희를 죽이려는 자객들이 있사옵니다! 하더니 몽룡의 손을 덥석 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라!”
이몽룡과 성춘향이 재회하자 소리꾼이 기다렸다는 듯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두 녀석이 멜로드라마를 찍는 동안 우리는 곧 있을 보스전을 준비하며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다음 게이트 디펜스전 때도 사용해야 하니까 여기선 강화 없이 갈게.”
“알겠어.”
“알겠습니다.”
남원 S급 게이트의 보스인 성춘향과 이몽룡은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남은 한쪽의 공격력이 대폭 상승한다. 그 때문에 지난번에 왔을 때 큰 부상을 입었다. ‘살신성인’ 효과가 없었으면 목숨을 잃었겠지.
아무튼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으려면 녀석들을 동시에 해치워야 한다. 그리고 이 조합이면 충분히 시도해볼 만했다.
난 머릿속으로 대충 시뮬레이션을 돌린 후 두 사람을 향해 이야기했다.
“최민 헌터는 성춘향의 비단들을 전부 태워 주세요. 그것만 빼면 녀석은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세빈이 넌 이몽룡을 상대해 줘. 그리고 성춘향이랑 같이 두 녀석의 발을 묶어줘.”
“응.”
―철컥.
나는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내가 박격포로 끝내볼게.”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전투 준비가 끝난 성춘향과 이몽룡이 우리를 쏘아보았다.
―투쾅!
세빈이가 이몽룡에게 먼저 달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보스전의 막이 올라갔다.
“서방님께 손대지 말거… 윽!”
세빈이의 목을 노린 비단은 내 탄환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고, 난 곧바로 방향을 바꿔 녀석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성춘향이 비단을 늘어트리며 모습을 감췄고 그중 몇 개는 뱀처럼 기어와 내게 달려들었다.
―화르륵.
폐부에 뜨거운 공기가 들어차는 걸 느끼는 동시에, 이번엔 파란 불꽃이 비단을 태웠다. 겹겹이 쌓여 가로막혔던 시야가 순식간에 트이더니 곧 당황한 기색의 성춘향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그작!
자아를 작살총으로 바꿔 녀석의 발 바로 옆에 작살을 박았고 다시 방아쇠를 당겨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텁.
“히익……!”
팔을 뻗어 녀석의 목을 움켜쥐자마자 곧장 자아를 쇄골 쪽에 바짝 붙였다.
―탕!!
“아아악!”
“춘향아! 큿……!”
―챙!
성춘향이 가슴께를 움켜쥐며 뒤로 넘어갔다. 뚫린 몸에서 피 대신 반짝이는 가루가 흘러내렸다. 나는 곧바로 공중으로 날아올라 녀석에게서 떨어졌다. 녀석에게 달려가던 이몽룡도 세빈이의 그림자에 막혀 다시 검을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성가시게 하지 마!”
성춘향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니 곧 녀석의 치마 속에서 수십 장의 비단 자락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탕, 탕, 탕.
“쳇……!”
탄환으로 비단에 구멍을 냈지만 그것들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난 자아를 단검으로 바꿔 비단을 직접 찢었다.
―우드득.
수십 장의 비단을 한 번에 자르기엔 완력이 부족했다. 나는 무기를 놓고 곧바로 앞으로 굴러 비단을 피했고, 반쯤 찢긴 비단은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곳에 위협적으로 꽂혔다. 땅에 박힌 비단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자 흙먼지가 마구 날리기 시작했다.
―퍼버버벙!
자아를 다시 쥐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붉은 불꽃이 먼저 비단들을 집어삼켰다.
‘이틈에 성춘향을……!
성춘향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색이 된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다음 비단을 뽑아내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모양인지 녀석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쿵!
“히익!”
자아를 작살총으로 바꾸며 곧바로 성춘향의 옆으로 이동하자 녀석이 잔뜩 기겁한 듯했다. 그리곤 녀석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어 작살 끈으로 단번에 묶었다.
“이거, 이거 놔!”
“세빈아!”
―타앙!
세빈이의 이름을 외치는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성춘향의 몸이 힘없이 그쪽으로 날아갔다. 세빈이는 곧바로 바닥에서 그림자 손을 뽑아냈다.
“아아악!”
“윽! 춘향아!”
손은 성춘향의 사지를 옭아매더니 그대로 이몽룡의 품에 안겨 주었다. 이몽룡은 당황하는가 싶더니 양손으로 녀석을 받아냈고 세빈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콰그작.
하지만 녀석도 세빈이의 그림자에 온몸이 묶여 있었다. 결국 성춘향과 이몽룡 모두 완전히 무력해졌다.
두 녀석의 움직임이 동시에 묶인 지금 이 순간, 내가 확실하게 공격을 넣을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끼리릭.
두 녀석과 거리를 좁히며 자아를 박격포 형태로 바꾸었다. 순간적으로 무게가 늘어나 한 번 주저앉을 뻔했지만 겨우 팔에 힘을 줘 이겨냈고, 녀석들의 바로 앞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이게 대체……!”
―퍼버버벙!!
경악에 가득 찬 이몽룡의 말은 박격포의 발포 음에 집어삼켜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포탄이 녀석들의 몸을 정확히 관통하자 우릴 둘러싼 관아의 풍경이 크게 흔들렸고 그림자 손안에 갇힌 두 인영이 축 늘어졌다.
―투둑.
세빈이가 그림자 손을 거두기 무섭게 성춘향과 이몽룡이 바닥 위로 쓰러졌다. 숨이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지만 몸을 일으켜 우리를 공격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녀석들의 팔과 다리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 썩은 나무줄기처럼 검푸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아를 쥐며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숨만 식식 몰아쉬며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탕, 탕.
난 녀석들의 어깨를 발로 짓누른 채 방아쇠를 당겼다. 녀석들의 이마에 탄환이 하나씩 박히자 신체가 완전히 가루가 되어 바스라졌다.
그때 클리어를 알리듯 관아 구석에 있던 게이트가 벌컥 열렸다.
“하아…….”
“정말로 하루를 넘기지 않았군요.”
최민 헌터가 시간을 한번 확인한 후 내 옆으로 착지했다. 다행히 최민 헌터와 세빈이 둘 다 약간 긁힌 상처를 제외하곤 멀쩡해 보였다.
‘대충 몸은 풀렸으니 다음 게이트는 시간을 더 단축해야겠어.’
게이트를 하나라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최민 헌터에게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후 빠르게 게이트 밖으로 발을 옮겼다.
―끼이익.
* * *
“거기 막아!”
“3시 방향 보스 몬스터 출현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도심은 몬스터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젠장, 열렸구나……!’
우리가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굳게 닫힌 또 다른 남원 S급 게이트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속에서 일반 몬스터들은 물론 이몽룡까지 쏟아져 나왔다.
―투쾅!
최민 헌터가 가장 먼저 움직여 쓰러진 헌터들을 구조했다. 방공호를 벽처럼 펼쳐 방어막을 구축한 후 그 뒤로 부상자들을 하나둘씩 이동시켰다.
“일반 몬스터부터 먼저 처리해 줘! 내가 보스 몬스터 맡을게!”
“알겠어!”
세빈이가 그림자 손으로 도시를 헤집는 몬스터들의 발목을 잡을 무렵, 나는 날붙이끼리 충돌하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콰과광!
“커헉……!”
거대한 도끼를 든 헌터가 이몽룡의 검에 밀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동시에 이몽룡이 그를 향해 검을 높이 들었지만, 그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헌터가 방어막을 펼쳐 녀석의 공격을 겨우 막았다.
―타앙!
방어막에 커다란 금이 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방아쇠를 당겼다.
“윽?!”
탄환이 이몽룡의 목을 꿰뚫자 녀석은 목을 움켜쥐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붉게 충혈된 것을 보니 이미 성춘향을 잃고 폭주한 상태인 듯했다.
―철컥.
나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자아를 고쳐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