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89화 (289/366)
  • 289화

    “사거리 앞 E급 하나 완료입니다!”

    “저랑 김윤진 헌터 강남역 방향 D급 들어가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역삼역 앞으로 모인 8명의 헌터들은 2인 1조로 나뉘어 차례대로 던전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하급 던전이다 보니 소규모로 팀을 꾸려서 공략해도 충분했다.

    C급 이하의 헌터들이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B급 이상의 헌터들은 밖으로 빠져나온 몬스터들을 처리했고, 미처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민간인들을 찾아다녔다. 분업이 빠르게 이루어진 덕에 어느새 지옥도가 처음 뱉어낸 게이트들은 거의 다 수습이 완료된 상태였다.

    발언력과 SS급이라는 등급 때문인지 사람들은 큰 거부감 없이 내 지시를 잘 따라 주었다. 내가 던전을 필요 이상으로 꿰고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DG 허브의 힘을 빌렸다는 핑계를 대자 금방 납득했다.

    ‘문제는 C급과 B급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나서 발생하겠지.’

    지금까지는 술술 잘 풀렸으니 의문이 생겨도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클리어 난도가 올라가고 체력이 떨어지며 목숨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신경은 잔뜩 곤두서게 될 것이다.

    내가 98번째 회귀에서 겪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지의 헌터?”

    “아, 네?”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지셔서요… 스킬 하나 걸어드릴까요?”

    황지원 헌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지시에 불만을 표하던 헌터들에게 강압적으로 나왔던 때를 떠올리니 그때의 감정이 얼굴로 드러났나 보다.

    “괜찮아요. 혹시 모르니까 일단 체력을 비축해 두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팔팔합니다!”

    ‘한진우 헌터랑 닮은 구석이 있네.’

    기운이 넘치는 황지원 헌터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어?’

    ―쿵, 쿵.

    황지원 헌터의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보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저 평범한 무기일 뿐인데 묘하게 낯이 익었고, 보면 볼수록 숨통이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회귀자라는 걸 밝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었다. 무리에 섞인 헌터 중 한 사람이 결국 생존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나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지.

    ‘…그게 황지원 헌터였구나.’

    틀림없었다. 황지원 헌터가 갖고 있는 그 단검은 내 목을 노렸던 무기였다. 비록 세빈이에게 막혀 나를 죽이는 데 실패했지만 말이다.

    저렇게 상냥하게 웃는 사람이 살기 위해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걸 알게 되니 쓸쓸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아……!”

    그때 황지원 헌터가 고개를 들며 입을 벌렸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기 전에 이미 따뜻한 기운이 등 뒤에서 느껴졌고, 그 온기의 주인공이 내 앞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최민 헌터!”

    “괜찮으십니까?”

    “…네? 어, 네. 보시다시피 멀쩡하죠.”

    갑자기 나타난 것도 놀랐는데 날 보자마자 단호하게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조금 바보같이 대답해 버렸다. 검붉은 눈동자가 나를 말없이 응시했다.

    ‘아, 설마 내 상태를 보고 달려온 건가?’

    지금 보니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져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아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난 긴 말 대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젠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작게 속삭이자 그도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대답했다.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살짝 벌리자 은은한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최민 헌터는 어느 쪽에 있었어요?”

    “신촌에서 넘어왔습니다. D급 게이트 3개가 소환됐었고 전부 다 해결하고 이쪽으로 왔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으로 헌터넷 아이콘을 눌렀다. 전국에 퍼져 있던 게이트의 수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서울 지도를 확대해 S급 헌터들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광화문에 하미준 헌터, 여의도엔 한진우 헌터, 잠실에는 차도윤 헌터, 그리고 노원 쪽에 세빈이가 있었다. 다행히 겹치는 지역 없이 제대로 흩어져 있었다.

    ‘…김강희는 역시 자취를 감췄군.’

    지도에 뜬 헌터 아이콘 중 김강희를 나타내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김강희가 지옥도가 열린 후 행방불명 상태가 되는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얼핏 본 속보 기사에 ‘김강희 회장, 연락 두절’이라는 문장이 있었으니 소식을 접한 헌터들과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떻게 가라앉을지는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다음에 소환되는 게이트만 수습하고 곧바로 김강희의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그가 감춰둔 던전을 꺼내지 못하게 사전에 막는 게 중요하니까.

    ―타닥.

    나는 핸드폰을 두드려 하미준 헌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람들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질 때쯤 핸드폰 너머로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 신지의 헌터. 거긴 좀 괜찮아?

    “네, 아직까지는요. 하미준 헌터는 아직 광화문이시죠?”

    ―응. 일단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대피시켰고 배리어도 작동시켰어. 혹시 몰라서 본부는 아직 가동 안 시켰는데 게이트 등급 올라가면 바로 켤 예정이야.

    여유로운 목소리와 함께 전투를 치르는 듯한 파열음이 이따금 들렸다.

    “…김강희, 실종된 것 봤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착잡]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네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김강희가 배신자라는 걸 알고 있어도 이런 재앙을 방치한 채 사라진 것이 충격적인 일이긴 했나 보다.

    ―그럼, 알고 있지. 이것도 전이랑 같은 상황이야?

    “네. 지옥도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서 실종됐었어요.”

    ―헌터넷이 잘 돌아가고 있길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개판이었겠어.

    “사람들이 눈치껏 움직여 주고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후반 페이즈로 갈수록 중앙에서 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난 숨을 한번 고른 후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하미준 헌터가 해줬으면 좋겠어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당황]

    아니나 다를까 발언력 창이 나타났다.

    ―어… 뭐라고?

    “불의의 사고로 협회장이 업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면 그 권한을 전부 위임받기로 했다, 라는 말을 협회에 전달하고 앞으로의 상황을 관리해 주세요. 김강희가 튀어나와서 해명할 일도 없으니 이 점을 이용하죠.”

    ―꼭 지정 생존자 같네. 일단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하미준 헌터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왜 나야? 오히려 국장직을 맡고 있는 강세빈 헌터가 더 바람직하지 않아?

    “현재 위치상 하미준 헌터가 협회 본부랑 소통하기도 좋고, 게이트 수습 경험도 훨씬 많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긴박한 상황에서 얼마나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겨우 참았다. 내가 회귀자라는 것을 밝히자 망설임 없이 도끼를 휘두른 하미준 헌터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에게 그런 면모가 있는지 모를 것이다.

    “아무튼 이 일은 하미준 헌터가 적임자예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제가 알려드릴 테니까 하미준 헌터는 인력 배치와 지방 지역들의 헌터들과 소통을 담당해 주세요.”

    ―하하, 귀여운 사람의 부탁은 거절하기 힘들단 말이지…….

    하미준 헌터는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잠시 말꼬리를 늘리다 곧 말을 덧붙였다.

    ―알겠어. 그렇게 할게.

    “정말로 감사해요.”

    ―그럼 다 해결되고 나면 하와이로 데이트…….

    ―우웅.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통화를 유지한 채로 곧바로 헌터넷 화면으로 바꾸니 강남역 방향에 있던 D급 게이트까지 사라진 것이 보였다. 강남 지역에 떨어진 모든 게이트를 제거했다는 뜻이었다.

    ‘게이트 두, 세 개 정도만 더 해치우면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겠는데.’

    ―흠흠, 그럼 이 재앙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부터 간단하게 설명해 주겠어?

    하미준 헌터가 헛기침을 하며 내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 네. 지옥도에서 게이트는 총 다섯 번이 떨어져요. 떨어진 게이트의 약 80%가 제거되면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죠. 후반부로 갈수록 S급 게이트의 비율이 늘어나니까, 던전을 공략할 헌터와 밖에서 대기할 헌터들을 나누는 게 관건이에요.”

    ―그렇네. 게이트를 전부 처리하면 지옥도는 사라지나?

    “…일단은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거짓말을 피하려 애매하게 대답했더니 그가 바로 반응했다.

    ―으음~ 신지의 헌터, 아직도 우리 사이에 숨길 거리가 있나?

    “아직은 말할 타이밍이 아니에요. 신경 쓰이게 할 것 같아서요.”

    ―그게 더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거 알아?

    “나, 나중에 얘기할게요.”

    최민 헌터가 날 보호하고 나서 그들을 통해서 말을 전해도 늦지 않는다.

    ‘그전까지 내가 살아남을 방법도 찾아야 해.’

    나는 숨을 한 번 고른 후 말을 덧붙였다.

    “일단 협회에 연락해서 지휘권부터 잡아 주세요. 곧 두 번째 페이즈 시작할 테니까.”

    ―알겠어. 나중에는 꼭 이야기해줘.

    전화를 끊고 바로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게이트가 거의 다 수습된 것 같아요!”

    “큰 피해 없이 끝나서 다행이네요~”

    “…이제 시작일 겁니다.”

    내가 하려던 말을 최민 헌터가 대신해 주었다. 헌터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자 최민 헌터는 말없이 하늘에 열린 지옥도를 바라보았다.

    ―파지직.

    그것은 다음 페이즈를 준비하듯 검붉은 스파크를 내뿜고 있었다.

    ―쿠구구궁.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들이 운석처럼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최민 헌터가 곧바로 방공호를 펼쳐 헌터들을 감싸자 주변이 순식간에 적막해졌고, 긴장감에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다.

    “해제하겠습니다.”

    최민 헌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웅.

    우릴 감싼 불꽃이 새하얀 연기를 남기며 사라졌다. 난 주위를 둘러보며 게이트의 종류부터 파악했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만 봤을 때 원주 C급 게이트 하나, 춘천 D급 하나, 그리고…….

    “…어?”

    도로 위 한가운데 똑같이 생긴 게이트 두 개가 나란히 떨어져 있었다. 태극 문양이 박힌 나무 게이트, 난 이 게이트를 알고 있다.

    “신지의 헌터, 이건……!”

    내 옆으로 다가온 최민 헌터도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유는 당연했다.

    그것은 남원 S급 게이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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