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재앙 ‘지옥도’가 창조되었습니다.]
상태창이 나타났다. 아마 각성자들이라면 누구든 나와 같은 문장을 보고 있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은 확신으로 변했고, 터질 것처럼 뛰던 심장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에에에엥.
게이트 생성 센서가 반응해 사이렌이 골목이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경고음에 사람들이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신아초등학교로 대피해 주세요! 대피하신 후 배리어 겔을 작동시키셔야 합니다!”
“뭐야, 무슨 일인데……!”
“게이트 경보입니다! 지금 당장 신아초등학교, 신아초등학교로 대피해 주세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력 : 수긍]
사이렌보다 더 크게 소리치자 근처 빌라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혼비백산 뛰쳐나와 초등학교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곳엔 게이트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주로 번화가 위주로 게이트를 생성해 왔으니 주거 지역으로 밀집된 우리 동네는 녀석의 공격 범위에서 살짝 벗어났겠지.
―우웅, 우웅.
업무용 핸드폰이 진동했다. 헌터넷 안에 비상 상황 대처 매뉴얼과 게이트 신고 버튼이 활성화되어 있을 것이다. 수십 번도 더 넘게 봤으니 이제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할 지경이다.
‘역시 예상대로 서울에 게이트가 많이 생성됐군.’
신고된 게이트들의 위치를 확인하니 대부분 서울, 특히 강남이나 광화문처럼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 몰려 있었다. 상급 헌터들이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니 이 지역은 작전만 잘 세우면 쉽게 게이트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외 지역이었다. 게이트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서울과 비교했을 때일 뿐. 생성되는 게이트의 수가 평소보다 많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그 때문에 서울 외 지역에서도 피해가 크게 발생했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대비를 해 놓았지.
―우우웅.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내가 예상한 인물이었고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지의 헌터, 저예요.
“네, 김민숙 헌터. 대전은 좀 어때요?”
―시내 쪽에 게이트가 다섯 개 생성된 것 말고는 따로 파악된 건 없는 것 같네요. 현욱이랑 민호 말 들어보니 포항은 아직 한 개밖에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요.
김민숙 헌터를 비롯해 김희영 헌터, 이상욱 헌터, 지호 언니 등 친분이 있는 A급 헌터들에게 모두 연락해 지방 순찰을 부탁했다.
다들 처음엔 어리둥절해했지만 그럴싸한 핑계와 발언력의 힘을 빌려 그들을 서울 외 지역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중심이 되어 그 지역의 던전을 공략하게 될 것이다. 처음 등장하는 게이트들은 대부분 D급이나 E급 같은 하급 게이트이니 그 지역에 있는 헌터들과 함께 충분히 해결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절 포함한 다른 헌터들이 신지의 헌터에게 해야 할 거예요.
김민숙 헌터에게 감사를 표하자 웃음 띤 목소리와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신지의 헌터의 부탁이 없었으면 아마 그대로 방치됐을 테니까요.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게 된 거예요?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하하하.”
―신지의 헌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걸 물어볼 때도 아닌 것 같고.
―쿠구궁.
수화기 너머로 지진이 난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이런, 하나가 열렸나 봐요. 다 해결한 다음에 서울로 복귀할게요.
“몸조심하세요.”
―신지의 헌터도요.
전화는 김민숙 헌터가 다른 헌터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말로 끝났다. 나는 핸드폰을 인벤토리 안에 넣은 후 팔찌 위로 손을 올려 녹두부터 소환했다.
―키이잉.
녹두는 내 옆으로 착지하자마자 고개를 들어 지옥도를 바라보았다. 연두색 눈동자에 경계심을 넘은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녀석의 등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걸었다.
“녹두야, 지금 당장 강남 쪽으로 가자.”
‘알겠어. 얼른 타!’
자세를 낮춘 녹두의 등에 올라타자마자 녀석이 높이 뛰어올랐다.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달려가자 바람 소리가 고막을 마구 때렸다.
광화문엔 협회 건물이 있다. 훈련 중인 헌터들과 대피 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있어서 생성된 게이트 수에 비해 피해 규모는 작았다.
‘문제는 강남이야.’
소환된 게이트의 수는 광화문과 비슷했지만, 이곳엔 헌터나 던전과 관련된 시설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건물에 배리어 겔이 설치되어 있어도 소환된 몬스터들을 해치울 수 있는 인력은 0에 수렴한다고 봐야 한다.
―쿠구구궁.
본격적인 게이트 소환이 시작되었다. 커다란 우박이 떨어지듯 지옥도에서 게이트가 쏟아졌고, 동시에 헌터넷의 알림도 더욱 맹렬하게 울렸다.
“으아악!”
―쾅, 쾅.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파열음이 들렸다. 고개를 내리니 역삼역 2번 출구 앞에서 역무원과 거대한 맨홀 뚜껑이 대치 중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역 안으로 대피하는 동안 시간을 벌려고 하는 건지 빗자루를 휘두르며 몬스터를 막고 있었다.
“녹두야!”
―콰과광!
내 의도를 알아챈 녹두가 입을 쩍 벌려 맨홀 뚜껑 몬스터를 향해 빛줄기를 쏟아냈다. 그것은 녹두의 공격을 맞자마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바로 앞에 있던 역무원은 잠깐 몸을 움츠리다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모았다.
“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해요.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대피했잖아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비각성자 ‘정윤희’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뿌듯함]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눈물이 고였다. 이내 그는 옷 소매로 눈을 벅벅 닦더니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쿵!
그때 또다시 게이트에서 맨홀이 굴러 나왔고, 나는 그것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역무원을 향해 말했다.
“일단 역삼역에 있는 모든 출구들 배리어 겔 작동시켜주세요. 이 몬스터들은 전부 D급이라 역 안에만 있으면 안전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헌터 님!”
그는 역사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배리어 겔이 흘러내렸다.
―탕!!
나를 향해 빠르게 굴러오는 맨홀 뚜껑을 산산조각 낸 후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타닥.
‘게이트랑 헌터들 위치부터 확인해야 해.’
헌터넷에 들어가 게이트 신고 버튼을 누르자 지도 위에 게이트와 헌터들의 위치가 네모와 동그라미 아이콘으로 나타났다.
게이트는 역삼역에서 강남역으로 가는 구간에 3개, 강남역 앞 2개, 석촌호수 근처에 1개. 그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헌터들이 10명 남짓이다.
‘아직 게이트 수준이 D급이니까 C급 이상 헌터 두 명만 모이면 바로 들여보내도 되겠어.’
―끼익.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을 끝냈을 때쯤, 오토바이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 헬멧을 벗은 남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신지의 헌터 맞죠?”
“아, 네. 안녕하세요.”
“황지원입니다. B급 치유 겸 보조계 헌터예요!”
B급인데다 치유와 보조계 헌터라니, 가장 필요한 인력이 와주었다. 반가운 마음에 황지원 헌터와 짧게 악수를 나눈 후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다른 헌터들은 아직 오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녹두만 밖에 두고 게이트 두 개 정도는 미리 처리해 놓을까.’
나는 자아를 고쳐 쥔 후 황지원 헌터를 바라보았다.
“다른 헌터들이 올 때까지 잠깐 대기해 주세요. 지금 소환된 게이트들은 대부분 D급 이하일 거라서 금방 해결하고 나올게요.”
“알겠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전할게요.”
“녹두야, 너도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혹시라도 다른 게이트에서 몬스터 유출되면 바로 제거해 주고.”
‘알겠어!’
녹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높이 날아올랐고 주변 게이트들을 한눈에 담았다. 믿음직스러운 녀석의 행동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쉴 새 없이 울리는 게이트 경보를 뒤로 한 채 바로 앞에 있던 던전으로 발을 들였다.
* * *
―찰방.
던전 바닥은 아스팔트 길이었고 그 위로 물이 자작하게 깔려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게이트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맨홀 뚜껑 몬스터를 보니 이곳이 5년 전에 소멸한 동작구 D급 던전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일반 몬스터는 맨홀 뚜껑과 폭발하는 소화전 둘 뿐. 보스 몬스터는 침수된 차 한 대였지.’
―철컥.
DG 허브에서 봤던 내용을 떠올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고 자아의 입구를 바닥에 딱 붙였다.
―쿠구구궁.
방아쇠를 길게 당기자 새하얀 음파가 물을 타고 바닥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러자 바닥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맨홀 뚜껑들이 튀어 올랐고 내게 반격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산산조각 났다.
이걸로 맨홀 몬스터들은 전부 정리됐을 것이다. 젖은 무릎을 손으로 대충 털며 손가락에 끼워진 길을 비추는 자를 확인했다. 하급 던전답게 정면을 가리키고 있었고 난 공중으로 뛰어올라 빠르게 달렸다.
―촤아악.
“읏.”
밑에서 갑자기 물이 솟구쳐 올랐다. 굳이 밑을 보지 않아도 ‘폭발하는 소화전’의 공격이란 걸 예상할 수 있었다.
―탕, 탕, 탕.
물기둥이 올라온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 탄환이 정확히 소화전을 맞혔다. 붉은색 철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지만, 쉴드로 가볍게 튕겨내며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곳까지 쉴 새 없이 달렸다.
소화전을 세 개쯤 더 부쉈을 때 게이트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해.’
―콰그작!
자아를 작살총으로 바꿔 게이트 바로 앞을 향해 발사했다. 작살이 바닥에 단단히 박힌 것을 확인한 후 방아쇠를 다시 당겼고, 내 몸은 빠른 속도로 게이트와 거리를 좁혔다.
―탁.
게이트를 손대자마자 바닥에서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올라왔다. 여기저기로 물을 뿜어대며 위협적으로 이 공간을 헤집어 놓았지만.
―콰그작.
탄환 한 발로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10분 걸렸군.’
체감상 5분도 안 됐지만 던전 밖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다 보니 핸드폰 시계는 훨씬 더 늦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정말로 금방 나오셨네요!”
“헉, 진짜 신지의 헌터다……!”
“다행이네. 한시름 놨어.”
게이트를 열자 황지원 헌터 외에도 여러 헌터들이 도착해 있었다. 간단하게 눈인사만 주고받은 후 게이트 밖으로 발을 들였다.
―파사삭.
두 발이 게이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오자마자, 게이트는 물이 되어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리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지옥도를 닫기 위한 첫 단추를 낀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헌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강남 쪽 게이트 공략은 제가 맡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제 지시를 따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