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지옥도(地獄道)>
‘덥네…….’
훈련을 마치고 본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뜨거워진 낮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는 날씨가 될 것 같았다.
―철컹, 철컹.
“설치 끝난 거죠?”
“네. 작동하시려면 리모콘 버튼을…….”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에 있던 작은 카페 건물에도 배리어 겔을 설치 중인 모양이었다. 설치 기사가 건물주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배리어 작동 방법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미래 씨와 아자디바르 남매가 만든 배리어 겔은 제휴를 맺은 모든 기업의 공장이란 공장은 죄다 돌려 공급량을 대폭 늘렸다.
뉴스에선 매출이 몇조 원에 달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이 수익마저도 세 사람이 물량을 늘려 가격을 떨어트리라고 지시한 결과였다. 평소대로 공급했으면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갔겠지.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이 얄팍한 물욕을 이겨낸 것이다.
“신지의 헌터, 이쪽입니다.”
“아, 네.”
집으로 데려다줄 리무진에서 기사님이 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리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부드럽게 큰길 쪽으로 빠졌다.
―우웅, 우웅.
한참 달릴 때쯤 핸드폰이 울렸다. 인벤토리에서 개인용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후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아빠.”
―통화 괜찮니?
“괜찮아. 잘 지내고 있지?”
―그럼. 조금 답답하긴 한데 그럴 때마다 마당 올라와서 산책하고 있어.
“다행이네.”
엄마와 아빠의 거처를 세빈이네 집의 벙커로 바꾼 지도 거의 일주일이 되어갔다. 주변 이웃들에겐 장기 여행을 간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흘렸고 다니던 직장은 전부 관두게 했다.
내 제안을 처음 들은 두 분은 당연하게도 날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급 각성자들의 가족들이 납치당하고 있다는 어쭙잖은 핑계를 대며 겨우 설득했다.
―아직 범인은 안 잡힌 거지?
“응. 최대한 단서를 모으는 중이라고는 했어.”
―무서워라. 빨리 잡혔으면 좋겠네.
아빠는 있지도 않은 범인을 걱정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엄마는?”
―아직 자고 있어. 바꿔줘?
“아니야. 나중에 다시 걸지 뭐.”
그 이후론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았다. 전날에 먹은 점심, 파견 중에 있었던 일, 그리고 던전이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까지 흘리며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마치 종말이라곤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또 연락할게.”
―그래. 몸조심하고!
“응. 아빠도.”
짧은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지옥도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보니 평화로운 일상을 조금도 즐길 수 없었다. 오히려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불안해하지 말자. 필요한 준비는 다 끝냈잖아.’
배리어 겔, 노블레스 길드의 던전 보고서, 그리고 DG 허브까지 전부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었다. 던전들의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은 모두에게 열렸고 협회, 길드, 혹은 개인이 구매하며 공략법을 익혔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에서도 모든 자료를 구매해 C급 이상의 헌터부터는 무료로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나도 며칠간 밤을 새워가며 국내에 있는 모든 던전들의 공략법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물론 반복된 회귀 덕에 한 번도 공략해본 적 없는 던전은 없었지만, 대부분 기억이 희미해져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조율자의 말대로라면 아직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아. 일단 국내에 있는 지옥도를 해결하고 나서 레일리에게 연락해서 유럽 쪽도…….’
아침부터 훈련을 많이 해서 그런지 온몸이 나른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서서히 먼지처럼 사라지더니 내 의식도 잠에 빠져들어 갔다.
―콰아아앙!!
“헉……!”
갑자기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의 위아래가 바뀐 채였고, 거대한 게이트가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쿵!
“윽!”
―빠아아앙.
몸이 바닥에 처박힘과 동시에 경적이 길게 울려 퍼졌다. 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천장 위로 엎어졌다. 온몸이 징징 울리는 것을 겨우 이겨내며 기사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 괜찮으세…….”
문장을 끝까지 끝낼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전봇대에 몸이 뚫려 생명을 다한 채였다.
―콰앙!!
자아로 차 문을 부수고 기어 나오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다들 이쪽으로 대피해 주세요!”
“빨리 배리어 가동시켜!”
“으아악!”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피인지 기름인지 모를 액체가 아스팔트를 따라 흘러가고 있었고, 어디서 폭발이 일었는지 희미한 연기 냄새도 바람에 실려 왔다.
지옥도. 그것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사람들의 눈앞에 덜컥 나타나 버렸다.
‘원래…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났었나?’
―쿵!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하늘에 나타난 커다란 균열은 게이트를 뱉어내기 시작했고, 게이트는 차례차례 열려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나는 우선 공중으로 날아올라 자아를 입가로 가져왔다.
“지금 바로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건물 관리자들은 배리어 겔을 작동해 주시고, 배리어 겔이 설치되지 않은 건물의 경우 다른 건물 또는 지하철역으로 이동 부탁드립니다!”
온 힘을 다해 소리치자 도로와 인도에 있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요 며칠간 대피 관련 공익 광고를 꽤 자주 내보냈던 것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으아아악!!”
“도와주세요!”
그때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외침이 들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해운대 C급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회칼 하나가 사람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쾅!
그것이 사람들의 숨통을 끊기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 한 발에 회칼은 산산조각 났고 사람들 위로 실드를 뽑아내 잔해들로부터 보호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네, 네……!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헌터 협회 본부 건물로 대피해 주세요. 저 건물입니다.”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을 일으켜 협회 건물 쪽으로 보낸 후 곧바로 업무용 핸드폰을 꺼냈다. 헌터넷에 ‘비상 대책 매뉴얼’이라는 아이콘이 깜박거렸고, 화면 밑에는 실시간으로 어디에 게이트가 떨어졌는지 나타나고 있었다.
게이트 신고 버튼을 누르고 빠르게 이곳에 떨어진 게이트의 수를 입력해 전송했다. 곧 주위에 있는 헌터들이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전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은 파견팀이 만들어질 때까지 이곳에서 시민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쾅, 쾅, 쾅.
다행히 지금 떨어진 게이트들은 D급에서 C급 정도로, 혼자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녀석들이다. 방아쇠를 길게 당겨 음파로 한 번에 정리한 후 길에 있던 사람들을 근처 건물 안으로 들여보냈다.
사람들이 얼추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배리어 겔의 작동이 시작됐다. 경화까지는 길어야 10분, 그 안에 몬스터가 습격할 확률도 그렇게 높지 않아 보였다.
―퍼버벙!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정신없이 해치웠다. 음파로 움직임을 마비시킨 후 탄환으로 제거하고, 건물을 향해 돌진하는 녀석에게 작살총을 날려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하아, 하아, 하…….”
뭔가 이상했다. 분명 지옥도가 열린 지 적어도 30분 정도는 지난 것 같은데 나를 제외한 그 어떤 헌터도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헌터넷을 통해 게이트 소환 신고도 했고, 이곳에 소환된 게이트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도 모든 헌터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사람도 오지 않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왜애~ 지의 네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까 이상해애?”
“헉……!”
―탕!!
창조자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녀석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허공에서 목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지의 너는 회귀자니까 모든 걸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했지이? 아~ 오만해라, 오만해애~”
“다른 헌터들은 어디 있지? 무슨 짓을 한 거야!”
“다른 헌터드을?”
―쿵!
나를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끊기자마자 뒤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거 말하는 거야?”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정하게 뛰던 심장 박동은 어느새 가슴 밖으로 터져나갈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선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지만 고개가 돌아가는 걸 멈출 순 없었다.
결국 내 시선은 완전히 ‘그것’을 향했다.
“아아아아악!!”
사람처럼 보이는 형체들이 한데 엉겨 붙어 문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볼 수 없었다. 누가 내 목과 내장을 움켜쥔 것처럼 숨이 막히고 속이 울렁거렸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쯤.
“신지의 헌터!”
“헉……!”
눈이 한 번 더 떠졌다.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자 방금 전까지 목숨을 잃었던 기사님이 너무나 멀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 집 앞 골목이었다.
“괜찮으세요……?”
“네? 아, 네…….”
‘꿈이었구나.’
걱정하는 기사님을 향해 애써 웃어 보인 후 차에서 내려 집으로 도망치듯 뛰어 올라갔다. 도어 록을 푼 후 현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쿵.
현관문을 닫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후우…….”
나도 모르는 새에 정신적으로 많이 몰린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김강희의 행동과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허점이 있을까 봐 매일 두렵고 불안했다.
―키이이잉.
그때 갑자기 팔찌가 반응하더니 녹두가 튀어나왔다. 녀석이 있기에 비좁은 현관이었지만, 억지로 몸을 구겨 나와 한 공간에 있으려 하며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댔다.
“…고마워.”
녹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때로는 이런 침묵이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다 컸네.’
녹두의 목을 끌어안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 자신에게 괜찮다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면서 말이다.
* * *
이상하게도 눈이 번쩍 떠졌다. 어제 꿨던 악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도 이 불쾌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해질 뿐이었다.
―바스락.
머리를 채 말리기도 전에 아이테르의 로브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후라 골목은 적막했고 이따금 다른 집에서 켜놓은 TV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분명 뭔가 일어날 거야.’
같은 시간을 100번이나 살아왔다. 이 불쾌함은 기분이 변덕을 부린 것이 아닌, 그동안 축적된 내 경험이 내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다.
―치지지지직.
불길한 예감은 커다란 노이즈가 되어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세상의 균형이 깨집니다.]
[창조의 기운이 드리웁니다.]
[창조의 기운이 세상에 개입합니다.]
―우드드득.
관절을 비트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하늘이 반으로 갈라지며 새카맣고 거대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앙 ‘지옥도’가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집어삼킬 재앙이 고개를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