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무아의 부작용이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세빈이 말마따나 이 애는 내가 죽는 걸 눈앞에서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애가 아니니까.
[발언 결과 : 깨달음]
“만약 그렇다면 내가 이 장면을 본 건 이미 세상에서 존재가 지워진 이후겠네?”
“그렇게 되겠지. 세빈이 네가 어떤 이유로 무아를 그렇게나 오래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 가정이 제일 유력해.”
대화의 논점은 ‘세빈이가 무아를 쓰게 된 이유’로 옮겨왔다. 몬스터의 공격 때문에 무아를 썼다면 안전한 장소로 이동한 다음 무아를 해제했을 것이다. 만약 무아를 사용한 시점이 움직이지 못할 만큼 큰 부상을 입은 이후라면, 몬스터들은 다른 희생자를 찾기 위해 이미 세빈이에게서 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알면서도 무아를 해제할 수 없었던 이유, 그 이유를 찾아야…….
“…회장님?”
“어?”
그때 세빈이가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이번에 내 존재가 사라질 뻔했던 것도 회장님 때문이었잖아.”
“그럼 그전에도 김강희가 널 제거하려고 그런 건가?!”
“아무래도 그랬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일리 있는 가정이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입장에서 세빈이 같은 최상급 헌터의 존재는 상당히 거슬렸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조슈아도 지옥도 등장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어.’
‘최상급 헌터를 미리 제거한다’는 가정대로라면 이 부분도 설명된다. 창조자 녀석이 자신의 사도로 S급들만 접촉한 것도 지옥도를 해결할 만큼 강한 헌터들을 사전에 없애 버리려는 작전일 것이다.
“똑같은 수법으로 네가 두 번 당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
“걱정하지 마. 지금은 회장님이 배신자라는 것도 알고 있잖아.”
“혹시라도 널 회유할까 봐 그래.”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김강희는 교묘하게 사람의 심리를 파고드는 데 능한 인간이다. 물리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면 회유를 하든 속임수를 쓰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전부 쓰겠지.
“지의야.”
세빈이가 내 팔을 가볍게 잡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아까와 다르게 눈이 반짝이고 있어서 두려운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너그러운 편이 아니야.”
“…그래?”
“응. 그러니까 회장님이 내게 어떤 제안을 하더라도 넘어가지 않을 거야.”
세빈이가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지의, 네가 말했잖아. 절대로 네게서 등 돌리지 말라고.”
“…….”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거야. 그러니까 안심해.”
팔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번에야말로 이 긴 전투의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세빈아. 그리고 부탁이 있어.”
“들어줄게. 뭔데?”
“…너희 집에 있는 벙커 좀 쓸 수 있을까?”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큰 당황]
‘역시 이번에도 있었군.’
당황하는 기색을 숨길 정신도 없나 보다. 세빈이는 입술만 달싹이며 말을 고르다 곧 힘겹게 대답을 토해냈다.
“이, 이전 생의 나도 그걸 만들었었나 보네……?”
“응. 독립했을 때부터 조금씩 만들어 놨다고 하더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착잡]
나한테 벙커 하나 들켰다고 착잡해하는 것을 보니 처음 만든 의도가 98번째의 세빈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나 보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와 함께 들어가기 위한 그런 용도였겠지…….’
세빈이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괜히 목덜미를 매만졌다.
“으, 응. 쓸 수 있어. 식량이랑 물 정화 시스템도 갖춰놔서 1년은 너끈히 버틸 거야. 그런데 거긴 왜?”
“지옥도가 열리면 우리 부모님 좀 부탁해도 될까?”
뜻밖의 부탁이었는지 세빈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하지. 지금 당장 모셔와도 돼.”
“…고마워.”
염치없는 부탁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는데, 세빈이는 너무나 흔쾌히 수락했다.
그 부탁은 두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혹시 모를 위험 요소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협회에서 구해준 집이니 김강희가 부모님의 집 주소를 아는 건 시간문제다. 만약 두 사람을 이용해 나를 협박한다면 지옥도를 수습하기도 전에 다시 회귀해야 할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 부모님에게 엄청난 애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빠에게 맞은 뺨은 아직도 얼얼했고 지유의 죽음 이후 엄마와도 데면데면한 사이가 됐으니 말이다.
‘가족을 잃는 경험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알았어. 내가 또 도울 일이 있을까?”
“충분해. 지옥도에서 다치지 마. 이게 내 마지막 부탁이야.”
“응. 명심할게.”
세빈이는 날 보며 싱긋 웃었다.
‘지키고 싶은 게 많아져서 큰일이네.’
나를 믿는 동료들, 그 동료들을 둘러싼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이 죽이려는 나까지.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도 세빈이를 향해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텁.
커다란 손이 내 악수에 응했고 세빈이는 낮은 음성으로 웃었다. 지옥도를 전부 해결하고 난 후에도 이 평화로운 순간이 계속되길 바랄 뿐이었다.
* * *
―달그락.
강희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건물이 만들어 내는 야경이 호수에 비쳐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풍경을 볼 수 있도록 창가에 만든 작은 티 테이블은 강희가 그의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
반면 그의 맞은편에 앉은 도윤은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한 채 열심히 강희의 말을 곱씹을 뿐이었다. 강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혼란스러워하는 도윤을 향해 말문을 텄다.
“차도윤 헌터, 혹시 이해하지 못했나?”
“아, 아닙, 아닙니다… 이해는 했습니다.”
도윤이 고개를 홱 들고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두 달 후에 세상이 망한다는 말씀이신 거죠…?”
“맞네. 그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회장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이고요.”
“후후후.”
강희가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나를 믿나?”
“…믿습니다.”
“그럼 다행이네. 요즘 차도윤 헌터가 나를 많이 신뢰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일세.”
“그렇지 않습니다……!”
도윤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급하게 대답했다. 그의 팔이 테이블에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놀란 도윤이 몸을 화들짝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저 세상이 망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계산하고 있군.’
강희는 도윤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세빈을 제거하는 데 실패한 후, 저를 제외한 S급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각자의 길을 걷던 자들이 지의를 중심으로 도는 위성처럼 변했고, 죽을 때까지 제게 충성할 줄 알았던 도윤도 그 궤도에 오르려 했다.
‘그렇게 둘 순 없지.’
강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아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나를 믿는다고 하니 한 가지 더 알려 주겠네.”
“…….”
“사실 세상을 망하게 하는 건 나일세.”
도윤의 눈이 커졌다. 강희가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크게 당황하자 강희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몇 번 두드렸다.
“내가 학살자로 보이겠지. 하지만 내겐 꼭 완수해야 하는 사명이 있어서 그럴세.”
“사명이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밑 작업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
극도의 긴장에 도윤이 어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곧 정신을 꽉 붙잡곤 입을 열었다.
“…그걸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말하지 않았나? 자네를 믿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강희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강희의 다정한 푸른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강희가 자신을 처음 만나러 왔을 때와 겹쳐 보여 도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자네에게 제안을 하고 싶네.”
그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자네가 살리고 싶은 사람 딱 세 명, 그 사람들만큼은 내가 확실하게 보호해 주겠네.”
“…네?”
강희는 손을 다시 거두고 팔짱을 꼈다.
“내겐 일종의 방주가 있네. 나, 자네, 그리고 자네가 고른 세 명 정도는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지.”
“회, 회장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자네를 그만큼 신뢰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일세.”
강희의 손이 도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평소의 그였으면 강희의 신뢰를 받고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을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망하게 할 사람과 한배를 탈 수 없었다.
“차도윤 헌터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하러 오는 사람은 김강희 회장이 아니고, 그쪽 옆의 동료라는 걸요.”
지의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저, 회장…….”
“도윤 군.”
“헉…!”
하지만 그의 결심은 '도윤 군'이라는 단 세 글자로 와르르 무너졌다. 자신을 보는 강희의 눈엔 다정함과 안쓰러움이 서려 있었고, 목소리는 자신의 이름을 처음 불렀던 그때와 똑같았다.
강희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도윤을 집이라는 지옥 속에서 꺼내준 은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듯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아, 아닙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난 자네를 믿고 있어.”
도윤이 고개를 끄덕인 후 도망치듯 현관으로 향했다.
―쿵.
문이 닫히자 강희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그늘이 졌다.
―파지직.
그가 팔로 허공을 가르자 새카만 균열이 생겼고 아무렇지 않게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는 검은 공간으로 강희는 익숙하다는 듯 들어갔다.
“우와~ 이간질 잘하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먹색의 문 앞에 있는 창조자와 마주쳤다. 강희는 팔짱을 낀 채로 문 앞에 서서 그것을 천천히 살폈다.
“역시 엉망진창이야아. 그치?”
“그럴 수밖에 없지. 이 지옥도의 핵심 재료인 네 녀석의 파편이 전부 파괴됐으니, 원.”
강희가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빠른 표정 변화에 오히려 창조자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뭐, 상관없어. 오히려 극적인 상황이 많이 만들어지겠네.”
강희는 한 손으로 턱을 쓸며 창조자를 바라보았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는 영감이 떠오른 예술가의 눈동자를 닮아 있었다.
“그 이야기를 엮어서 새로운 천지창조 신화로 쓸 수 있겠어, 안 그래?”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다니까아.”
창조자가 히죽 웃었다. 가로로 쭉 찢어진 입이 관자놀이에 닿을 정도로 길어지더니 곧 강희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그럼 끝까지 잘해 보자. 내 후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