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넓은 마당을 지나 세빈이의 집 대문 앞에 서자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진짜로 말할 생각이야?’
‘응. 그걸 알려주지 않으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거야.’
‘그래도 98번째 회귀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니야. 말해줘야 해.’
걱정스러워하는 자아에게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세빈이가 몬스터가 됐을 때 가졌던 학살자의 업. 그 업을 본 이상 세빈이도 과거의 자신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빈이는 내가 죽는 장면을 전부 다 봤으니 구원자의 죽음을 목격한 자의 인과율도 100%에 가깝겠지.
98번째의 회귀에서 세빈이가 모두를 죽여버린 건 그 인과율의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세빈이의 불안의 원인인 내 죽음을 그 애에게 전부 알려주지 않으면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
―끼익.
“아.”
“초인종 안 누를 거야?”
그때 세빈이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고, 맨투맨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라 딱 자기 나이처럼 보였다.
“춥겠다. 얼른 들어와.”
“응.”
세빈이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전과 다르게 조금 따뜻해 보이는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차도윤 헌터랑 왔을 땐 늦은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훨씬 더 삭막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커다란 식물이 몇 개 있어서 그런지 사람 사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요 며칠간 집에 좀 오래 있었거든. 수리할 곳도 있었고.”
“훨씬 낫네. 이제 좀 사람 사는 집 같다.”
“전에는 안 그랬어?”
“약간? 뭐 하나 튀어나올 것 같은 집이긴 했지.”
“아하하.”
세빈이는 부정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한 후 거실 맞은편의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뭐 마실래? 커피도 있고, 차랑 주스도 있어.”
“아무거나 줘.”
“알겠어.”
나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쿠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젯밤 늦게 연락한 터라 준비할 시간도 별로 없었을 것 같은데, 세빈이는 손님 맞을 준비를 완벽하게 해놓은 상태였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네.’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저 쿠키의 달콤함으로도 중화되지 않을 만큼 끔찍할 거란 걸 알아서 마음 한구석이 영 좋지 않았다.
―달그락.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컵이 내 앞에 놓였다. 컵 안에는 노란색 꽃이 둥둥 떠 있었고, 향긋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국화차야. 쿠키도 마음껏 먹어.”
“아, 고마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해 준다고 했지?”
“응.”
세빈이는 내가 찾아온 이유가 앞으로의 작전을 논의하기 위함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걸 보여주는 듯했다.
‘말해야 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세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아직도 내가 죽는 꿈을 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당황]
세빈이의 눈이 잠깐 커지더니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응.”
“얼마나 자주?”
“일주일에 네 번 정도. 심할 땐 하루에 두 번씩 꿀 때도 있었어.”
거의 하루건너 하루 꾸는 꼴이다. 나였어도 저렇게 자주 꾸면 신경이 예민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왜?”
“내 죽음들 중에… 혹시 네 검에 찔려서 죽은 것도 본 적 있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강한 충격]
“어, 어?”
“괜찮아. 네 탓하려는 거 아니야.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려고.”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얘진 세빈이를 겨우 달랬지만 세빈이는 손까지 떨어가며 크게 동요했다.
‘뭐, 이 반응을 보니까 98번째 회귀 때 죽은 것까지 본 것 같네.’
세빈이는 입술을 잘근 씹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네가 죽인 게 아니야. 네 검을 뺏어서 내가 직접 찌른 거니까.”
“지의 네가……? 왜?”
“…지옥도의 최종 소멸 조건이 회귀자의 죽음이었거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세빈이는 날 빤히 바라보며 내 말의 의미를 곱씹는 듯했다.
[발언 결과 : 절망]
그리고 그 말의 뜻을 이해했을 땐 이미 세빈이의 그림자가 집 전체에 있는 모든 그림자들을 흡수한 후였다. 다시 시선을 세빈이 쪽으로 옮기자 빛이 깃들 틈이 없는 새카만 눈동자가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죽어야 한다고?”
“…응.”
“왜?”
“그건 잘 모르겠어.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인 것 같아.”
―탁.
세빈이가 테이블 위에 컵을 올려놓은 후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늘진 얼굴이 나와 가까워지자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공포인가…….’
저도 모르게 스킬을 시전한 건지 세빈이를 바라보는 내 몸이 누군가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저려 왔다.
“네가 죽도록 만들어진 세상은 지킬 필요가 없는데.”
“…….”
세빈이의 그 목소리가 98번째의 회귀에서 동료들을 학살하는 세빈이의 목소리와 겹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세빈이가 그렇게 변할 거라는 걸 나에게 확인시켜 주듯이.
“과, 거엔 그랬, 다는 거지… 지금은 다를, 윽, 수도 있어.”
“아…….”
세빈이의 정신계 스킬인 ‘공포’ 때문에 문장을 힘겹게 완성하자 그제야 세빈이가 스킬을 썼다는 걸 인지한 건지 화들짝 놀라며 다시 몸을 뒤로 젖혔다. 세빈이는 양손으로 제 얼굴 가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갑자기 긴장이 풀려 몸이 욱신거렸다. 난 국화차로 목을 축이며 잠시 숨을 돌렸다.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응?”
그때 세빈이가 중얼거렸다.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니 공허한 눈을 하고 있는 세빈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세빈이의 말을 더 잘 들으려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래서 내가 모두를 죽인 거구나.”
“알고 있었어?”
“학살자의 업 때문에 어렴풋이 짐작은 했는데. 아, 그래서…….”
세빈이는 깨달았다는 듯 말을 뚝 끊고는 갑자기 낮게 웃었다.
―사락.
손을 내리자 씁쓸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98번째의 나라는 녀석한테 그 업에 대해 물어보니까 나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하더라.”
“…….”
“그땐 무슨 소린가 했는데, 맞는 말이었네.”
세빈이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만약 네가 죽어야 지옥도가 사라지고, 그래서 모두가 널 노린다면.”
“세빈아.”
“나도 그 녀석과 같은 길을 밟았을 거야.”
―쿵, 쿵.
침착해야 한다. 그저 가정일 뿐 세빈이는 아직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지의 넌 방법을 찾을 거지, 응?”
“…어?”
세빈이가 갑자기 눈을 접고 사르르 웃더니 내 손 등 위로 제 손을 덮었다. 겹쳐진 손과 세빈이를 번갈아 보다 곧 깨달았다.
‘세빈이도 성장한 거야.’
인과율 때문에 세빈이의 정신이 많이 몰린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끔찍한 상황에 이리저리 휘둘릴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지난 시간선의 세빈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경험했고, 더욱 단단해졌다.
―탁.
나는 잡히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세빈이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하지. 이번엔 나도 살아남을 거야.”
“…그럼 됐어. 그것만 약속해 주면 돼.”
세빈이가 손에 힘을 줘 내 손을 꽉 잡았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살아남기만 해줘.”
“…어, 그래.”
‘그래도 아직 불안한가 보네.’
왠지 모르게 오싹한 말을 덧붙였지만 일단 지금은 넘겨도 되겠지.
나는 손을 다시 거두고 세빈이에게 물어보려 했던 걸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혹시 꿈속에서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얘기해줄 수 있어?”
“아, 그거라면…….”
세빈이가 허공으로 손을 뻗어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툭.
손바닥만 한 수첩이었다. 고개를 들자 세빈이는 말없이 그것을 건넸다. 아무 생각 없이 첫 장을 넘기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전부 적어놨어.”
수첩엔 내가 누구에게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전부 적혀 있었다. 꿈을 꿀 때마다 적은 건지 펜의 색이 제각각이었다.
[죽지마죽지마죽지마죽지마죽지마죽지마]
수첩의 구석엔 세빈이의 평소 글씨와 달리 엉망진창으로 휘갈겨 쓴 문장이 있었다. 절박함까지 느껴져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꿈을 꾸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후부터 적기 시작했어. 혹시라도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막아야 하니까.”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꿈의 내용은 더욱 자세해졌고 세빈이의 사족도 덧붙여져 있었다.
[감천 B급 던전, 최민, 추락사, 그런데 왜 둘이?]
최민 헌터가 기억하고 있는 내 죽음들 중 하나인 감천 던전도 세빈이의 수첩에 적혀 있었다. 그렇다는 건 세빈이도 우리 둘을 따라 감천 던전에 들어왔다는 건데…….
‘몰래 들어온 건가? 왜 내 기억에 없지?’
나는 다음 장으로 넘기려다 순간 멈칫했다. 그 메모 옆에 그려진 별 표 두 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 별 표는 뭐야?”
“조금 이상한 죽음들.”
세빈이는 다른 기록들 몇 개를 손으로 짚으며 하나씩 이야기했다.
“내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는데도 그냥 지켜보기만 한 죽음들이 몇 개 있어.”
“예를 들면?”
“이런 거.”
세빈이의 손가락이 그 밑에 있던 메모를 향했다.
[장소 추정 불가, 게이트로 둘러싸임, 몬스터 습격, 가까이서 지켜봄]
[광화문, 게이트로 둘러싸임, 건물 잔해에 깔림, 가까이서 지켜봄]
게이트로 둘러싸였다는 표현을 보니 아무래도 지옥도가 열린 이후인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세빈이를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가까이 있었다면 내가 분명 너를 보호했을 거야.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그림자는 쓸 수 있었겠지.”
“그런데 지켜보기만 한 게 이상하다는 거지?”
“응.”
지옥도가 열린 후 세빈이의 행적이 묘연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자아도 세빈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몇 번 있었지.
‘설마…….’
여기저기 흩어졌던 퍼즐 조각이 하나로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무아의 부작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