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내 말에 조율자는 아무런 반박도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인간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막상 인간에게 설교를 듣고 부탁하려니 속이 꼬일 대로 꼬였을 것이다.
‘조금 통쾌한데?’
100번의 인생을 겪으면서 조율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접촉할 기회조차 몇 번 없었으니 그를 막연히 전지전능한 신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막상 열어보면 빈 수레나 다름없는 껍데기 신일 뿐이면서.
“창조자의 속셈, 세상이 망하는 이유, 그리고 그걸 막을 방법까지 전부 다 알고 있어.”
“……”
“네가 원한다면 알려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일단 들어보죠.”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다. 그렇게 합리성을 운운했으면서 나한테 고분고분하게 나오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에 대한 노여움은 잠시 접고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네가 수집한 정보를 전부 공유할 것. 창조자의 현재 상태나 그가 모으고 있는 던전까지 포함해서 전부. 아, 그리고 너에 대한 것도.”
“…그것뿐입니까?”
“아니, 제일 중요한 게 남아 있어.”
―탁.
소파에서 일어나 조율자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후 녀석과 눈을 맞췄다. 반질거리는 새하얀 눈에 내가 그대로 반사되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죽이지 말 것.”
“왜 그런 조건을 내세우는 거죠?”
“만에 하나 작전이 실패해서 세상이 망했을 때 네가 나한테 화풀이하는 걸 막으려고.”
“세상이 망하면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나요?”
조율자가 차갑게 말을 뱉자 최민 헌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몸을 움찔 떨었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 그에게 괜찮다는 눈빛을 보낸 후 다시 조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킬 필요는 없지. 하지만 네가 정말로 세상을 유지하고 싶다면 내 말 듣는 게 좋을걸.”
“…….”
“내가 살아 있으면 세상이 망하지 않을 확률이 1%라도 있지만, 내가 죽으면 세상은 100% 망해.”
―툭.
손끝으로 그의 뿔을 건드리자 조율자가 고개를 뒤로 빼며 불쾌한 티를 냈다. 그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 기분은 상쾌해졌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봐. 어떤 확률에 거는 게 좋을지.”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어차피 답은 내게 협조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녀석이 고민하는 건 아마 오만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내 제안을 수락하는 방법일 것이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다.
“알겠습니다. 협조하죠.”
“내가 말한 것 무조건 지켜. 알았어?”
“알겠습니다.”
녀석의 결론은 담백하게 대답하기였나 보다. 내가 먼저 합리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꺼냈으니 괜한 고집을 부리는 건 포기했나 보다. 나는 다시 소파에 앉은 후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간단히 이야기할게. 창조자는 세상에 떠다니는 던전을 모아서 지옥도라고 하는 거대한 게이트를 만들고 있어.”
“지옥도? 그 이름이라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알게 된 배경은 묻지 마. 100% 정확하다는 것만 알면 돼.”
조율자의 질문을 단칼에 끊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그 지옥도라는 건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 대부분 그 지역에 있었거나 현재 존재하는 게이트들을 한데 모아 갑자기 생성시키지.”
“공략을 완료하면 사라지는 겁니까?”
“맞아. 하지만 생성되는 게이트의 수 자체가 많고 공략하는 동안에도 몬스터는 계속해서 쏟아지다 보니 피해 규모는 어마어마해.”
“…마치 경험해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군요.”
조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난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쳐다보았다.
“마음대로 생각해.”
이제 와서 회귀자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지만 먼저 이야기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씩 웃는 걸로 대답을 끝내 버렸다.
“그럼 그걸 막을 방법은 있습니까?”
“그래. 그리고 이미 절반 정도는 사전 작업을 끝낸 상태지.”
“사실입니까?”
“네.”
최민 헌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배리어 겔 보급 작업은 거의 마무리됐고, 던전에 대한 공략법도 곧 배포될 거예요.”
“신지의, 결국 당신이 말하는 방법이라는 건 헌터들에게 던전 공략을 시켜서 게이트를 소멸시키는 겁니까?”
“응. 가장 확실하고 합리적인 방법이잖아?”
―파직.
조율자의 몸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엄청나게 혁신적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나도 그런 게 있을 줄 알았다. 저 끔찍한 지옥도를 겪지 않고 세상을 지킬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바람일 뿐, 사람이 직접 뛰어야 했다. 던전 부산물로 사람들의 생활이 편리해졌음에도 여전히 옷을 개어주는 기계가 발명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게이트는 사람이 없애야 해. 요행 따위 없어.”
“…….”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인 것 같네.”
목을 한 번 가다듬은 후 조율자를 향해 이야기했다.
“너는 왜 세상을 유지하려는 거야?”
단 한 번도 해결된 적 없는 의문이다. 창조자가 끊임없이 세상을 부수려 하는 이유와 김강희가 그와 손을 잡은 이유, 그리고 그들의 반대에 선 조율자가 세상을 지키려는 이유.
조율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나 희생정신이 뛰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목표 의식이 있는 존재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도를 포섭하고 세상에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이유는 없습니다.”
“뭐?”
“유지하려는 이유는 특별히 없다고요.”
‘진짜로 이유가 없는 거였어?’
내 생각대로 대답하자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조율자는 여전히 무감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저는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저는 그저 저의 존재 이유를 다 하려는 것뿐입니다.”
“…최민 헌터를 사도로 삼은 건?”
“흥미로웠으니까요. 그리고 삶에 의지와 희망이 없는 인간은 의문을 가지지도 않으니까 다루기도 쉽고.”
종말을 단 한 번도 막지 못한 녀석다운 대답이긴 했다. 세상의 유지가 자신의 존재 이유인데 게으르고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의문을 가질 가치조차 없었네.’
조율자에 대한 거부감만 더욱 강해졌을 뿐이다.
“그럼 창조자는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태어난 건가? 느낌이 조금 이상한데.”
“원래대로라면 세상의 창조를 돕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노선을 틀었습니다.”
창조자의 변화에 대해선 조율자도 잘 모르는 눈치다. 어쨌든 녀석과 김강희가 세상을 무너트린다는 결론은 바뀌지 않으니 이를 대비하는 계획엔 변함이 없었다.
“창조자의 지금 상태는 어때? 특별한 행동 같은 건 본 적 없어?”
“당신이 말한 대로,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게이트를 모아서 아직 열리지 않은 경계 속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각 지역별로 묶어서 보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지옥도의 패턴대로였다. 아마 한국에 열리는 지옥도는 지금 국내에 존재하는 게이트와 소멸한 게이트를 묶어서 마구잡이로 쏟아내겠지.
“그리고 녀석도 사도를 전부 잃은 모양인데, 그것 때문에 조금 차질이 생긴 것 같더군요.”
“그래? 그건 좀 반가운 소식이네.”
“…그것도 당신 짓입니까?”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의 일부야. 안 했으면 지옥도 때 걷잡을 수 없을걸.”
어깨를 으쓱이며 조율자에게 대답하곤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대충 상황 파악은 끝냈다. 남은 건 방어에 구멍이 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DG 허브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고개를 들어 조율자를 바라보았다.
“내 궁금증은 여기서 끝이야. 이제 슬슬 헤어졌으면 해.”
“…아니, 저는 아직 안 끝났습니다.”
“뭔데? 빨리 말해.”
“당신이야말로 왜 세상을 지키려 하는 거죠?”
내가 했던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는 듯했다. 늘 무감정하던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궁금증이 담겨 있었다. 그 반응이 우스워 한 번 헛웃음을 터트린 후 대답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각성했으니까.”
“…….”
“그뿐이야. 이유는 없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도 녀석이 했던 대답을 그대로 돌려 주었다. 조율자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이 됐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화 끝. 또 할 말이 있다면 내가 부를게.”
“그러세요.”
―사아아.
조율자는 쌀쌀맞은 대답과 함께 공기가 되어 사라졌다. 거실은 적막해졌고 윗집 사람들의 발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이었다.
“최민 헌터.”
“네.”
“사실 조율자한테 한 가지 말 안 한 게 있어요.”
그가 평소보다 눈을 크게 뜨며 내 말에 반응했다. 내가 회귀자인 걸 아는 사람에겐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있다. 난 그의 다정한 눈을 응시한 채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고 차분하게 말을 뱉었다.
“지옥도를 완전히 소멸시키려면 제가 죽어야 해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부정]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부정하고 싶은 거 알아요. 근데 사실이에요.”
눈앞에 발언력 창이 몇 번이나 떴는지 모르겠다. 발언 결과는 전부 ‘부정’, ‘강한 충격’, 그중 몇 번은 ‘공포’였다.
―텁.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얼굴을 감추더니 이내 내 손을 꽉 쥐었다.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손등 위로 훤히 드러난 핏줄이 꿈틀대고 있었다.
“방법은… 없는 겁니까?”
“…그건 지금 생각 중이에요.”
“……”
“그래서 최민 헌터에게 부탁이 있어요.”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훨씬 창백해진 얼굴 때문에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 위로 다시 내 손을 포개며 입을 열었다.
“제가 신호를 주면 저한테 방공호를 씌워 주세요.”
“…센의 파편 때처럼 말입니까?”
“네.”
세빈이 말고는 그 방어막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일단 나를 보호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나와 나를 희생시키려는 세상과의 싸움이다.
최민 헌터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미루다 곧 마음을 먹었는지 입술을 뗐다.
“그럼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어떤 약속이요?”
“함부로 희생하지 않겠다고요.”
그는 힘겹게 이야기했다. 나의 죽음을 이미 보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얼굴은 슬픔과 절망, 그 사이 어드멘가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절대로 희생 안 해요. 이번엔 절대로 안 죽을 거예요.”
“…….”
“최민 헌터가 지켜줄 거잖아요. 그…쵸?”
―툭.
분위기를 좀 바꿔볼까 싶어 말을 꺼냈는데 난데없이 그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시선을 살짝 내리자 붉은 머리카락만 보여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것들로부터 지킬 자신은 있습니다. 하지만 신지의 헌터를 신지의 헌터로부터 지킬 자신은 없습니다.”
“……”
“그러니 부디, 신지의 헌터가 스스로를 해하는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약속하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난생처음 보는 최민 헌터의 고집과 약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약속할게요. 절대로 희생하려고 하지 않을게요.”
“믿겠습니다.”
최민 헌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그보다 그의 얼굴이 더 붉어져 있었다.
‘오늘 새로운 모습 많이 보네.’
그도 조금 쑥스러웠는지 내 시선을 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조율자와의 거래, 그리고 최민 헌터에게 부탁하는 것도 끝났으니 다음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세빈이의 돌발 행동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