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83화 (283/366)

283화

<지키려는 자들>

비스의 업까지 파괴하고 난 후 다시 노블레스 길드 건물로 돌아왔을 땐 어느새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우리가 파편 안에서 음악가의 삶을 파괴하는 동안 벙커는 물론 건물 전체가 평소와 다름없었다고 했다.

파편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사람들에게 연락해 상황을 전달했다. 심지어 세빈이는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내 전화를 받아, 오히려 내가 서둘러 끊을 정도였다.

“협회로부터 온 연락도 없고,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헤헤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한진우 헌터가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노블레스 길드원이 런던 한식당에서 공수해 온 육개장을 한술 떠서 조심스럽게 먹었다. 레일리는 한국인도 아닌데 식사를 지나치게 잘 챙겨준단 말이지.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려 했지만 다들 체력적으로 많이 지친 탓에 길드 건물에서 하루 더 신세를 지기로 했다.

“망할 게이트가 또 터졌다는군. 먼저 가 보겠다.”

불안정한 나라 상황 때문에 먼저 돌아간 비스를 제외하고 파편 파괴를 함께한 동료들이 노블레스 건물의 손님 방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달그락.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갈비탕으로 허기를 달래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좀 정리했다.

비탄의 음악가의 파편을 마지막으로 창조자가 갖고 있는 모든 파편을 부쉈다.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여기까진 98번째 회귀와 같은 상황이다.

지옥도도 기존의 힘보다 몇 배는 더 약할 것이고 떨어지는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를 차분하게 해치우면 상황은 쉽게 종료될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변수가 존재한다. 이번 시간선은 달라진 것이 너무나 많고, 창조자도 이 상황에 맞게 움직이고 있다. 지옥도를 일찍 열어 버리거나 돌발 행동을 할 여지가 언제든 있다는 소리다.

“지옥도가 언제 열린다고 했지?”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는데 겨울이었어. 추워서 전투가 힘들었던 기억이 있거든.”

“그럼 한 12월에서 1월 정도 되겠군.”

“하지만 너무 믿진 마. 이번엔 그것보다 더 일찍 열릴지도 모르니까.”

레일리가 아보카도가 얹힌 토스트를 베어 먹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보고서를 발표해야겠네.”

“보고서?”

“누가 던전 상황을 좀 조사해 달라고 해서 우리 노블레스가 학술적으로 유~명한 길드가 되어 버렸거든.”

그는 '누가'에 힘을 주어 이야기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곤 곧 말을 덧붙였다.

“던전 내 이상 징후에 대한 보고서다. 논문으로 쓰기엔 논리적 비약이 너무 많아서 학술지에 가볍게 싣는 정도로 했지.”

“전에도 발표한 적 있어?”

“꽤 많다. 우리가 흡수한 길드 중 하나가 연구 중심 길드라서 녀석들이 학회를 한 번 쭉 돈 것 같더군.”

‘나쁘지 않네.’

레일리의 말대로라면 사람들의 안전 의식이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다. 그럼 배리어 겔에 대한 수요도 함께 높아져 결과적으로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래, 그럼 지옥도 열리기 전까지 그렇게 잘 해줘. 아, 그리고 조슈아.”

“왜 그러세요?”

“DG 허브 인수를 빠르게 추진해 줘.”

“물론이죠. 법적인 부분은 전부 끝내놨고, 서로 계약서에 사인하고 데이터만 조금 손 보면 바로 오픈할 수 있어요.”

자신감 넘치는 태도다. 조슈아는 예쁜 찻잔에 든 홍차를 홀짝거리며 싱긋 웃었다. 나도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웅, 우웅.

그때 인벤토리에 넣어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곧바로 업무용 핸드폰의 잠금을 해제하자 헌터넷 채팅 알림창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귀국하시면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조율자에 대한 것입니다.]―최민 헌터

―쿵.

“깜짝이야……!”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미안. 조금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탓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고,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한진우 헌터가 화들짝 놀랐다. 조슈아의 질문에 대답한 후 넘어진 의자를 다시 일으키는 동안에도 화면에 나타난 문장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설마 최민 헌터에게 접촉한 건가?’

‘나’들은 조율자가 저울질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세상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한지 생각하고 그쪽으로 박쥐처럼 붙을 생각이겠지.

녀석의 그런 무책임하고 변덕스러운 태도는 첫 번째 회귀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얘기하는 합리성이 얼마나 추하고 자신을 비굴하게 보이게 만드는지, 조율자는 평생 모를 것이다.

아무튼 최민 헌터의 저 초대를 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화면을 두드려 곧장 답장을 입력했다.

[조금 이따가 전화 걸게요.]

* * *

―끼익.

“들어오세요. 오랜만이네요, 최민 헌터.”

“아.”

“왜 그러세요?”

“아뇨, 그냥…….”

최민 헌터는 우리 집 현관 앞에 선 채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 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반가워서 그랬습니다. 무사하신 걸 직접 확인하니까 마음이 조금 놓여서 그만…….”

그는 이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예쁜 미소를 만들었고, 그 속엔 검붉은 보석을 닮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혹시 불쾌하셨습까?”

“그, 그럴 리가요.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뱉은 다정한 말에 왠지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라 거실 쪽으로 도망치듯 발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자 낡은 소파가 삐걱하고 울었다. 난 개의치 않고 몸을 돌려 최민 헌터를 바라보았다.

“혹시 조율자랑 만나신 거예요?”

“네. 만났다기보단 접촉에 가까웠습니다.”

―달그락.

그가 인벤토리에서 원형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는 목걸이라 최민 헌터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이 목걸이가 자신과 접촉할 수 있는 매개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아이템을 줬다고요?”

“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갑자기 사라졌거든요.”

그는 그때를 떠올리려는 듯 목걸이를 쥔 손을 턱 밑에 둔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제게 말을 전하는 게 고작인 것 같았습니다. 고장 난 TV처럼 이야기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번 시간선에서 자아를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가 생각났다. 나와 소통할 에너지가 없어서 지직거리는 노이즈를 들으며 대화를 했었는데, 창조자와 최민 헌터의 사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혹시 최민 헌터가 더 이상 창조자의 사도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요?”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고 이 매개체를 통해서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거라면 사도가 아닌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이 되겠네요.”

최민 헌터와 내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했지만 두 녀석이 나를 찾아왔던 순간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잠시 고민하자 금방 결론이 내려졌다.

“아무래도 절대자들은 사도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 이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 같네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으로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긍]

정확히는 사도의 수가 절대자들의 힘과 비례하는 것 같았다. 사도가 최소 4명이었던 창조자는 언제든지 그들을 자신의 공간에 초대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사도가 아닌 나까지 초대해 끔찍한 환상을 보여 주는 것도 가능했다.

반면 사도가 1명인 조율자는 그저 최민 헌터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에서 그쳤지. 즉,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지의 헌터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내게 설득당한 최민 헌터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을 다시 펼쳐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신지의 헌터도 아시다시피 조율자는 세상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제게 이 아이템을 줬다는 건 저를…….”

그가 말을 뚝 멈추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가 따르는 신지의 헌터에게 협조하는 것이 세상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최민 헌터의 말을 듣자마자 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박쥐가 따로 없네.’

최민 헌터와의 계약을 파기시켰을 때 날 죽일 것처럼 으르렁대더니 결국 자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내게 붙으려고 작정한 듯하다. 역겨울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에 머리가 잠시 지끈거렸지만 금세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일단 창조자든 조율자든 세상을 갑자기 뒤집을 정도로 큰 힘은 없는 거겠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거 하나는 다행이긴 한데…….”

아직 창조자에겐 김강희가 있다. 그가 사도가 맞든 아니든 창조자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패가 하나 존재한다는 뜻이다.

만약 조율자를 내 패로 가져왔을 때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그의 힘, 그 힘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하면 제법 동등한 위치에서 싸워볼 수 있다.

“최민 헌터.”

“네.”

“지금 바로 조율자를 불러 주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병실에서 있던 일을 신경 쓰는 건지 최민 헌터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최민 헌터는 입술을 꾹 깨물다 이내 목걸이의 동그란 장식 위로 손을 올렸다.

―키이잉.

목걸이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순식간에 거실 전체를 집어삼키더니 곧 구체가 되어 공중에 둥둥 떴다.

“당신은…….”

“오랜만이네.”

조율자는 내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자신의 원래 모습인 양의 형태로 나타났다. 거실에 나타난 거대한 양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꼈지만 그런 감정은 금방 털어낼 수 있었다.

어차피 인간의 힘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신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최민, 어째서 저와 이자를 만나게 한 거죠?”

“너도 그걸 바라고 최민 헌터한테 그 목걸이를 준 거 아냐?”

입을 다문 최민 헌터 대신 내가 대답하자 그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새하얀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었잖아.”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죠?”

“그게 네가 세상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을 테니까.”

―파지직.

그의 몸 주위로 약한 스파크가 일었다. 아마 조율자가 동요했다는 뜻이겠지. 정곡이 찔린 그가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노려보는 동안 나는 말을 덧붙였다.

“알려 줄게. 세상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