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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282화 (282/366)
  • 282화

    [현재 체력 : 0]

    음악가의 체력이 전부 소진됐다는 상태창이 떴다. 모두 그것을 보며 한숨 돌렸고 저마다 자리에 주저앉거나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짧은 휴식을 취했다.

    나만 제외하고.

    1악장 이별, 2악장 좌절, 그리고 3악장 배신. 앞선 두 악장에선 음악가가 우리에게 교묘한 환상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왜 이번 악장만 녀석이 아무런 정신계 스킬도 쓰지 않고 당해 주기만 한 거지?’

    이질감을 느끼자마자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레일리의 안대의 위치, 한진우 헌터의 머리색, 조슈아가 이야기하는 말투와 비스의 낫 모양까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들이 순식간에 내 목을 졸랐다.

    “지의, 어디 아픈가?”

    “헉……!”

    그때 비스가 내 바로 옆으로 날아왔다. 그는 살짝 표정을 굳힌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스.”

    “왜 부르지?”

    “너 원래 눈이 붉은색이었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칼리 님을 빙의시키면 붉게 변한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아, 아. 그랬었지…….”

    “정말로 어딘가 잘못된 건가? 네 동료 녀석한테 빨리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냐, 멀쩡해.”

    사실 하나도 멀쩡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을 여는 게 조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 아랫입술만 꾹 깨문 채 조심스럽게 무대 위로 착지했다.

    ―살랑.

    ‘깜짝이야.’

    손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나도 모르게 손을 거두며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러자 녹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들며 연두색 눈동자를 크게 떴다.

    “아. 노, 녹두도 수고했어.”

    ‘으응.’

    녹두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녀석의 목 뒤를 긁어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분명 녹두라면 내 행동에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 녹두가 진짜 녹두라는 가정이 성립한다면 말이지.’

    녹두에게서 손을 떼자 왠지 모르게 불만스러운 울음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레일리 씨, 제법이던데요? 얼마나 오랫동안 배우신 거예요?”

    “15년은 더 됐겠지. 이제 내가 좀 다르게 보이나?”

    “아하하! 바이올린 좀 켜신다고 오만하고 폭력적인 성향이 어디 가나요~”

    “지구가 반대로 돌아도 네 녀석 주둥이만큼은 변하지 않겠군.”

    조슈아와 레일리의 대화를 들으니 이곳이 음악가가 만든 환상일 것이라는 생각이 반쯤 확신으로 변했다. 2악장에서도 저런 종류의 대화가 오갔으니까. 내 긴장을 풀어놓고 순식간에 정신을 무너뜨릴 셈일 것이다.

    ―철컥.

    손에 들린 자아를 내려다보았다. 환상에서 일어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무기.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허벅지를 쏴서 피를 한 번 보면 이 환상에서 무조건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프지만 어쩔 수 없지.’

    두 번은 당할 수 없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그대로 허벅지를 살짝 빗겨 가도록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지의?!”

    “시, 신지의 헌터!”

    붉은 피가 무대 위로 흩뿌려졌다. 날카로운 고통이 허벅지에서부터 피어올라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녀석의 환상이 더욱 강해진 건지 이 공격으로는 좀처럼 깨지 않았다.

    ‘빗맞혀서 그런가……!’

    ―탕!

    이를 악물고 아예 허벅지 한가운데를 향해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지의, 당장 그거 놔!”

    가짜 한진우 헌터의 약손이 상처 위로 내려앉았다. 고통 때문에 자꾸만 점멸하는 시야 한가운데, 사색이 된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손에서 자아를 뺏으려 하길래 재빨리 피어싱으로 바꿔 그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했다.

    ―치지직.

    ‘…뭐야?’

    그리고 그런 내게 예상치 못한 상태창이 나타났다.

    [“내 연주를 끝까지 들어준 사람이 있었어!”]

    [비탄의 음악가가 환희에 찬 눈으로 한 관객을 바라봅니다.]

    ―스스슥.

    무대 위로 쏟아졌던 수십 장의 악보가 뱀처럼 길게 늘어지더니 이내 내 쪽으로 기어 오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판단에 배신당한 기분은 좀 어때?”]

    ‘스스로의 판단에 배신을 당해…?’

    나를 조롱하는 듯한 문장,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악보들. 그것을 천천히 곱씹어보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나를 속인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콰드득

    “컥……!”

    “젠장할……!”

    수십 장의 악보가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시야가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동료들이 어떻게든 나를 구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완전히 당했다. 일부러 의심을 키워놓고 스스로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현실이라면 녀석이 소멸한 것도 맞다는 뜻이다.

    ‘자기도 죽은 주제에 나를 도대체 어떻게 할 셈이지……?!’

    ―치지직.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곧바로 상태창이 나타났다.

    [비탄의 음악가가 자신의 음악을 끝까지 들어준 관객과 함께 이 공간에서 함께 소멸하길 희망합니다.]

    ‘젠장할……!’

    녀석은 나와 함께 죽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자아를 소환해서 손에 쥐려 해 봐도 털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악보에 입과 코가 막혀 숨 쉬는 것도 어려워졌다. 이제 상태창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지이익.

    ‘…어?’

    그때 상태창이 반으로 찢어졌다.

    [????????????]

    반토막 난 상태창은 순식간에 물음표로 도배되더니, 이내 찢어진 틈에서 수십 개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 왔다.

    ―탁.

    그 손들이 내 몸을 잡는 느낌이 들었다. 무대 밑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던 몸이 어느새 위로 두둥실 떠올라, 꼭 누군가 나를 들고 하늘을 향해 가는 듯했다.

    “늦지 않아 다행이야.”

    “어쩌다 또 이렇게 된 거야?”

    “정말로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익숙한 목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시커먼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손을 보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입 밖으로 샜다.

    손들의 주인은 이 세상의 일부가 되어 버린 '나'들의 것이었으니까.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도움이 됐다니 기뻐.”

    “하지만 앞으로는 좀 조심해.”

    그들의 타이름을 듣다 보니 궁금증이 생겨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우린 이 세상의 일부인데 네가 어디에 있든 알아챌 수 있지.”

    “특히 파편처럼 있어선 안 될 공간에 있으면 더 잘 찾아낼 수 있고.”

    있어선 안 될 공간, 파편은 그들이 표현한 그대로였다. 창조자가 지옥도를 열기 위해 억지로 만든 공간이니까.

    “하.”

    우습게도 녀석의 파편들은 나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나 역시 있어선 안 될 시간선을 만들어서 회귀자의 업을 갖게 됐고, 내가 사라져야 종말을 완벽히 막을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들은 모두 회귀자의 업을 갖고 있는 거지?”

    “맞아.”

    “우리를 세상에 묶어놓고 개입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기도 해.”

    이 업을 청산할 수 없다면 나의 희생은 불가피하단 소리다. 이전과 다르게 이번 시간선에선 나를 곱게 보내줄 사람이 거의 없으니, 이것에 대한 대비책도 만들어야 한다.

    “창조자나 조율자의 움직임은 특별히 없어?”

    “창조자는 김강희 옆에 찰싹 붙어서 지옥도 열 준비만 하고 있지.”

    “반쪽짜리 지옥도여도 일단 시도하려나 봐.”

    “조율자는 여전히 저울질하고 있어.”

    “걔야 세상이 지속만 된다면 창조자랑도 손을 잡을 녀석이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녀석의 행동이 회귀 전과 다름이 없다는 뜻이니까. 나는 숨을 돌리며 멍하니 새카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근데 언제쯤 동료들한테 데려다줄 거야?”

    “아, 미안. 반가워서 너무 오래 데리고 있었네.”

    “얼른 데려다줄게.”

    ―사아아.

    가벼운 바람이 불더니 나를 태운 손들은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지옥도를 부수면, 꼭 우릴 구해줘.”

    그들의 부탁과 함께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윽!”

    “지의!”

    “신지의 헌터, 정신이 좀 드세요?!”

    선잠이 들었다 깬 것처럼 여전히 정신이 몽롱했지만, 다행히 시야는 금방 돌아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네 사람이 눈에 들어왔고, 녹두는 낑낑대며 내 팔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따로 아프신 곳은 없죠? 저, 저희 다 누군지 기억나시죠?”

    “당연하죠.”

    울상이 된 한진우 헌터를 향해 싱긋 웃자 그제야 그가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허벅지는 진작 다 치료됐구나.’

    내가 잠깐 기절해 있던 사이에 약손이 모든 치료를 끝내놓은 듯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해, 다들. 내가 속지만 않았어도.”

    동료들을 볼 낯이 없었다. 녀석에게 속지 않고 조금만 더 버텼으면 아무 일 없이 끝났을 텐데, 과거의 나들이 없었으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만들다 못해 남은 사람들에게 상처까지 줄 뻔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신지의 헌터. 사실 저도 긴가민가했었거든요.”

    “조슈아 씨 말이 맞아요! 충분히 헷갈릴 수 있어요!”

    조슈아와 한진우 헌터가 다정하게 나를 위로하는 동안 레일리와 비스는 심드렁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하아아…….”

    “…….”

    “마음 같아선 뭐라 하고 싶은데, 지금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도 네가 살아 있기 때문이겠지.”

    레일리가 마른세수를 하곤 손으로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말을 덧붙였다.

    “살았으면 그걸로 됐다.”

    “…고마워, 레일리.”

    “아직 우리 비스는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그때 칼리가 갑자기 나타나 비스의 볼을 꾹 눌렀다. 비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손을 쳐내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할 말 없어. 나도 레일리 녀석과 비슷해.”

    “…….”

    “바보 같이 당하지만 마라.”

    “응. 알겠어.”

    “그리고 이 파편을 빨리 없애기나 해. 아까부터 슬슬 속이 불편해지려던 참이니까.”

    그는 머쓱한지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나도 더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자아를 쥐었다.

    ‘카르마의 탄환.’

    ―철컥.

    [카르마의 탄환]

    [각성자에게 씌워진 업을 파괴할 수 있다]

    [파괴 시 업으로 인한 모든 효과가 사라진다]

    [*말의 씨앗이 개화한 상대에게만 사용 가능]

    [파괴할 수 있는 업이 감지되었습니다]

    [‘카르마 : 비탄의 음악가’]

    [절대자 ‘창조자’가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에게 씌운 비탄의 음악가의 업. 비나를 연주해 생명체의 꿈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탄환의 효과인지 새하얀 빛무리가 날아들어 주위가 조금 밝아졌다. 비스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다 이내 결심한 듯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탕!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창조자의 마지막 사도를 향해 탄환이 날아갔다.

    [카르마 : 비탄의 음악가가 파괴되었습니다]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가 절대자 ‘창조자’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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