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
“큭!”
큰 북소리와 함께 새 악장이 시작됐다.
앞선 두 악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라서 순간 귀가 멍해졌다.
―퍼버벙!
무기를 고쳐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묵직한 포탄이 녀석의 머리를 집중 포격하자 검은 잉크가 흩뿌려지는 피처럼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양쪽에서 날아온다! 조심해라!”
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객석에서는 유리 장미가, 연주자들 쪽에서는 음표가 날아왔다.
―쾅!!
급히 무대 바닥으로 착지해 날붙이들을 피한 후 자아를 확성기로 바꾸어 방아쇠를 당겼다. 새하얀 소리 파도가 무대 전체를 휩쓸자 음표와 유리 장미가 산산조각 나며 여기저기 흩어졌다.
[피아노 협주곡 1번 '비탄'의 3악장 '배신'은 비탄의 음악가가 사랑과 믿음의 덧없음을 나타낸 곡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끔찍했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고, 용서를 구하던 연인은 음악가의 눈앞에서 죽었습니다.]
[길 잃은 분노는 그의 마음속에서 썩어갈 뿐입니다.]
이별의 악몽을 살아나게 한 첫 번째 악장과 끔찍한 좌절을 겪게 만든 두 번째 악장. 녀석의 환상은 더욱 정교하고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배신을 노래하는 이번 악장에서 어떤 식으로 우리를 함정에 빠트릴지, 벌써부터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도 녀석의 환상의 일부일 수도 있어.’
내가 느끼는 감각마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애써 정신을 집중하며 공격을 이어갔다.
―퍼버벙.
바주카의 방아쇠를 당겼다. 포탄이 빠져나갈 때마다 손끝의 떨림을 느끼며 녀석의 체력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한진우 헌터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건가?!’
주변 소리가 워낙 큰 탓에 레일리의 바이올린과 한진우 헌터의 노랫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흘긋 돌려 그들을 바라보니 아더의 방패로 스스로를 보호한 채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노랫소리가 음악가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걸 보여 주듯 음악가는 신나게 세 번째 악장을 연주할 뿐이었다.
‘자아야.’
‘왜.’
‘다른 사람한테 빌려줘도 확성기 기능은 쓸 수 있는 거지?’
‘그럼. 확성기로 태어났으니까.’
그렇단 말이지.
자아의 명쾌한 대답을 들은 후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탁.
구원자의 무기 창고에 있는 배트와 비슷한 형태로 소리를 뽑아낸 후 한진우 헌터의 옆으로 달려갔다.
“왜 그러지?”
바이올린을 켜던 레일리가 입만 움직여 물었고, 나는 그에게 대답하는 대신 한진우 헌터에게 자아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노래를 멈추곤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쓰세요. 지금 소리로는 저 녀석한테 절대 안 닿아요.”
―턱.
한진우 헌터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아를 받은 후 조심스럽게 입가로 가져왔다. 망설이는 듯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덧붙였다.
“자신 있게 해요. 헌터였던 시간보다 가수였던 시간이 더 길었잖아요.”
“신지의 헌터……!”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한진우’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신뢰]
나에 대한 신뢰인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의 눈동자에서 엄청난 자신감이 느껴졌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아아~”
―쿵!
‘깜짝이야……!’
한진우 헌터가 음악가가 피아노로 연주 중인 멜로디를 부르자 갑자기 그랜드 피아노 뚜껑을 받치고 있던 지지대가 무너졌다. 갑자기 닫힌 뚜껑 때문에 음악가의 연주 소리가 반으로 줄었고 관객석 쪽에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리는 노랫소리지?”]
[“쉿! 오케스트라 소리가 잘 안 들리잖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관객들이 동요합니다.]
[비탄의 음악가 역시 크게 당황했지만 연주를 이어갑니다.]
‘효과가 있어!’
한진우 헌터의 목소리가 음악가의 피아노 소리를 전부 집어삼킬 만큼 커져, 어느새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한진우 헌터의 노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후후, 정말로 듣기 좋은 목소리구나.”
“비스는?”
“조금 지쳐서 쉬고 있다. 다친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빛의 아이야.”
칼리가 내 옆으로 홀연히 날아와 말을 건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수십 개의 팔에 들린 무기들이 철컹, 하고 소리를 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음악가를 향해 날아갔고, 닳을 대로 닳은 음악가의 몸을 창으로 수십 번 찔렀다.
[현재 체력 : 231,488]
미미하지만 체력은 확실하게 줄고 있다. 한진우 헌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안정적으로 노래를 이어갔고, 그의 호흡에 맞춰 오케스트라가 곡의 셈여림을 조절했다.
―쾅!
낮말을 듣는 새로 뛰어오르자마자 레일리와 한진우 헌터를 향해 날아오는 오선을 배트로 후려쳤다. 궤도가 바뀐 오선은 애꿎은 오케스트라의 머리만 뎅강 잘라 버리곤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투웅, 투웅.
또다시 피아노 쪽에서 나사 빠진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피아노 페달이 고장 났는지 음악가가 페달에서 발을 떼도 그것은 그대로 눌린 채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모든 소리가 뒤섞여 안 그래도 잘 들리지 않는 소리가 더욱 묻혔다.
[비탄의 음악가가 크게 당황합니다.]
[비탄의 음악가의 방어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노래를 부르면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눈동자의 설명이 옳았다. 녀석은 한진우 헌터의 노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무대에 크게 동요했고 결국 유일한 강점이었던 방어력마저 잃었다.
“흐읍……!”
―쾅!!
[현재 체력 : 229,005]
온 힘을 다해 배트로 내려친 것만으로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수준의 피해가 들어갔다. 제 몸만 한 크기의 창에 찔리고 용암 범벅이 되어도 멈추지 않는 녀석의 연주가 서서히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
녀석은 음악에 조예가 없는 내가 들어도 틀린 음을 누르고 있었고, 그럴수록 관객석의 웅성거림도 더욱 커졌다.
[비탄의 음악가의 머릿속이 새하얘집니다.]
[눈을 감고도 연주할 수 있던 곡이 기억나지 않아 계속해서 같은 구간을 반복할 뿐입니다.]
[오케스트라가 그를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탁.
나는 아예 고장 난 페달 옆으로 착지해 음악가의 발등을 부술 기세로 배트를 휘둘렀다.
―콰그작!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자 잘 닦인 검은 구두 밖으로 검은 잉크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녀석의 다리를 완전히 부숴 놓는 동안 칼리와 조슈아도 제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는지 음악가의 체력이 거침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현재 체력 : 195,936]
―콰과광!!
“큿!”
“한진우 헌터! 레일리!”
그때 거대한 음표가 두 사람의 위로 떨어졌다. 그쪽으로 달려가기 위해 피아노 밑에서 나오자마자 먼지바람을 헤치고 거대한 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마터면 바이올린을 부술 뻔했군.”
“놀래라…….”
레일리는 아더의 방패와 바이올린을 각각 한 손에 든 채 인상을 구겼다. 그의 등 뒤에 숨은 한진우 헌터도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며 저를 향해 날아오는 음표들을 모래성으로 가뒀다.
“이쪽은 괜찮으니까 얼른 공격해라!”
“알겠습니다~”
―콰과광!
발랄한 대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공격이었다. 조슈아가 음악가의 몸을 타고 오르며 온몸에 난도질해 놓은 후 녀석의 머리 위에 용암 폭포를 생성했다. 뜨거운 액체는 녀석의 척추와 팔을 따라 밑으로 뚝뚝 떨어졌고, 결국 덜렁거리던 한쪽 손목을 그대로 녹여 버렸다.
[현재 체력 : 156,657]
[연주에 실망한 관객들이 서서히 자리를 떠납니다.]
[“고작 이런 연주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후회스럽군.”]
[“이 세상 모든 슬픔은 다 가진 척하더니 결국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구나.”]
살벌한 평가가 이어지자 음악가의 연주는 더욱 형편없이 무너졌다. 오케스트라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버거운지 녀석의 몸은 좌우로 덜덜 떨렸다.
―쿵!
잃어버린 한쪽 손을 대체 하기 위해 녀석이 머리로 건반을 두드렸다. 녀석의 처절한 노력에도 연주가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느새 오케스트라는 한진우 헌터의 노랫소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피아노를 비추던 조명도 한진우 헌터와 레일리 쪽으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었다.
[“어째서 내게 또다시 이런 일이……?”]
[비탄의 음악가의 방어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무대의 주인이 완전히 바뀐 것이나 다름없었다.
“녹두야!”
“아우우―!”
―콰과광!
그 틈을 놓칠 수 없었다. 허공을 날아다니던 녹두를 부르자 녀석이 울음소리를 길게 빼며 음악가의 머리를 향해 빛줄기를 날렸다. 녀석의 머리를 구성하던 악보들이 한 장 한 장 뜯겨나가 관객석 쪽으로 힘없이 날아갔고, 바닥에 닿자마자 갈기갈기 찢겼다.
[현재 체력 : 124,802]
―투쾅!
체력을 다 회복한 비스가 오케스트라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칼리를 제 몸에 빙의시키며 단번에 음악가와 거리를 좁혔다.
―서걱.
대낫이 녀석의 목을 벴다. 이번엔 날이 제대로 들어간 듯 시커먼 잉크가 사방으로 터져나갔고, 비스는 망토 모자를 뒤집어쓰며 그 액체를 피해 다녔다.
[현재 체력 : 99,682]
끝이 보인다. 창조자가 갖고 있던 마지막 파편이 소멸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한진우 헌터의 노래가 무대를 가득 채우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음악가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현재 체력 : 39,821]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는 동안 음악가의 몸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건 녀석의 목숨을 확실하게 끊어놓을 수 있는 폭발적인 공격이다.
“한진우 헌터! 무기 다시 가져갈게요!”
“아! 알겠어요!”
자아의 소환을 해제한 후 다시 내 손으로 불러들였다. 한진우 헌터의 목소리가 많이 작아졌지만 여전히 조명은 그를 향하고 있었다.
―타다닥.
자아의 방아쇠를 당기며 음악가를 향해 달려갔다. 녀석은 탄환을 온몸으로 맞으며 당장이라도 의자에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박격포.’
―끼리릭
녀석의 머리 바로 앞에 온 순간 나는 자아를 떨어트렸다. 조립이 완료된 자아의 포구는 정확히 녀석의 머리를 향했고 발포 음이 귀에 닿기도 전에 공기가 먼저 진동했다.
―콰과광!!
엄청난 폭발에 몸이 살짝 뒤로 밀렸다. 반면 음악가의 몸은 커다란 금이 쩍 가더니 이내 수백 장의 악보로 변해 무대 위에 차곡히 쌓였다.
“하아, 하아…….”
끝났다. 음악가의 삶을 차례차례 부수던 우리는 결국 녀석의 삶 전체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하아… 길었네요, 안 그런가요?”
“……”
“신지의 헌터?”
“어? 어, 그러게…….”
―두근, 두근.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안도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작은 의심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것도 녀석의 환상의 일부일 수도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