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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280화 (280/366)

280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악보를 가져오라고 시킨 것부터인지, 아니면 애초에 이 파편 안으로 끌어들인 게 잘못인지. 결론지을 수 없는 후회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콰과광!!

조슈아의 용암이 음악가를 집어삼켰다. 평소 같으면 피부에 열기가 느껴졌을 텐데, 지금은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X자식이!!”

조슈아가 날뛰었다. 음악가의 방어력이 대폭 감소한 덕에 그의 공격은 녀석에게 치명타를 주었고, 절반이 좀 넘게 남아 있던 체력은 순식간에 10만 대로 떨어졌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눈앞에서 허무하게 동료를 잃었다. 그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은 음악가의 손짓 한 번에 완전히 무너졌고, 레일리와 다시는 함께 싸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툭.

내 눈물이 레일리의 감지 못한 왼쪽 눈동자 위로 떨어졌다. 그의 눈가를 타고 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눈을 덮어 주었다. 차갑고 딱딱한 피부의 촉감이 그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듯했다.

희망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한 기분이 들어 조슈아의 용암 속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레일리의 눈꺼풀을 덮었던 손을 뗀 후 다시는 보지 못할 그의 얼굴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쿵, 쿵, 쿵.

“……”

이상하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내가 레일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죽음에 정말로 이상한 점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텁.

“신, 지의 헌터…?”

레일리의 얼굴 위에 손을 얹었다. 의문을 표하는 한진우 헌터를 뒤로 한 채 그의 얼굴을 내 눈에 각인시키듯 그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핏기가 빠진 듯 창백한 피부, 그리고 오른쪽 눈에 낀 안대.

‘…오른쪽 눈?’

―철컥.

“신지의 헌터!”

“잠깐, 지의……!”

―탕!

망설임 없이 내 허벅지에 대고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엄청난 고통에 눈이 한 번 더 뜨이는 느낌이었다. 팔로 바닥을 지탱한 채로 주위를 살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풍경들이 물에 씻겨나가듯 밑으로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레일리의 시체와 핏자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음악가의 몸을 파고들던 용암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신지의 헌터! 또 다리를……!”

“하아, 하, 하하하…….”

한진우 헌터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도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웃음부터 터졌다. 그는 어깨를 흠칫 떨며 놀라더니 곧 내 허벅지 위로 약손을 덮어 주었다.

‘뭐 같은 환각이었네.’

모든 상황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 정신계 스킬이라고 의심해 볼 생각조차 못 했다. 레일리가 안대를 왼쪽 눈에 낀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가짜 레일리의 시체를 붙잡고 그대로 절망 속으로 빠졌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 모든 게 꿈이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허벅지에서 홧홧하게 피어오르는 통증은 레일리를 잃었을 때 느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끼기기긱.

고개를 돌리니 녹두의 배리어가 유리 장미들을 막아주고 있었다. 환각 속에서 봤던 것처럼 억수같이 쏟아지진 않았다.

‘그 고통까지 가짜였다니.’

유리 장미가 쇄골과 복부를 꿰뚫은 고통이 아직까지 선명한데, 그게 허상이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오싹했다. 음악가가 사용하는 정신계 스킬의 수준은 적어도 S급 그 이상인 것 같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어.

―탁.

그때 칼리의 팔을 타고 나타난 비스가 내 앞에 착지했다.

“이봐, 지의. 괜찮나?”

“응. 비스, 넌?”

“보다시피 멀쩡하다. 정신계 스킬이라는 걸 너무 늦게 자각하긴 했지만 칼리 님께서 나를 찔러 주신 덕분에 깼지.”

“아하하하! 비스, 설마 뒤끝을 부리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비스가 칼리를 향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곤 곧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상체를 겨우 일으켰다.

―쾅!

배리어 밖으로 조슈아가 음악가를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내가 제일 늦게 깨어난 모양이었다.

“아직 레일리는 안 온 거지?”

“그래. 코빼기도 안 비치는군.”

“하아아…….”

죽은 레일리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혹시라도 악보를 찾다가 무슨 일이 났을까 싶어 심장이 불쾌하게 빠르게 뛰었다.

―사락.

약손이 싱그러운 풀 냄새와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욱신거리던 허벅지도 말끔하게 돌아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2악장이 끝날 때까지 안 나타나면 내가 찾으러 갈게. 그때까지 시간 좀 벌어줘.”

“알겠다.”

“녹두야, 배리어 해제 부탁해.”

―챙그랑.

녹두는 고개를 끄덕인 후 돔 형태의 배리어를 없앴고, 동시에 조슈아의 검이 음악가를 공격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 신지의 헌터~”

“난 괜찮아. 음악가 방어력 상태는 어때?”

“아까 조금 감소한 그대로예요. 공격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죠.”

―콰과광!!

그랜드 피아노 뚜껑에 서 있던 조슈아가 음악가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는 손에 있던 검을 던져 녀석의 머리에 명중시킨 후 검이 꽂힌 자리부터 쇄골까지 용암을 흘러내리게 했다.

[현재 체력 : 254,605]

―퍼버벙.

조슈아가 다시 몸을 뒤로 날려 건반 위로 착지하는 타이밍에 맞춰 바주카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딴 끔찍한 환상을 보게 하다니.’

나를 좌절시키려 한 녀석의 행동에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나도 모르게 이를 아득 갈았다. 자세를 제대로 잡은 후 녀석의 가슴 부근에 생긴 상처를 향해 연달아 발포했다.

[현재 체력 : 234,995]

[2악장도 서서히 클라이맥스에 접어듭니다.]

[비탄의 음악가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음을 느끼며 연주에 완전히 빠져듭니다.]

[비탄의 음악가의 방어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쳇.”

줄어들었던 방어력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자 공격의 피해가 반으로 줄었다.

―파바박!

그러자 관객석에서 또다시 유리 장미 세례가 쏟아졌다. 쉴드를 펼쳐 그것들을 튕겨낸 후 확성기 형태로 바꾼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겨 공기를 진동시켰다.

반짝거리는 유리 가루가 공기 중을 떠다니다 곧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중 몇 개는 내 피부를 스쳐 작은 상처를 냈다.

“흡!”

비스가 칼리를 빙의시킨 후 높게 날아올랐다. 등 뒤에 달린 손들의 도움을 받아 거대한 창을 양손에 들고 그대로 녀석의 어깨 관절에 찔러 넣었다.

―콰과광!!

[현재 체력 : 234,118]

클라이맥스라는 소리가 거짓은 아닌지 연주 소리가 점점 더 웅장해지기 시작했다. 건반을 두드리는 음악가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커졌다. 그 탓에 녀석의 머리가 엄청난 속도로 비스를 향했다.

―타앙!

‘젠장할, 늦은 것 같은데……!’

그쪽으로 방아쇠를 당겨 쉴드를 뽑았지만, 내 쉴드가 비스의 앞에 도달하는 것보다 녀석의 거대한 머리가 그를 들이받는 것이 더 빨라 보였다.

―쿵.

“아……!”

그때 거대한 방패가 비스의 앞을 막아섰다. 음악가는 방패에 머리를 그대로 부딪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재 체력 : 233,961]

“하여간 하나같이 공격을 퍼부을 줄만 아는군.”

곧이어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오케스트라 위쪽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옆구리에 종이 뭉치를 낀 레일리가 관객석처럼 보이는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탁.

레일리는 난간을 밟고 내려와 무대 위로 착지했다. 그가 손짓하자 음악가와 우리 사이에 아더의 방패가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우리를 향해 날아오던 유리 장미는 방향을 바꿔 반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진짜 레일리였다. 왼쪽 눈에 안대를 끼고 있는 그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왜 그렇게 보지?”

“…반가워서.”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기쁨]

“별소리를 다 듣는군.”

레일리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더니 내게만 들릴 크기로 작게 중얼거렸다.

“레일리 씨, 생각보다 많이 늦으셨네요?”

“오자마자 핀잔인가, 체스터?”

“사실을 얘기한 거죠.”

“악보 자체는 쉽게 찾았다. 대신 이걸 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

조슈아의 말을 가볍게 받아치며 레일리가 직사각형 케이스를 든 손을 흔들었다.

“이게 뭐야?”

“바이올린.”

“정말로?!”

“그럼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지?”

레일리가 나를 놀리는 듯한 투로 대답한 후 옆구리에 끼워뒀던 악보를 내게 건넸다. 레일리가 케이스를 열어 바이올린을 꺼내는 동안, 혹시라도 내가 정신계 스킬로 봤던 일이 벌어질까 봐 음악가의 눈치를 슬쩍 봤다. 다행히 음악가는 연주에 열중하느라 우리를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음을 흥얼거려서 저 애송이에게 알려주는 것보다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 더 따라 부르기 쉬울 거다. 애송이, 어떤 게 더 낫지?”

“악기로 연주하는 게 훨씬 편해요. 그동안 가이드 녹음이나 키보드 반주에 맞춰서 불렀었거든요.”

“그럼 해결됐군.”

그때 음악가의 연주가 멈췄다. 녀석은 1악장이 끝났을 때처럼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후 오케스트라의 준비가 완료되기를 기다렸다.

난 곧바로 레일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일리, 3악장 악보 어떤 거야?”

“어디 보자… 이거군.”

레일리는 내게 건넸던 악보들 중 한 뭉치를 꺼내 케이스 위에 펼쳐놓았다.

―♬♪♬

그러곤 바이올린으로 가볍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좀 색다르네.’

매번 큰 방패를 들고 메이스를 휘두르는 모습만 봤던 터라 이렇게 얌전한 레일리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한진우 헌터는 레일리의 연주에 맞춰 멜로디를 흥얼거렸고 얼마 연주하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의 호흡이 서서히 맞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두 사람은 노래, 나머지는 아까처럼 공격하자.”

“알겠다.”

“좋습니다~”

―쿠구궁.

레일리가 아더의 방패를 거두자 비스와 조슈아가 동시에 음악가와 거리를 좁혔다. 나도 자아를 바주카로 바꾸며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다음 악장이 시작될 때까지 호흡을 가다듬었다.

[피아노 협주곡 1번 ‘비탄’ 제 3악장, ‘배신’이 연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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