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77화 (277/366)
  • 277화

    <피아노 협주곡 1번 ‘비탄’>

    ―♬♪♬

    본격적인 연주가 시작됐다. 녀석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가볍게 미끄러질 때마다 모든 장기를 뒤흔드는 느낌이 들어 곧바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진정한 음악가라고 하더니, 기존에 있던 클래식을 전부 섞어 놓은 걸 연주하네요~”

    ―콰과광!!

    조슈아가 음악가를 조롱하며 피아노 위에서 뛰어내렸고 녀석의 허벅지에 이도를 꽂아 넣었다. 피가 흐르기도 전에 그는 상처 위로 용암을 부으며 무대 위로 착지했다. 뒤이어 칼리와 하나가 된 비스가 낫으로 녀석의 목을 쳤다.

    날이 목을 꽤 깊게 파고들었지만 완전히 베지는 못했다. 그는 그대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었다.

    [현재 체력 : 499,901]

    용암이 살을 문드러지게 하고 날 끝이 목을 파고들어도 녀석의 체력은 아주 조금 닳았을 뿐이다. 녀석을 해치우는 것보다 우리의 체력이 먼저 바닥이 되게 생겼다.

    ‘아무래도 그 악보인지 뭔지를 빨리 찾아서 노래를 부르는 수밖에 없어.’

    ―♬♪♬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에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클래식이 뒤죽박죽 섞여 넓은 콘서트홀에 울려 퍼졌다.

    “지의! 조심해라!”

    ―쾅!!

    레일리의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내 오른팔 옆에 아더의 방패가 만들어졌다. 파열음에 놀라 몸을 돌리자 아더의 방패에 시커먼 음표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는 음표가 날아온 방향으로 공격을 그대로 반사했다.

    ―파바박!

    음표는 연주자들을 향했다. 녀석들의 몸에 음표가 박혔지만 그럴수록 악기에선 더욱 공격적으로 음표가 튀어나왔다.

    ‘악보에 대한 걸 얘기해야 하는데……!’

    안 그래도 3초에 한 번씩 바뀌는 음악 탓에 전투에 집중하기 힘든데, 음표까지 비처럼 쏟아지니 작전을 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우웅.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겨 음표의 움직임을 더디게 한 후 녹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녹두야, 배리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어?’

    ‘공격력에 따라 달라.’

    녹두는 느릿느릿 날아오는 음표를 하울링으로 전부 파괴한 후 되물었다.

    ‘그런데 왜?’

    ‘동료들과 작전을 짤 시간이 필요해. 딱 5분만 저 음표들을 막아줄 수 있을까?’

    ‘알겠어. 최대한 버텨볼게!’

    녹두가 배리어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자아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다들 음악가 주변으로 모여!”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긍]

    내 말에 모든 사람들이 녀석이 앉은 그랜드 피아노 쪽으로 달려갔고 그와 동시에 녹두의 배리어가 우리와 음악가 위로 씌워졌다.

    ―끼기기긱.

    음표가 배리어를 뚫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자잘한 흠집만 낼 뿐이었다. 피아노 연주에 열중인 음악가를 가운데 둔 채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다들 음악가 체력 줄어드는 것 봤지?”

    “봤어요. 생각보다 엄청 단단하군요.”

    “조슈아랑 비스 모두 파괴력이 엄청 높은 편인데도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어.”

    아직 내 공격은 시험해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공격이 입힌 피해로 봤을 때, 매 공격을 박격포로 쏴야 어느 정도 부상다운 부상을 입힐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방법이 있나 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 리 없으니까 말이야. 내 말이 맞지, 지의?”

    레일리가 씩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가 이제 오만하긴커녕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맞아.”

    나는 의기양양해진 레일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왼쪽 눈동자로 녀석의 특이 사항을 한 번 더 읽었다.

    “지금 이 공간엔 음악가가 연주 중인 악보가 있어. 그 악보를 찾아서 노래를 부르면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해.”

    “악보요?”

    “끝까지 귀찮게 하는군.”

    ―쿵.

    비스가 혀를 차며 화풀이하듯 음악가의 발등을 낫으로 찍었다.

    [현재 체력 : 499,900]

    미세하게 줄어든 체력에 더 열받았는지 그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아무튼 둘로 찢어져야 할 것 같아. 한쪽이 음악가를 상대하는 동안 다른 한쪽이 악보를 찾아오는 거지.”

    “노래는 한진우 헌터가 부르면 될 것 같고, 악보를 찾는 게 일이겠네요.”

    “그럼 이 애송이가 악보를 찾는 게 낫지 않겠어? 어차피 자기가 부를 거니까.”

    레일리가 메이스로 한진우 헌터를 가리켰다.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넘어가자 왠지 모르게 난처해 보이는 한진우 헌터의 얼굴이 보였다.

    “그, 제가 사실은…….”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얘기해라.”

    “…악보를 못 봐요.”

    “네?!”

    “뭐라고?”

    ‘노래를 부르니까 당연히 볼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발언에 모두가 경악하자 한진우 헌터는 눈까지 질끈 감은 채로 말을 덧붙였다.

    “그, 그동안 가이드 녹음을 듣고 그대로 따라 불렀거든요…….”

    “그럼 악보만으로는 노래를 부르기 어렵다는 건가요?”

    “창피하지만, 네…….”

    한진우 헌터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대답하곤 행운의 토끼발만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어쩔 줄 모르는 그의 행동에 내가 다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다시 생각하자. 음악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한진우 헌터만 있는 건 아니니까.

    “레일리, 악보 볼 줄 알지? 바이올린 배웠다고 했잖아.”

    “대부분 까먹긴 했지만 기본적인 건 읽을 수 있을 거다.”

    “그럼 네가 악보를 찾아줘.”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레일리가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배리어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끼기긱.

    음표가 배리어를 부술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녹두의 배리어는 아슬아슬하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한 번 더 공격이 이어지면 그땐 정말로 깨질지도 모른다.

    “아까처럼 방어에 소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내가 악보를 찾겠다.”

    “아.”

    방금 있던 일을 마음에 담아뒀나 보다.

    “알겠어. 조심할게.”

    그의 서툰 걱정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이자 레일리도 이해했다는 듯 메이스를 다시 액세서리 형태로 돌려놓았다.

    [발언 결과 : 수긍]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상태창과 함께 레일리가 배리어 쪽으로 발을 옮겼다.

    “10초 후에 배리어 해제할게. 레일리는 악보를,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서 음악가를 상대하는 거야.”

    “그래.”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진우 헌터는 악보를 찾으면 노래 부를 준비를 해주세요. 어떤 멜로디인진 레일리가 가르쳐줄 거예요.”

    “으으… 알겠어요.”

    그는 여전히 악보를 보지 못하는 사실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대답했다.

    ―쿵, 쿵, 쿵.

    음표 때문에 배리어에 금이 갔다. 작은 실금이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지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배리어 전체를 덮었다.

    “녹두야, 배리어 해제!”

    ―파아앗!

    내가 소리치자마자 우릴 둘러싸고 있던 배리어가 안개처럼 사라졌다. 곧바로 연주자들의 악기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고, 의미 없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던 음표들도 한껏 기세가 등등해진 채 우리의 목을 노렸다.

    ―팅, 팅, 팅.

    쉴드를 들어 음표들을 막는 동시에 자아를 음악가 쪽으로 들었다.

    ―탕!

    탄환이 새하얀 궤적을 남기며 녀석의 몸에 박혔다.

    [현재 체력 : 499,505]

    ‘확실히 얼마 줄지 않는군.’

    비스와 조슈아의 공격보다는 큰 피해를 입혔지만 다른 몬스터와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수치다. 녀석의 방어력은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모든 몬스터들 중 가장 강하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콰과광!

    음악가가 양손으로 건반을 내리치자 그랜드 피아노의 안에서 오선이 덩굴처럼 뿜어져 나왔다.

    “큿……!”

    “조슈아!”

    ―탕!

    오선 하나가 조슈아의 다리를 낚아채 피아노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가 용암으로 오선을 끊어 내는 동시에, 내 탄환이 그것을 관통했다. 결국 오선은 먼지가 되어 무대 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피아노 건반 위에 착지한 조슈아는 음악가의 팔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녀석의 목과 거리를 좁히는 동안 음악가의 팔은 순식간에 용암으로 뒤덮였다.

    ―쾅!!

    그때 비스가 음악가의 목을 낫으로 걸어 조슈아의 반대편으로 낫을 끌어당겼다. 음악가의 목이 한쪽으로 꺾인 덕에 조슈아가 공격할 지점이 훤히 드러났다.

    ―쉬이익.

    무언가 맹렬하게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쾅!!

    “윽!”

    쉴드를 뽑아내며 곧바로 뒤를 돌자 커다란 음표가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쉴드를 팔을 통해 전해지는 강한 진동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쉴드가 깨지기 전에 그것을 옆으로 던져 버리자 음표는 쉴드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1악장은 계속 음표로만 공격할 셈인가?’

    그랜드 피아노에서 뿜어져 나온 오선을 제외하고, 음악가는 직접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그의 연주는 도와주는 오케스트라만이 더욱 위협적으로 음표를 소환할 뿐이었다.

    ―♬♪♬

    연주 소리가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사람만 한 크기의 음표가 운석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녹두야!”

    ‘알았어!’

    녹두가 울음소리를 길게 빼며 음표들을 부수는 동안, 나는 자아를 바주카로 바꿔 그것들을 한 번에 날려 보낼 준비를 했다.

    ―퍼엉!

    무거운 소리 포탄이 허공을 가르며 음표를 향해 날아갔다. 주변에 있던 공기까지 진동시킨 탓에 포탄에 맞지 않은 음표들까지 전부 산산조각 났다.

    [현재 체력 : 498,156]

    조슈아와 비스도 공격에 성공하며 체력을 조금씩 깎아 놓았다.

    [피아노 협주곡 1번 '비탄'의 1악장 '이별'은 비탄의 음악가가 처음으로 이별을 겪은 순간을 표현한 곡입니다.]

    [자신의 실수로 악마를 마을로 들여 가족과도 같던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린 순간이었죠.]

    [이별은 그렇게 늘 예고도 없이 찾아옵니다.]

    ―철컥.

    눈앞을 어지럽게 만드는 상태창을 무시하고 바주카의 포구를 음악가를 향해 겨눴다.

    ―퍼엉!

    묵직한 진동과 함께 포탄이 빠져나오고 음악가의 머리에 명중시켰다. 악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그 틈으로 검은 잉크가 흘러나왔다.

    [현재 체력 : 497,568]

    “…오케스트라 소리가 조금 작아진 것 같지 않나요?”

    “오케스트라가요?”

    내 옆으로 다가온 한진우 헌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투 때문에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연주자들의 악기 소리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

    어느새 공연장에는 음악가의 피아노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언니.”

    “…어?”

    그때였다. 이곳에서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 하지만 계속해서 듣고 싶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쿵, 쿵, 쿵.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움켜쥐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억, 헉……!”

    음악가의 너머로 보이는 관객석의 한가운데, 링거가 꽂힌 작은 손바닥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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