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76화 (276/366)
  • 276화

    [현재 음악가의 정신력 : 30/100]

    ‘20밖에 안 줄었잖아?!’

    지금쯤 게일은 마을을 떠났을 것이다. 반면 기자들은 음악가가 있는 곳을 찾아냈을 것이다. 음악가가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걸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후웅.

    공중으로 날아올라 마을의 지붕을 밟고 올라섰다. 예상보다 훨씬 적게 정신력이 소모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허점이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저건……!”

    그때 마을 광장 쪽에서 누군가 달려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에 갔다고 생각했던 게일이었다.

    ‘상황을 알고 설마 다시 돌아온 건가?!’

    게일이 달려 나가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음악가가 일하고 있는 레스토랑 주변으로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몇몇은 사다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선 채로 거대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하강해 게일의 바로 뒤에 섰고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게일 씨!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 이렇게 기자들이 몰릴 거라고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선택은 게일 씨가 하신 겁니다. 일단 빨리 수도로…….”

    “저를 돋보이게 하는 사연 정도로 애인 얘기를 꺼낸 것 아닌가요? 도대체 어떤 얘기를 했길래 기자들이 제 애인만 죽어라 쫓는 거예요?!”

    ―탁!

    게일이 내 손을 뿌리치고 나를 향해 쏘아붙이듯 이야기했다.

    “저 기자들이 저한테 오도록 만들었어야죠. 안 그래도 제 애인은 이런 관심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인데……!”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려 다시 기자들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음악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게일과 음악가가 만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만약 저기서 게일이 상황을 수습하고 음악가에게 용서를 구하면 정신력이 다시 회복될 것이다. 안 그래도 20밖에 줄어들지 않은 상황인데, 그런 식으로 일이 돌아가면 완전 낭패다.

    ―타닥.

    다시 ‘낮말을 듣는 새’를 사용해 공중으로 뛰어 올라갔고 위쪽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게일이 기자들을 비집고 레스토랑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어느새 음악가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생활하시는 이유는 애인 때문입니까?!”

    “정말로 그렌타의 후원이 끊긴 게 맞습니까?”

    “이쪽, 이쪽도 봐주세요!”

    음악가의 머리를 대신한 악보는 순식간에 붉은 잉크로 물들어 바닥을 향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크게 휘청거렸지만 그럼에도 기자들의 질문은 끊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릴 뿐이었다.

    “자기야!”

    “헉……!”

    그때 게일이 기자들 사이에 낀 채로 소리쳤다. 제 애인의 목소리에 음악가가 고개를 들었고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틀었다.

    “게일, 어떻게 네가……!”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일단 내 얘기를 들어줘!”

    “윽…….”

    음악가는 화를 내려던 것을 관두고 게일이 인파를 뚫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끼긱.

    게일이 기자들을 헤집고 나오자 쇠붙이가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음악가가 손을 뻗어 게일의 손을 잡으려고 한 순간.

    “어어……!”

    “조심해!”

    “피하세요!”

    ―콰과광!!

    기자들 틈에 드문드문 서 있던 높은 사다리가 인파에 밀려 게일 위로 엎어졌다.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짐짝처럼 쌓인 사람들 더미의 가장 밑에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바닥의 벽돌길 틈을 따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윽.”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검은 형체들이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하나둘씩 떨어져 나오는 동안 게일처럼 보이는 형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몇 분 흘렀을까, 쓰러진 사다리를 치우자 그곳엔 부서진 카메라와 머리가 짓이겨진 검은 형체가 있었다. 꿈틀거리던 그 몸은 이내 축 늘어졌고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피는 끝없이 흘러가 음악가의 구두에 닿았다.

    [현재 음악가의 정신력 : 0/100]

    모두가 숨을 죽인 끔찍한 풍경 위로, 그토록 기다렸던 상태창이 나타났다. 하지만 마냥 기쁘지가 않았다. 고개를 내려 음악가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눈에 띄게 손을 떨더니 이내 머리를 마구잡이로 쥐어뜯었다.

    “아, 아아, 아아아악!!”

    ―쨍그랑!

    음악가의 절규와 함께 주변 풍경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교육에서 느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진동이 온몸을 덮쳤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탁.

    “빛의 아이야, 괜찮느냐?”

    “칼, 리……!”

    칼리의 팔이 다행히 나를 받아 주었다. 꽝꽝거리며 울리는 머리를 겨우 돌려 주위를 살피자 동료들이 저마다 이 진동을 이겨내며 음악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 정신력은 전부 소모시켰어.’

    네 번째 교육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음악가의 정신은 결국 완전히 무너졌다. 녀석이 행복한 음악가에서 비탄의 음악가로 각성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걸 의미한다.

    “제기랄, 아침에 먹은 걸 전부 게워낼 것 같군……”

    “말 좀 하지 마… 대가리 울려.”

    “그 곱상한 얼굴에, 큿, 잘 어울리는 언동이구나.”

    건물 벽에 기대어 있던 레일리와 조슈아가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한진우 헌터는 자신의 무기인 '행운의 토끼발' 위로 엎어진 채 겨우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스는 칼리의 팔 하나에 몸을 완전히 맡긴 채 숨을 몰아쉬었다.

    ―사아악.

    풍경이 새하얗게 물들더니 이내 진동이 조금씩 멎기 시작했다. 뇌를 뒤흔드는 감각이 줄어들자 호흡이 편해졌다. 칼리의 팔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자아를 손에 쥐었다.

    ―끼기긱.

    ‘펜 긋는 소리…….’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 위를 긋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우릴 둘러싼 새하얀 풍경의 위쪽에서부터 오선지가 빼곡히 들어찼다.

    [교육 완료]

    [행복한 음악가는 배신감을 배웠습니다.]

    [음악가는 사랑과 믿음의 덧없음을 음악을 통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교육자님!]

    [행복한 음악가는 네 번째 수업 없이도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지도 편달에 감사드립니다.]

    ―끼기긱.

    불쾌한 감사 인사를 받는 동안 오선지 위로 음표가 빠르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잉크가 번지고 음표가 오선지 밖으로 튀어 나가도, 악보를 그리는 녀석의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다.

    [행복한 음악가는 이제 비탄의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드는 모든 곡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생겼습니다.]

    [진정한 음악가가 되었군요.]

    “다들 전투 준비해. 곧 시작할 것 같아.”

    “알겠다.”

    “알겠어요.”

    ―키이잉.

    모두에게 이야기한 후 녹두까지 소환했다.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서서 상황을 파악하는 듯했다.

    [“외지인에게 속아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게 만들었어.”]

    [비탄의 음악가는 제1악장, ‘이별’을 완성했습니다.]

    새하얀 공간 한 면에 어느새 악보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면에 음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내 바보 같은 오해로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도 접어야 했지.”]

    [비탄의 음악가는 제2악장, ‘좌절’을 완성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던 연인은 자신의 욕망으로 날 이용했고, 내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죽었어.”]

    [비탄의 음악가는 제3악장, ‘배신’을 완성했습니다.]

    ―끼이익.

    음악가가 3악장까지 완성했다는 안내가 나타나자마자 악보로 된 벽이 선물 상자 열리듯 사방으로 넘어갔다. 그제야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대 위, 정확히는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에 서 있었다. 관객석은 검은 형체들로 가득 차 있었고, 개체들 간의 경계가 불분명해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터벅, 터벅.

    무대 안쪽에서 연미복 차림의 음악가가 천천히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역시나 3층짜리 아파트는 족히 될만한 크기였다.

    [비탄의 음악가]

    [끔찍한 감정을 연주하며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존재]

    [현재 체력 : 500,000]

    그동안 만난 다른 보스 몬스터들에 비해 음악가의 체력은 거의 절반에 가까웠다. 곁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슬쩍 보자 모두 크게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녀석의 머리 위에 뜬 상태창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녀석을 한 번 더 살폈다.

    [창조자의 파편―음악가]

    [속성 없음]

    [끔찍한 감정을 연주하며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존재]

    [그의 연주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음악가가 연주 중인 곡의 악보를 찾아 노래를 부르면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악보를 찾아서 노래를 부르라고?’

    기묘한 공략 방법이다. 이 넓은 무대에서 악보를 찾아서 그 노래를 부르는 것까지 해야 한다니. 일단 이건 녀석의 방어력을 확인한 다음에 시도해 보는 걸로 하고, 문제는 그 앞 문장이다.

    정신을 지배한다, 즉 음악가가 정신계 스킬을 쓸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서 정신계 스킬에 면역이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녀석이 정말로 정신계 스킬을 쓰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것이다. 불리한 전투가 진행될 것 같은 예감에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다들 잠깐 집중해 줘.”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긍]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자마자 난 말을 덧붙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저 녀석 정신계 스킬을 쓸 것 같아.”

    “곤란하게 됐군.”

    ―쿵.

    아더의 방패와 메이스를 든 레일리가 얼굴을 구겼다.

    “한진우 헌터의 방어력을 최대로 높여 놓을게.”

    “네, 네?”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한진우 헌터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방어력이 높아졌으니 상대적으로 빠르게 스킬을 풀고 나올 거예요. 그럼 곧바로 저희를 쥐어패서라도 스킬을 해제해 주세요.”

    “보조계 스킬이라도 생기신 거예요?”

    “뭐, 비슷한 거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얼버무렸지만 한진우 헌터는 다행히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드르륵.

    음악가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할 준비를 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서둘러 업적 창을 열었다.

    [업적 적용 가능 생명체]

    [조슈아 체스터]

    [비스 바즈라차르야]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

    [한진우]

    조슈아, 비스, 그리고 레일리의 특성을 전부 활성화한 후, 한진우 헌터의 이름을 눌러 기본 수치와 특성을 확인했다.

    [한진우]

    [특성 ‘가호’ : 활성화 시 모든 상태 이상으로부터 강한 면역이 생긴다.]

    ‘이거다!’

    너무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한진우 헌터에겐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특성이 있었다. 곧바로 그의 특성을 활성화하고 방어력을 최대치로 올려놓았다.

    “욱.”

    전신을 덮친 기묘한 감각에 순간 토기가 올라왔지만 겨우 정신을 붙잡고 음악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녀석은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린 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관객이 숨을 죽입니다.]

    [천재 음악가의 첫 번째 공연이 시작됩니다.]

    ―쿵, 쿵, 쿵.

    그랜드 피아노의 뒤로 검은 덩어리가 떨어지더니 이내 악기를 든 사람들로 바뀌었다. 허전했던 무대는 어느새 완벽한 오케스트라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피아노 협주곡 1번 ‘비탄’ 제1악장, '이별'이 연주됩니다.]

    음악가가 피아노 건반을 누름과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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