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75화 (275/366)

275화

꿈을 좇기로 마음먹은 게일은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나왔다. 어떤 작품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미술관의 위치까지 묻는 탓에 거짓으로 대답하느라 애를 먹었다.

가끔 그의 자신감이 떨어질 때면 레일리를 통해 그의 작품을 비싼 값에 사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을엔 어느새 도예가가 수도로 나간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게일 녀석,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아직 약속 시간이 안 됐잖아. 좀 기다려 봐.”

그리고 지금, 레일리와 나는 전시회의 홍보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근처 레스토랑에서 게일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가장 구석 좌석에 자리를 잡은 후 이곳을 오가는 검은 형체들을 눈으로 쭉 훑었다.

‘확실히 눈에 띄기 시작했네.’

도예가와 수도에서 온 외지인들이 어울리고 있다, 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슬슬 우리에게도 주의가 끌렸다. 분명 음악가의 귀에도 들어갔을 텐데,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레일리,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전부 끝났다. 수도에 있는 신문사 다섯 곳의 주소를 전부 받아 놓았지.”

레일리는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며 씩 웃었다. 쪽지엔 주소처럼 보이는 문장이 휘갈겨져 있었다.

“그나저나 언론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간이 제법 커졌군.”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음악가를 정신적으로 몰려면 어쩔 수 없지.”

남은 교육 시간은 30시간 정도. 가장 빠르게 두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려면 마을의 소문으로는 부족하다. 수도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소란을 만들어야 한다.

‘이 작전이 성공만 한다면 음악가의 정신력을 전부 소모시킬 수도 있어.’

처음 여는 전시라서 홍보가 부족하다는 말로 게일을 걱정하게 만든 후, 음악가의 인지도를 이용하자고 제안한다. 게일은 분명히 거절하겠지. 그때 레일리와 밖에 대기하고 있는 한진우 헌터가 바람을 잡고 게일을 동요시킨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게일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자극적인 내용으로 보도 자료를 작성해 수도의 언론사에 보낸다. 그럼 기자들이 이 마을로 대거 유입될 것이고 음악가를 향한 좋지 못한 관심이 쏟아지겠지.

“네가 말한 그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아마 이 신문사가 좋을 것이다.”

레일리가 쪽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가장 마지막에 적은 신문사의 이름을 두드렸다.

“가십 스토커…? 이거 진짜 신문사 맞아?”

“사실 확인도 안 된 가십거리만 내보내는 싸구려 언론이지.”

“그런 데에 제보하면 사람들이 안 믿는 거 아냐?”

“하지만 여기 제보해야 제일 빨리 퍼질걸? 보도 윤리니 지침이니 아무것도 없으니까.”

시간이 없는 상황이니 일단은 레일리가 제안한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딸랑.

그때 게일의 형체가 불쑥 나타났다.

“아, 제이 씨!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괜찮아요. 일단 식사부터 시키시죠.”

‘완전 신났군.’

게일의 목소리는 개구장이 어린아이 같았다. 며칠 후 자신의 작품이 수도에 전시될 생각을 하니 하루하루가 행복한 모양이었다. 게일은 웨이터에게 음식을 주문한 후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 저희 구면이죠?”

그때 게일이 레일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레일리는 싱긋 웃으며 게일에게 악수를 청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레나 파커입니다. 수도에서 귀족들 상대로 이것저것 하고 있죠.”

“지금은 저를 도와서 게일 씨의 전시를 무사히 열 수 있도록 노력하고 계세요.”

“아! 게일 페이브입니다, 파커 씨!”

“레나라고 불러도 돼요.”

레일리는 게일과 가볍게 악수를 나눈 후 잔에 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눈동자를 슬쩍 굴려 나를 한번 보고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신호를 줬다.

“전시는 3일 후에 시작하는 걸로 확정되었습니다. 수도에 전시회에 대한 포스터를 뿌리긴 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제가 예상한 것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가 쉽지 않네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한껏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게일은 몸을 앞쪽으로 빼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곧 손을 입가로 가져왔다. 불안함에 손끝을 물어뜯는 듯했다.

“이 부분은 제가 조언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레일리가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 때문인지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 예술에 익숙한 사람들이에요. 특히 귀족들은 더 하죠. 웬만한 걸로는 눈에 차지도 않습니다.”

“제, 제 작품이 훌륭하다고 했잖아요! 그건 다 거짓말이었나요?!”

“그럴 리가요. 게일 씨의 작품은 수도에서 활동하는 웬만한 예술가들의 것보다도 높은 수준입니다.”

게일의 날 선 반응에도 레일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게일 씨의 유일한 약점은 사연이 없다는 거예요.”

“사연이요……?”

레일리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어갔다.

“똑같은 작품이 있다고 칩시다. 하나는 그냥 잘 만든 작품, 다른 하나는 연인으로부터 버림받고 사흘 밤낮을 울면서 만든 것. 어느 것이 더 흥미로우시죠?”

“…아무래도 후자겠죠. 왜 버림을 받은 건지,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그 작품을 만든 건지 궁금해지니까요.”

“역시 영리하시네요.”

레일리의 입가에 흡족한 듯한 미소가 걸렸다. 나는 레일리를 향해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레나 씨처럼 수도에서 여러 일을 해보신 분은 역시 다르네요.”

“별말씀을.”

“게일 씨, 혹시 사연이 될 만한 내용이 없을까요? 그러고 보니 연인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 수도를 엄청 싫어하신다는 분.”

“네? 아, 있긴 하죠…….”

게일의 목소리가 갑자기 기어 들어갔다. 게일은 자신에게 ‘한 때 수도에서 명망 있던 음악가의 연인’이라는 매력적인 사연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연을 판다는 것은 곧 음악가를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일이 망설이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연인 분께서 수도를 싫어하신다고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개, 개인적인 이야기라 대답해 드리기 어려워요.”

“흐음, 아쉽군요, 수도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일 것 같은데.”

레일리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동안 나는 게일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울상을 지었다.

“사연만 있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신문사에 보내 홍보를 부탁드릴 겁니다. 그럼 분명 많은 사람들이 몰릴 거예요.”

“그래도 걔를 이용하는 건 좀…….”

“이용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자 게일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감싸 쥐며 잔뜩 움츠러든 모습을 보여주다 곧 입을 열었다.

“수도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던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다시 수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할 순 없어요…….”

‘성공에 완전히 눈먼 것은 아니네.’

전시를 성공시킬 수 있다면 뭐든 할 것처럼 보였는데 아무래도 제 애인까지 이용하는 건 거북한 모양이었다. 레일리를 향해 슬쩍 눈길을 주자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본격적으로 바람잡이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뜻이었다.

―끼익.

레일리가 의자를 뒤로 살짝 뺀 후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마 창문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 한진우 헌터에게 신호를 주기 위함이겠지.

―딸랑.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에서 파는 모자를 눌러 쓴 한진우 헌터가 레스토랑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그는 우리 테이블에 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레일리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파커 씨, 잠깐…….”

“왜?”

한진우 헌터가 레일리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쾅!

그러자 레일리의 미간이 깊어졌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젠장, 그 애송이도 전시를 연다고?”

“수도에 이미 쫙 퍼졌어요. 포스터 양을 두 배로 늘려서 뿌리긴 했는데 아무래도 인지도 차이가 있다 보니…….”

“무, 무슨 일이에요?”

점점 험악해지는 레일리의 인상에 게일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레일리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한진우 헌터를 돌려보냈다. 그러곤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여 조용히 말을 꺼냈다.

“최근에 수도에서 주목받는 도예가 녀석 하나가 있습니다. 게일 씨를 의식한 건지, 녀석이 게일 씨의 전시회 날짜에 맞춰 전시를 다시 연다고 하네요.”

“네, 네?!”

“큰일이네요… 웬만한 걸로는 그 사람을 이기기 쉽지 않을 텐데.”

나까지 말을 얹자 게일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마음을 보여주듯 그의 형체가 촛불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렸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두 손은 불안함에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텁.

그 손을 내 손으로 덮자 게일이 고개를 퍼뜩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게일 씨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지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해야 할 때예요.”

“저는…….”

“더 큰 곳으로 나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번 전시회만 무사히 끝나면 게일 씨의 성공은 이미 보장된 거나 다름없어요.”

게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딱 한 번, 딱 한 번만 당신 연인의 힘을 빌려 봅시다.”

* * *

“가십 스토커… 아~ 광장 쪽에 있는 그 낡은 신문사 사무실 말씀하시는 거죠?”

“네. 언제쯤 도착할까요?”

“들를 곳이 따로 없어서 점심 이후에 도착할 거예요. 급한 거예요?”

―턱.

우체부 주머니에 지폐 몇 장을 더 찔러넣자 그가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점심 전까지 부탁드려요.”

“허허허… 나 원 별사람을 다 보겠네.”

―끼익.

그는 세워뒀던 자전거에 몸을 실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주신 성의를 봐서 지금 바로 수도로 갈게요!”

우체부는 빠른 속도로 내게서 멀어졌고 금방 점이 되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어제 저녁, 게일이 마지못해 내 제안을 수락하고 자신과 음악가의 관계, 그리고 음악가가 어쩌다 수도로부터 도망쳐 온 건지 전부 털어놓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고, 그동안 레일리는 자극적인 보도문을 썼다.

‘배은망덕한 음악가의 은밀한 3년', 이라는 싸구려 제목과 함께 음악가의 지난 세월을 전부 담은 내용이 수도를 향하고 있다. 있지도 않은 전시회 이야기는 가장 마지막에 한 줄 정도 추가되어 있을 것이다.

―쩌적.

“응?”

두 번째 교육 때처럼 이번에도 풍경 전체에 가로로 금이 갔다. 지금 내가 한 행동이 그의 정신력에 큰 영향을 미칠 거란 걸 보여주는 일종의 신호였다.

나를 둘러싼 풍경이 잘못 재생된 영상처럼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동안 우체부가 갔던 길을 따라 마차 여러 대가 행렬이 줄지어 들어왔다.

―탁.

마차에서 기자들이 내림과 동시에 세상은 다시 원래의 속도대로 흘러갔다.

“빨리 뒤져봐! 제보한 사람도 찾아보고!”

“나는 안쪽으로 갈게, 젠. 넌 마을 외곽으로 가!”

“음악가가 일하는 곳이 레스토랑이라고 하지 않았어?”

기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음악가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갑자기 밀려 들어온 외지인들의 홍수에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을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이제 끝이군.’

로브의 모자를 눌러쓰며 녀석이 무너져 내렸다는 상태창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치지직.

[현재 음악가의 정신력 : 30/100]

“…뭐?”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다르게 음악가는 이 상황을 잘 견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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