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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274화 (274/366)

274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도 되는 거 맞나?!’

연애는 무슨, 연애 상담조차 제대로 해 본 적 없다. 고작 만난 지 하루 된 사이인데 선을 넘은 건가 싶어 시간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 작업실 안을 흘긋 보자 게일은 생각에 잠긴 듯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인 오스틴이 방금 네 모습을 봤다면 단번에 남자 주인공으로 채택했을 거다.”

“깜짝이야……!”

그때 레일리가 갑자기 튀어나와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혹시라도 게일의 귀에 들어갔을까 싶어 그를 데리고 재빠르게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들키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왔어?”

“마을 외곽에서부터 정보를 모으려니 자연스럽게 여기를 들르게 됐다. 거기다 갑자기 내 이름이 들리는데 그냥 지나갈 수가 있나.”

“아, 좀 빌릴게.”

“하, 마음대로 해라.”

레일리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리저리 휘날리는 흰색 머리카락의 틈으로 시원하게 위를 향한 입꼬리가 보였다.

“그래서, 뭐 특별한 정보 있어?”

“특별한 정보라.”

레일리는 내 어깨에 둘렀던 팔을 거두며 말을 덧붙였다.

“아, 매일 오전 7시에 수도에서 우체부가 오더군. 수도에 가족이 있는 녀석들은 편지를 자주 보내는 것 같았다.”

“오전에 보내면 언제 도착해?”

“당일 저녁에는 무조건 도착한다. 우편량이 많지 않고 이 마을과 수도만 연결하는 우편이라서 그런가 봐.”

한국의 배달 시스템과 다를 바가 없는 배송 속도다. 그 정도 속도면 교육 시간 안에 수도에 무언가를 전달할 수도 있겠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지? 게일 녀석이 음악가를 너무 사랑해서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계획에 크게 차질이 생긴다.”

“조금만 더 설득하면 될 것 같아. 더 동요하게 만들면…….”

―탁.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갑자기 멈춰선 탓에 레일리가 한 발짝 앞선 채로 나를 돌아보았고 고개를 꺾어 말없이 의문을 나타냈다.

“레일리, 지금 게일 작업실로 다시 가줘.”

“그리고?”

“별거 안 해도 돼. 그냥 진열장에 있는 작품 칭찬 몇 마디 하고 수도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다는 식으로만 이야기해 줘.”

“단순하군. 그래도 확실히 녀석의 마음을 흔들긴 하겠네.”

게일은 나와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동요하고 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그의 작품을 칭찬하면 동요는 자기 확신으로 바뀔 것이다.

“네가 다녀간 다음에 조슈아도 보낼 거야. 그 정도면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체스터가 입 발린 말 하나는 끝내주게 하니 가능성 있을 거다.”

레일리가 나를 지나쳐 다시 게일의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동료 애송이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던데.”

“한진우 헌터가?”

“그래. 시장으로 정보 수집하러 간다고 했으니 지금쯤 그 주변에 있을 거다.”

“알겠어, 고마워!”

레일리를 향해 손을 흔든 후 광장을 가로질렀다. 시장에 접어들기도 전인데 사람들의 말소리로 소란스러웠다.

―툭.

“아, 죄송합니…….”

시장에서 나오던 사람과 어깨가 부딪쳐 사과하려 고개를 든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건 검은 형체가 아니라 까만 잉크로 그려진 악보였다.

“아이, 씨…”

음악가는 온갖 짜증을 내며 나를 지나쳐갔다. 날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태도에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고개를 돌려 음악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도에 있을 때보다 허름한 셔츠를 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내가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누군가와 부딪쳤다고 해서 대놓고 성질을 부리던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음악가는 내게 의문만 남긴 채 인파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나도 로브의 모자를 뒤집어쓰며 다시 시장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아, 한진우 헌터다.’

검은 형체들 사이에 분홍색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쪽으로 빠르게 발을 옮기자 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싱긋 웃어 보였다.

“어떻게 됐어요?”

“일단 거절당했어요. 음악가 핑계를 대더라고요.”

“네, 네……?!”

“근데 아마 마음을 돌릴 거예요. 여전히 동요하기도 했고, 제가 저녁에 다시 찾아갈 거라고 했거든요.”

“으음… 그렇군요.”

물건을 구경하는 시늉을 하는 한진우 헌터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저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레일리가 그렇게 말하던데.”

“아, 맞아요. 새롭게 알아낸 게 있어서요.”

한진우 헌터는 주변 눈치를 슬쩍 보더니 곧 시장 옆 좁은 골목길로 턱짓을 했다. 그의 뒤를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소란스러운 시장의 소음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졌다.

벽에 기댄 채 한진우 헌터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음악가의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성격이요?”

“네…….”

아까 내가 음악가와 마주쳤을 때 경험한 것과 묘하게 이어지는 것 같아 잠시 생각에 잠기자 한진우 헌터가 곧 말을 이어갔다.

“수도에 있을 땐 꽤 친절해 보였잖아요? 근데 지금은 예민해지고 괴팍해진 것 같더라고요.”

“괴팍이라…….”

음악가는 기본적으로 심성이 착한 존재였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수도에서 음악가로서 교육을 받는 동안에도 녀석은 성실하고 친절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방금 전 나와 어깨를 부딪혔을 때 보았던 그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사과라고는 전혀 모르는 태도였고 자신이 수도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연인의 예술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진우 헌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여기 오면서 음악가랑 마주쳤어요.”

“앗, 진짜요?!”

“어깨를 부딪혔는데 성질을 내고 가더라고요.”

“그럼 역시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요.”

한진우 헌터가 말을 덧붙였다.

“음악가가 마을에 처음 왔을 땐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해졌다고 해요. 비스 씨가 본 음악가의 최근 일기장도 상태가 영~ 맛이 간 것 같고요.”

“어땠는데요?”

“세상만사에 전부 불만을 갖고 있었어요. 음악이랑 애인 없었으면 진작 일 하나 쳤을 거라고 비스 씨가 얘기하셨어요.”

‘그래서 게일이 거절한 거군.’

음악가가 게일에게 어느 수준으로 집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꿈을 포기할 정도면 게일이 봐도 제 연인이 이상한 상태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는 거겠지.

“그나저나 게일이 음악가 때문에 거절했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아, 음악가가 수도를 너무 싫어해서 자기가 수도로 나가서 전시회를 하는 것조차 싫어한다고 했거든요.”

“으음, 평범한 연인 관계라면 서운해할 수도 있지만 음악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조금 다르게 들리네요.”

단순히 게일이 전시회를 위해 수도로 떠나는 것만으로 음악가가 배신감을 느낄 수 있을지가 미지수다. 게일이 음악가를 안심시켜 큰 갈등 없이 상황이 마무리된다면 계획은 완벽하게 실패할 것이다.

“…한진우 헌터는 어떨 때 배신감을 느껴요?”

“앗, 저요?”

도저히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 한진우 헌터에게 묻자 그는 말 꼬리를 늘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더니 곧 무언가 떠오른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전에 이런 일이 있긴 했어요.”

“어떤 거예요?”

“제가 데뷔한 지 2년쯤 되고, 한휘연이 한창 인기를 끌 때였어요.”

한휘연, 한진우 헌터의 사촌이자 인기 아이돌 멤버다. 한진우 헌터의 악몽에 들어갔을 때 이후로 그의 이름을 들을 기회가 없어, 그가 누군지 기억해내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저희 회사 사장님만 저희가 사촌지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호시탐탐 한휘연을 이용해서 저희 그룹을 띄워 보려고 했었어요.”

“힘들었겠네요.”

“힘들었죠. 기왕 이렇게 된 거 밝히는 게 어떻냐고 회유도 많이 하셨고요.”

한진우 헌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씩 웃곤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 제가 한휘연보다 더 뻔뻔하고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 인간을 이용해서 인지도를 끌어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 그럼 게일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음악가를 이용하게 만들자는 말씀이신 거예요?”

“네. 물론 그 방법은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하지만요, 헤헤…….”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다. 떠나는 것보다 더욱 확실하게 음악가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할 수 있고 그를 완전히 좌절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게일의 야망부터 자극해야 한다. 지금쯤 레일리가 게일의 작업실에 가서 한창 칭찬을 끝내고 왔을 테니 얼른 조슈아를 찾아서 그도 작업실로 보내야겠다.

엉망진창이었던 머릿속에 음악가를 무너트릴 밑그림이 천천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 * *

―타닥.

계단을 내려와 게일의 작업실 쪽으로 몸을 돌리니 앉아 있던 게일이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벌떡 일어났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네? 아, 그…….”

“생각이 바뀌셨나 보네요. 그쵸?”

굳이 해가 져가는 시간까지 밖에 앉아 있을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내가 웃으며 말을 걸자 게일은 망설이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다 곧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정말로 절 예술가로서 성공시켜 주실 건가요?”

“당연하죠. 게일 씨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레일리와 조슈아가 어떤 식으로 말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게일의 마음을 충분히 흔들었나 보다. 게일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곧 말을 덧붙였다.

“…그럼 할게요. 수도에서 전시회를 꼭 열고 싶어요.”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드릴게요.”

―탁.

악수를 청하자 그가 내 손을 맞잡았다. 단단하게 잡아오는 손에서 확신이 느껴졌다.

“연인은 설득해 보셨나요?”

“아니요. 따로 얘기하진 않았어요. 아하하…….”

게일은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머쓱한 듯 웃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제 꿈을 접진 않을 거예요. 제가 성공해서 이곳에 공연장이라도 하나 만들어 준다면 그 사람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분명 그럴 겁니다. 우리는 이제 게일 씨의 성공만 바라보며 갑시다.”

“좋아요!”

게일의 목소리가 잔뜩 들떴다. 뒷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듯 한결 홀가분한 목소리였다.

‘이제 남은 건 이 사람을 성공에 눈먼 사람으로 만드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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