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73화 (273/366)

273화

“…네?”

본인을 도예가라고 불러준 것에 엄청 기뻐하길래 바로 넘어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예가는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대놓고 위아래로 훑었다.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살피는 듯했다.

나는 목을 한번 가다듬은 후 바로 입을 열었다.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수도에서 작은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제이 프레데릭이에요.”

“…게일 페이브예요. 게일이라고 부르세요.”

이번엔 레일리의 성을 빌렸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게일은 우물쭈물하다 곧 내 손을 잡았다.

“수도에는 극장밖에 없었는데, 미술관도 있나 봐요?”

“과거엔 그랬죠. 최근엔 미술관도 몇 군데 열렸습니다.”

“신기하네요… 몇 년 사이에 많은 게 바뀌었구나.”

‘음악가를 만난 이후로는 수도에 가본 적이 없는 건가?’

게일의 대답을 찬찬히 곱씹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본론부터 말씀드리면 게일 씨의 작품을 저희 미술관에 전시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어떤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었는데요?”

“사실 이번이 저희의 첫 전시입니다.”

게일이 어깨를 흠칫 떨더니 문가에 기대어 서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그럼 제가 첫 번째 예술가가 되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흐음.”

첫 번째라는 말에 게일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하면서 느끼긴 했지만 게일은 예술가로서의 자긍심과 야망이 매우 큰 사람이다. 이 부분을 계속해서 공략하면 그가 음악가를 떠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고민하고 있는 게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여러 예술가를 만나 봤습니다. 하지만 제 기준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그 지역에서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들도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었죠.”

“제 작품은 다른가요?”

“네. 이런 분위기를 가진 작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나는 일부러 허리를 숙여 진열장 안의 도자기들을 더욱 꼼꼼히 눈에 담았다. 미술을 보는 눈이 없어 어떤 식으로 칭찬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최대한 있어 보이는 말들은 전부 꺼냈다.

“특히 이 항아리,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이 각도가 완벽하군요.”

“제일 공을 들인 것이긴 해요. 다른 사람 눈에도 근사하게 보였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건 진흙의 비율을 조절한 것인데…….”

게일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도자기를 빚는 데 사용한 기법과 도료를 어떻게 발랐는지까지 자세하게 이야기했고,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맞장구를 쳤다.

“일단 제안해 주셔서 감사해요. 만약 제가 받아들이면 저도 수도로 가는 건가요?”

“네. 경비는 저희 쪽에서 마련해 드리죠.”

“알겠어요. 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내일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내일 오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난 게일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며 그의 작업실을 떠났다. 등 뒤에서 키득대는 소리를 들으니 게일이 신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혼자서 방방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음악가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 자세한 계획을 짤 수 있겠네.’

―탁.

계단을 올라 광장을 가로지를 때쯤 붉은 벽돌로 된 건물들 사이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고 손이 튀어나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를 제외한 모두가 좁은 골목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늦었군, 지의.”

“생각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더라고. 덕분에 대충 어떤 사람인진 알아냈어.”

“그럼 신지의 헌터 이야기부터 듣죠!”

조슈아가 싱긋 웃으며 내게 발언권을 넘겼다.

“도예가 이름은 게일 페이브. 7살 때부터 도예를 배웠대. 자기 일에 엄청 자신이 있어 보였고 예술가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더라.”

“어떻게 접근했지?”

“미술관 관장이라고 했어. 첫 번째 전시를 함께 열고 싶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경계하다가 나중엔 마음을 열더라고.”

목소리를 한번 가다듬은 후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수도는 음악가를 만난 이후로 가본 적 없는 것 같았어. 알아낸 건 이게 전부고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어.”

“어떤 성격인지 대충 알겠네.”

비스가 말을 덧붙였다.

“나도 음악가를 찾았다. 상점가 주위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직원 겸 연주자로 일하고 있더군.”

“그 사람도 음악을 완전히 놓은 건 아니군요?”

“본인이 가진 재주가 그것밖에 없어서 그렇겠지.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바스락.

비스가 품 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우리를 향해 보여 주었다. 일기처럼 보이는 긴 줄글이었다.

“레스토랑 2층이 녀석의 방이길래 좀 뒤져봤다. 책장을 뒤져보니 일기장이 있었지.”

“대범하군. 그걸 대놓고 찢어 오다니.”

“꽤 전에 쓴 일기처럼 보이니 찢긴 줄도 모를 거다. 내용을 보니 쓴 시점은 수도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같았다.”

그는 일기 조각을 제 쪽으로 돌리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렌타 씨가 지니를 후원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필립을 찾아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분노한 그렌타 씨가 언론을 통해 나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결국 난 그곳으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렌타 씨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완전히 버려졌군.”

“그래도 괜찮다. 나의 유일한 관객, 나의 유일한 뮤즈, 게일을 만났으니까.”

비스가 다시 일기를 접더니 망토 안쪽에 넣었다. 그는 골목 밖의 눈치를 한번 본 후 말을 이어갔다.

“음악가랑 게일은 올해로 3년째 교제를 이어가고 있더군. 음악가가 이곳으로 온 이유도 게일의 고향이라서다.”

“그 일기장에 둘이 다툰 이야기는 없었나요?”

“딱히. 수도에 대한 강한 거부감 외에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뭐, 최근에 쓴 일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진우 헌터는 비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주먹을 말아 쥐어 턱 밑에 붙였다.

‘수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음악가와 성공을 위해서 수도로 나가려는 게일…….’

어쩌면 수도를 이용해서 두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아봐 줘서 고마워. 아, 여관은 찾았어?”

“네. 다행히 음악가가 일하고 있는 레스토랑 옆에 좋은 곳이 있었어요.”

조슈아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음악가랑 이 마을에 대해 조금 더 정보를 모으자. 그리고 내일 게일의 대답을 듣고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거야, 어때?”

“좋다. 나도 조금 더 조사해 보지.”

“그럼 일단 여관 쪽으로 안내할게요~”

한진우 헌터의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골목 밖으로 나왔다.

* * *

“그, 그러니까 지금 게일 씨 말씀은…”

“전시 못 할 것 같다고요… 아하하…….”

―탱그랑.

내 허무한 심정을 대변이라도 해주듯 옆에 있던 빵집에서 트레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빵집 주인이 허둥대며 정리하는 소리가 귀에 꽂히는 동안 나는 새하얘진 머릿속을 어떻게든 정리해 보려고 했다.

‘어제 그렇게 의욕적으로 나오더니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거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게일은 머쓱한 듯 머리를 벅벅 긁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연인이 있어요. 결혼도 생각하고 있고요.”

“…혹시 연인이 반대해서 그런 건가요?”

“반대한 건 아니에요! 그냥… 영 탐탁지 않아 보여서요.”

‘오히려 잘 됐다고 봐야 하나?’

수도가 두 사람의 갈등의 원인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이 점을 이용하는 게 정답일 확률이 높다. 두 사람의 사이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게일이 쉽게 자신의 꿈을 포기할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으니까.

난 울상을 지으며 온몸으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러자 게일이 몸을 흠칫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시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게일 씨의 재능을 더 큰 세상에 알려야죠.”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제 연인이 수도로 나가는 걸 정말로 좋아하지 않아요.”

“괜찮으시다면 어떤 이유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설득이 필요한 부분이라면 제가 대신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밖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고. 잠깐 들어오세요.”

―드르륵.

내 적극적인 태도에 게일이 잠시 망설이다 나를 작업실 안쪽으로 이끌었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자 가마 안의 장작이 타는 소리와 함께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게일이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

“제 연인은 수도에서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에요. 수도라는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 힘들어 하죠.”

“하지만 그분이 직접 가는 것도 아니고 게일 씨가 그곳에서 평생 살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거기서 평생 살고 싶어 할까 봐 두려워 해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음악가가 수도에서 얻은 트라우마가 깊었나 보다.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불안에 떨고 있으니 말이다. 게일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말하기 힘들어 하는 티를 내다 곧 말을 덧붙였다.

“걔도 알고 있거든요. 제가 더 큰 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요.”

“…그래서 포기하시는 거군요.”

“아하하, 우습죠? 하지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라서 그래요.”

그렌타와 마찬가지로 게일도 음악가를 매우 아끼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 보니 악보 위에 쓴 편지들이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얼핏 봐도 애정이 묻어나오는 편지였다.

하지만 결국 그렌타와 음악가도 갈라섰지. 이미 해 봐서 알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쌓고 쌓아서 두 사람의 사이에 균열을 충분히 일으킬 수 있다.

‘이제 와서 죄책감을 갖지는 말자.’

이 짓도 세 번쯤 하고 나니 조금씩 무뎌지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게일을 정면으로 쳐다 보았다.

“연인 분을 안 좋게 말하게 될 것 같아서, 미리 사과를 드립니다.”

“네, 네?”

“제가 게일 씨의 연인이라면 수도로 나가는 걸 오히려 응원했을 겁니다. 아무리 제가 수도를 싫어하더라도요.”

게일이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우물쭈물거렸다. 나는 기세를 몰아 말을 이어갔다.

“연인이라면 서로의 성공을 빌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연인이 무엇을 잘하고 원하는지 뻔히 알면서 자신의 욕심 때문에 붙잡아 두는 것, 저로선 이해가 잘 가지 않네요.”

“프레데릭 씨…….”

“전 게일 씨가 예술가로서 성공하길 바랍니다. 그 발판을 제가 꼭 마련해 드리고 싶고요.”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는 게일을 향해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오늘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다른 대답이었으면 좋겠네요.”

“프, 프레데릭 씨!”

―탁.

그대로 작업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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