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짹짹.
“아.”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동시에 맑은 공기가 피부 위로 훅 끼쳤다. 금세 돌아온 시야에 주위를 둘러보니 맨 처음 음악가를 만난 장소와 같은 시골 풍경이 수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흐음, 확실히 공기 좋네요. 경치도 근사하고.”
“놀러 왔냐?”
“이런 식으로라도 찝찝한 기분을 이겨내 보려는 거예요, 비스 씨.”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무사히 도착한 것 같았다. 내 옆으로 하나둘씩 다가오며 언덕 밑으로 펼쳐진 풍경을 둘러보았다.
잘 관리된 농장과 목장, 그리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끊이지 않는 시장까지. 방금까지 우리가 돌아다녔던 수도보다는 작았지만 오히려 활기가 더 넘치는 듯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면… 사랑을 배우고 정신력이 회복된 것 같죠?”
“쉽게 갈 줄 알았는데 귀찮게 됐군.”
한진우 헌터의 말에 레일리가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며 대답했다.
첫 번째 교육은 이별, 두 번째 교육은 좌절. 아직 두 개의 교육이 남았다. 두 번째 교육의 끝에 음악가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 다음 교육의 힌트가 되려나.
―치지직.
내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상태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세 번째 교육 목표 : 배신]
[사랑이 누군가의 삶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을 받는 교육자들의 생각은 어떨지 몰라도 행복한 음악가는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하군요.]
[행복한 음악가는 유일한 관객이었던 한 도예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음악가는 도예가가 사는 마을로 왔고 순탄하게 교제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부부의 연을 맺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분명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게 되겠죠.]
상태창은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다 곧 싸늘한 문장을 보여 주었다.
[영원한 사랑은 없습니다.]
[영영 꺼지지 않는 불이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그가 사랑으로부터 배신당하게 만들어 그에게 배신감을 가르쳐 주세요.]
[교육 시간 : 96시간]
[현재 음악가의 정신력 : 50]
‘사랑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해라…….’
뒤로 갈수록 교육 목표가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수도에서 좌절을 가르치는 데도 그렇게 많은 수고가 들었는데, 이젠 사랑까지 손을 대야 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예가가 바람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그때 레일리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상태창을 빤히 들여다보는 그가 보였다. 황금색 눈동자가 내 쪽으로 금세 넘어오더니 곧 말을 덧붙였다.
“사랑이 부질없다는 걸 느끼게 하려면 그 방법이 제일 잘 먹힐 것 같은데.”
“경험담인가요?”
“나를 두고 바람 필 정도로 간 큰 인간이라면 바람이고 뭐고 길드로 스카웃 했을 것이다. 그 배짱이면 못 할 일이 없겠군.”
조슈아와 레일리가 투닥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잠깐 생각에 빠졌다.
레일리의 방법이 가장 단순하고 명쾌하긴 하다. 바람 난 애인한테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조합으로 봤을 때 96시간 안에 도예가를 완전히 유혹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하미준 헌터의 존재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96시간은 무슨, 6시간 안에도 꼬실 수 있었을 텐데.’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잡념을 털어냈다.
“사기는 어떤가요? 자신이 좋아서 연인이 된 게 아니라 알고 보니 다른 목적이 있었단 걸 알게 되는 거죠.”
“나쁘지 않네. 그렌타와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것처럼 약간의 조작이 필요하겠어.”
조슈아의 제안에 수긍하니 그가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기를 치든 유혹을 하든 일단 마을 쪽으로 내려가자. 아, 비스, 혹시 돈 그대로 있어?”
“있다. 내려가면 묵을 곳부터 찾아야겠군.”
비스가 망토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슬쩍 세어보곤 다시 집어넣었다. 얼핏 봐도 넉넉하게 남아 있어 하늘을 지붕 삼아 잠들 일은 없어 보였다.
―터벅, 터벅.
비탈길을 따라 내려와 마을을 향했다. 정겨운 대화 소리와 코를 찌르는 고소한 빵 냄새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수도에서 온 앤틱 식기 보고 가세요!”
“아유, 더 싸게 안 되나?”
“우리도 손해 보면서 파는 거야.”
시장은 검은 형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들의 표정이 그려질 정도로 즐거워하는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누가 봐도 외지인인 우리를 흘긋 쳐다봤지만 이내 다시 자기 일에 집중했다.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지만 이만하면 양호한 수준이다.
“외지인 총각! 식기 안 필요해?”
“네, 네?! 아…….”
그릇을 파는 사람에게 잡힌 한진우 헌터가 화들짝 놀라더니 우리의 눈치를 살짝 본 후 곧바로 대답했다.
“필요할 것 같네요!”
“역시~ 그래, 많이 보고 가!”
‘뭘 할 셈이지?’
일단 한 발짝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진우 헌터는 정말로 쇼핑하는 사람처럼 그릇들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이 그릇들은 전부 직접 구우시는 건가요?”
“아, 우리가 굽는 건 아니고. 이 마을의 유일한 그릇장이에게 부탁하지.”
유일한 그릇장이, 그릇 가게 주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한진우 헌터의 주위를 배회하던 우리들의 눈이 일제히 가게 주인을 향했다.
“근데 걔는 우리가 그릇장이라고 부르면 엄청 싫어하더라? 자기는 도예가라고 얼마나 소리치는지 원~“
“아하하, 실력은 엄청 좋은 것 같은데요. 혹시 그분 작업실이 따로 있나요?”
“총각 되게 적극적이네.”
그릇 가게 주인은 진열대 앞쪽으로 몸을 쭉 빼더니 시장 밑을 향해 팔을 뻗었다.
“길 따라 내려가면 광장 지나서 빵집 하나 있거든? 바로 옆에 있는 초록 지붕 집이야!”
“감사합니다! 그릇은 다음에 사러 올게요.”
“또 와~”
한진우 헌터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바로 내 쪽으로 총총 걸어왔다. 그는 가게 주인을 흘긋 본 후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들으셨죠?”
“네. 아무래도 거기가 도예가의 집인 것 같네요.”
“진우 씨 순발력 좋으시네요~”
“아하하… 갑자기 생각이 났을 뿐이에요.”
조슈아의 칭찬에 한진우 헌터가 머쓱한 듯 고개를 돌렸다. 주위에 있던 비스와 레일리에게도 눈짓한 후 시장길을 따라 쭉 내려갔다.
광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에 다다르고 나서야 인파가 조금 줄어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 모두를 향해 이야기했다.
“둘로 찢어지자. 음악가랑 도예가를 따로 찾아보는 게 좋겠어.”
“동의한다.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아무래도 눈에 띌 테니 말이다.”
비스가 대답하자 이번엔 조슈아가 손을 들고 자신에게로 주의를 집중시켰다.
“혹시 이번에도 가짜 신분이 필요한가요?”
“모두가 위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우리가 직접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녀석은 도예가뿐이니까.”
“그럼 도예가랑 대화할 사람을 하나 정해서 그 사람만 위장하는 걸로 하자, 어때?”
내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한진우 헌터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역할은 수도의 미술관 관장이나 예술 계통의 전문가가 어떨까요? 아까 그릇 가게 사장님 말씀 들어보니까 예술가로 불리길 원하는 것 같더라고요.”
“전시회를 제안하는 척 다가가면 되겠네요. 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응. 나도.”
위장할 신분도 정해졌다, 이제 남은 건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다.
다들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며 누가 이 역할에 잘 어울릴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듯했다.
말솜씨만 보면 레일리와 조슈아가 제일 적합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바로 전 교육에서 얼굴이 어느 정도 알려졌다. 첫 번째 교육과 두 번째 교육 사이처럼 시간의 흐름이 길게 지난 것도 아니라서 지나가던 음악가가 그들을 보고 알아볼 가능성이 높다. 같은 이유로 한진우 헌터도 그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
신분이 전혀 노출되지 않은 건 비스였지만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얼추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들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것 같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만에 하나 지의가 음악가를 마주친다고 해도 쉽게 기억해 내진 못할 거다. 그래도 나름 조심할 필요는 있지.”
레일리가 팔짱을 낀 채 그릇 가게 주인이 가리켰던 방향 쪽으로 몸을 쭉 뺐다.
“도예가 녀석의 작업실은 지의 혼자 가는 걸로 하지. 비스가 은신 스킬로 음악가를 찾고, 나머지는 여관 위치와 다른 정보를 모으겠다.”
“알겠어.”
“그럼 1시간 후에 여기서 봐.”
비스가 그 말과 함께 모습을 감췄고 나도 광장을 가로질러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발을 돌렸다.
―타다닥.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갈수록 고소한 빵 냄새가 솔솔 났다. 계단에서 전부 내려오자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밭과 낮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빵집 옆 초록 지붕…….’
계단 바로 옆에는 오븐에서 빵을 구워내는 검은 형체가 있었다. 그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릇 가게 주인이 이야기한 대로 초록색 지붕의 집이 있었다.
그 앞으로 가 창문을 통해 안을 보자 검은 형체가 물레를 돌리며 그릇을 빚는 모습이 보였다.
‘저게 도예가군.’
이제 보니 집 주위에 있던 진열장 안엔 화려한 디자인의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릇 가게에서 봤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형태였다.
―끼이익.
그때 작업실의 문이 열렸다. 도예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서 오세요……?”
“아, 안녕하세요.”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는데 어색한 인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도예가가 움직일 때마다 앞치마처럼 보이는 검은 실루엣이 팔랑거렸다. 불편한 정적이 길어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이 작품들은 직접 만드신 건가요?”
“네, 네! 전부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이 마을의 유일한 도예가라고 들었는데 실력이 엄청나시네요.”
도예가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자 그는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더니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이곳의 유일한 도예가입니다! 일곱 살 때부터 배웠어요!”
“예술 활동을 엄청 오래하셨네요.”
“예술……! 네, 뭐 그렇죠!”
도예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투명하게 보였다. 자신을 예술가라고 불러주는 사람을 만나 잔뜩 신이 난 상태겠지.
‘알기 쉬워서 좋네.’
그가 원하는 건 예술가로서의 존중과 인정이다. 그리고 나의 위장된 신분이라면 그런 그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 있다.
나는 진열장에 놓인 도자기를 눈으로 훑은 후 도예가를 바라보며 또 한 번의 거짓을 뱉었다.
“혹시 저랑 전시회 여실 생각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