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71화 (271/366)
  • 271화

    ―끼익.

    “나중에 또 뵙죠, 레이첼 씨!”

    “즐거웠습니다, 필립 씨. 다음 만남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필립 가문의 공연장 문이 열리자 레일리가 검은 형체에게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내가 앉은 벤치 쪽으로 오더니 아무말없이 한 블록 떨어진 골목길로 턱짓을 했다.

    ―타닥.

    “으, 계속 웃고 있으려니 입꼬리에 경련이 올 것 같군.”

    극장으로부터 한참 떨어지고 나서야 레일리가 입을 열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선 후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 주변을 꾹꾹 눌렀다.

    “어떤 얘기 하고 왔어?”

    “그렌타가 네 동료인 그 애송이를 아주 마음에 들어한다고 얘기했다. 과장을 좀 보태서 이야기했지.”

    “반응은?”

    “필요 이상으로 놀라더군. 평소에 그렌타가 음악가 녀석을 엄청 아끼긴 했나 봐.”

    레일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방금까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무튼 그렌타가 음악가를 버리는 건 확실하니, 필립 쪽에서 그를 대신 거두라고 말했다. 불쌍한 음악가를 구해주는 멋진 그림이 연출될 거라고 했지.”

    레일리는 ‘멋진’에 힘을 주어 이야기하곤 씩 웃었다. 덕분에 그가 반어법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렌타와 음악가 사이에 균열은 확실하게 일어나겠네.’

    그렌타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가수를 후원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음악가는 분명 동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렌타 입장에선 자신이 후원하는 음악가가 라이벌 가문과 소통하고 있다는 걸 알고 불쾌해할 것이다.

    오해가 오해를 낳는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할 거라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조슈아와 그 애송이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아마 공연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외곽에 있는 공연장 하나를 빌렸다고 했거든.”

    “공연? 진심으로 할 생각인가?”

    “응. 음악가의 공연 시간과 똑같은 시간에 열 거래. 그렌타 쪽에서 후원을 받은 것처럼 소문을 낼 거고.”

    레일리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게 낫지. 누군가의 삶을 정육점 고기처럼 토막 내는 건 내 취향이 아니군.”

    나 역시 그의 말에 말없이 동의했다. 음악가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 때마다 녀석이 몬스터라는 것을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일단 나는 최대한 그렌타와 음악가가 어긋났다는 소문을 내 볼게. 넌 필립이 음악가에게 다가갈 수 있게 도와줘.”

    “공연 날이 되기 전까지 어떻게든 성공시켜 보겠다.”

    자신감을 보이는 레일리를 향해 웃어 보인 후, 남은 교육 시간을 보여주는 상태창으로 눈을 돌렸다.

    [남은 교육 시간 : 92시간]

    교육 시간은 거의 4일 정도 남았지만, 3일 후면 음악가의 첫 번째 공연이 열린다. 그 공연을 무조건 실패시켜야 이곳에서 녀석의 정신력을 많이 무너트릴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공격적으로 나와야겠어.’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골목 밖으로 나왔다.

    * * *

    “아, 저기, 저기요!”

    호텔 밖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 다급하게 내 앞을 가로막았다. 카메라처럼 보이는 것을 목에 멘 검은 형체는 숨을 헐떡이더니 이내 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기 시작했다.

    ‘또 기자인가…….’

    음악가의 공연을 하루 앞둔 지금, 신문엔 한진우 헌터에 대한 기사로 가득했다. 원래대로라면 음악가에게 가야 했을 스포트라이트가 전부 한진우 헌터를 향한 것이다.

    덕분에 한진우 헌터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알려진 조슈아는 물론, 그와 함께 다닌 내게도 기자들이 붙기 시작했다.

    “지니의 이번 공연이 그렌타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혹시 사실 확인을 요청해도 될까요?”

    “제가 관계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

    “며칠 전에 한 테이블에 같이 앉아 계시는 걸 봤는데, 정말로 모르시나요?”

    ‘이 기자는 다른 기자들보다 더 끈질기네.’

    오히려 잘 됐다. 한 번에 대답해 주면 의심을 받을 것 같아 한 번 거절한 건데 기자는 포기하지 않고 나를 물고 늘어졌다.

    나는 조금 고민하는 척을 하다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익명은 보장되는 것이죠?”

    “당연합니다.”

    “흠…….”

    숨을 들이마신 후 기자를 향해 속삭이듯 말을 시작했다.

    “그렌타 씨가 후원할 음악가를 고르는 기준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라고 하더라고요.”

    “으흠, 그렇군요…….”

    “지니가 그 기준에 충족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끝을 살짝 흐리자 기자가 수첩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소문이 돌 정도면 그렌타 씨가 지금 후원하고 있는 사람이 그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안 것 아닐까요?”

    “오오……!”

    “쉿.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에요.”

    “알, 알겠습니다!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자는 아까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곤 그대로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그가 내 시야 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 필립 가문이 운영하는 극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내 편협한 사족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뻔히 보인다. 음악가에 대한 거짓 논란이 생기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돌아설 것이다.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필립 가문의 손길은 유일한 구원처럼 보이겠지만 오히려 그렌타와 멀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겠지.

    ―탁.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나는 장면을 보러 가는 것이고.’

    필립 가문의 극장 옆 건물의 골목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모든 것이 우리의 계획대로 돌아간다면 광장과 연결된 계단에서는 조슈아와 그렌타가, 그리고 극장 안에선 필립과 음악가가 나올 것이다. 두 그룹이 마주친 그 순간, 두 사람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니까 잘 생각해봐. 응? 자네한테도 좋은 제안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그때 극장 밖으로 필립과 음악가가 나왔다. 음악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고민하는 듯했고 분위기를 탄 필립이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외지에서 온 그 오페라 가수 알지?”

    “저랑 같은 날에 공연을 올리는 그 가수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그 외곽의 세라 극장에서 공연을 올리기로 했는데 그 자금을 그렌타가 대줬다는 소문이 있어.”

    “…소문일 뿐이잖아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나. 어떤 형태로든 그렌타의 자본이 투입됐을 거야.”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눈덩이처럼 커져 하나의 사실이 되었다. 음악가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검은 잉크로 그려진 오선이 밑으로 번지고 불안하게 떨렸다. 마치 그의 감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다.

    “여전히 오페라를 포기하지 못한 거야. 이번만 그러겠나? 아마 다른 오페라 가수가 또다시 그렌타의 마음을 흔들 걸세.”

    “하아…….”

    “그러니까 한번 내 극장에서…….”

    “자네 지금 뭐하는 겐가!”

    중년의 목소리가 극장 앞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음악가와 필립이 몸을 파르르 떨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조슈아와 그렌타가 있었다.

    “타이밍이 제대로 맞았군.”

    “깜짝이야……!”

    등 뒤에서 들린 비스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다행히 골목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나 보다. 고개를 돌리자 비스가 팔짱을 낀 채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네가 오기 전부터 계속 여기 있었다. 만에 하나둘이 만나지 못하면 그렌타의 지갑이라도 훔쳐 이쪽으로 데려오려고 했다.”

    “그 방법을 안 써도 돼서 다행이네…….”

    다시 그렌타와 음악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어째서 자네가 필립이랑……!”

    “그, 그렌타 씨야말로 왜 저 인간이랑 같이 있는 거죠?”

    “뭘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해일세. 나는 그의 사업에 관심이…….”

    “역시 그 오페라 가수를 후원하고 계신 거죠?!”

    음악가가 소리를 꽥 질렀다. 이미 상처를 입은 그의 마음은 그렌타의 해명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그의 태도에 그렌타 역시 속이 뒤집혔는지 손가락으로 음악가를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그 가수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졌기로서니, 필립과 함께 공연을 논의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이건 배신이야!”

    “배신은 그렌타 씨가 먼저 하셨습니다! 어떻게 저의 첫 공연과 같은 날짜에 진행하는 다른 공연에 후원을 하실 수가 있어요?!”

    “뭐?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와선…….”

    그렌타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리곤 손사래를 쳤다.

    “이제 됐네. 자네와 나의 관계는 이걸로 끝이야. 한번 필립의 후원으로 얼마나 훌륭한 음악가가 되는지 지켜보겠네.”

    ―쩌저적.

    ‘응?’

    그렌타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은 그 순간 우리를 둘러싼 풍경 전체에 금이 갔다.

    [현재 음악가의 정신력 : 45/100]

    “…어?”

    음악가가 그 자리에 선 채로 멀어져 가는 그렌타를 바라보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봤지만 그에게 닿을 리는 만무했고 그럴수록 오히려 주변 풍경이 크게 일그러졌다.

    ―쨍그랑!

    그의 정신이 엉망진창이 된 것을 보여주듯 풍경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면서 동시에 새카만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가장 많이 일그러진 것은 음악가 자신이었다.

    녀석의 몸은 스프링처럼 길어지다 줄어들기를 반복했고 머리를 대신한 악보집은 쉴 새 없이 팔랑거렸다. 단순히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느낀 좌절과 허무함이 느껴졌다.

    ―탁.

    머리가 살짝 지끈거릴 때쯤 두 발이 땅에 닿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텅 빈 공연장 객석의 한가운데였고 나를 제외한 다른 동료들도 모두 같은 장소에 소환된 상태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곳이 음악가의 공연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관객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말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성공한 것 같군.”

    그때 비스가 말을 걸었다. 무대 위에서 멍하니 피아노를 내려다보고 있는 음악가의 눈엔 다행히 우리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

    음악가는 선 채로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하고 삐걱거리며 이어지던 연주는 이내 연주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졌고 그의 오열이 함께 섞였다.

    [교육 완료]

    [행복한 음악가는 좌절을 배웠습니다.]

    [음악가는 암담한 미래로 인한 좌절을 음악을 통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정신력을 중간에 많이 깎아놓으면 시간을 뛰어넘기도 하는군.’

    상태창에서 음악가 쪽으로 시선을 다시 옮겼다. 녀석은 피아노 앞에 주저앉은 채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등은 쉴 새 없이 들썩거렸고 악보에선 검은 잉크가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쿵.

    그때였다. 갑자기 공연장의 문이 열리고 검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는 동안 실루엣은 무대 위의 음악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공연 끝났나요?”

    [현재 음악가의 정신력 : 50/100]

    ‘정신력이 올라갔어……!’

    실루엣의 목소리를 들은 음악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행복한 음악가는 사랑도 배웠습니다.]

    둘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그의 성장이 기대됩니다.]

    [다음 교육을 시작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