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70화 (270/366)

270화

그렌타를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은 몰랐다. 그는 음악가 없이 혼자서 술을 즐기고 있었고, 이따금 무대를 흘긋 보며 생각에 잠긴 것처럼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지금이 기회다.’

고개를 돌려 조슈아에게 다시 신호를 주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나가던 직원을 붙잡고 무언가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달그락.

“주문하신 깔루아 밀크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렌타를 관찰하느라 대충 아무거나 시켰더니 달달한 향이 나는 술이 나왔다. 난 의자를 그렌타의 테이블 쪽으로 조금 끌어당긴 후 그를 곁눈으로 볼 수 있는 각도로 고개를 살짝 꺾었다.

―찰그랑.

그때 직원이 각진 양주병을 들고 그렌타의 테이블을 향했다. 그러자 그렌타는 양주병과 직원을 번갈아 보다 곧 말문을 텄다.

“음? 이건 내가 주문한 게 아닐세.”

“저 테이블의 신사분께서 보내주신 겁니다.”

“저 붉은 머리 청년 말인가?”

그렌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조슈아의 테이블이었다. 조슈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로 빈 유리잔을 들고 그렌타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더니 이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해리 반 그렌타 씨 맞으시죠?”

“맞네만… 자네는?”

“만나서 반갑습니다. 조쉬 에드밀라라고 합니다. 대화를 잠깐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청산유수구만.’

조슈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더니 곧 그렌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들은 조슈아가 산 양주를 나누어 마시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가다 본격적으로 사업 관련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었다.

“사실 저도 언젠가 그렌타 씨처럼 젊은 예술가들을 육성하는 자선 사업을 해 보고 싶어요.”

“하하하, 지금은 예술가들로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이니 그럴 여유가 없겠군.”

“그러고 보니 이번에 후원하시는 분은 피아니스트라고 하셨죠?”

“오늘은 피아니스트, 내일은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그다음 날은 플루티스트가 되는 청년이지.”

그렌타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그의 빈 잔에 술을 한 번 더 따르며 말을 덧붙였다.

“악기를 굉장히 잘 다루나 봐요?”

“그는 천재일세. 순수하고 성실한 영혼을 가지기도 했고.”

그는 음악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웃음이 나는 건지 말을 마치곤 낮게 웃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렌타의 목소리에서 그의 애정이 느껴지다 못해 철철 흘러넘쳤다.

‘유대 관계가 꽤 깊은가 본데.’

좀처럼 틈이 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렌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시선을 돌려 그렌타를 흘긋 바라보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에, 제이 씨!”

“으, 응?”

그때 조슈아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악수를 하듯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그의 손을 잡고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바람잡이 좀 해주세요.”

“아, 알겠어.”

조슈아도 저 혼자로는 그렌타와 음악가 사이를 파고들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끌어들였다. 그렌타가 나를 보기 전에 웃는 얼굴로 표정을 가다듬은 후 조슈아의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조쉬 씨! 잘 지내셨죠?”

“그럼요. 아, 이런.”

조슈아는 그렌타 쪽으로 몸을 돌려 살짝 허리를 숙이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반가워서 그만 그렌타 씨께 실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나저나 자네는 누구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군.”

“음악 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제이… 체스터입니다.”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조슈아 체스터’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당황]

영어 성이 안 떠올라서 조슈아의 것을 빌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금세 당황한 기색을 지우곤 나를 소개하듯 펼친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제이 씨는 근교에서 음악을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모아 음악 학교를 세우신 분이에요. 그렌타 씨와 많이 닮았죠?”

“호오… 그렇군. 괜찮다면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네만.”

“영광입니다.”

그렌타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달그락.

이미 술을 몇 잔 마신 상태인지 술병이 반쯤 비어 있었고 잔 안에 든 얼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자네는… 어떤 마음으로 음악가들을 육성하고 있나?”

그렌타가 어눌해진 발음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면접관 같은 그의 태도에 조금 당황했지만 최대한 머리를 굴려 그가 듣고 싶어 할 것 같은 대답을 골랐다.

“잠재력이 있는 아이들의 재능을 피워 주겠다는 생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흐음…….”

“이번에 후원하고 계시는 그 음악가도 잠재력을 보고 데려오신 것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 그 아이는 사실 내게 있어 도박이나 마찬가지일세.”

―달그락.

그렌타가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 아이는 노래보다는 악기를 더 잘 다루는 녀석이고, 제대로 된 교육도 나를 만나고 나서야 받기 시작했으니까.”

‘역시 자기 선택에 확신이 없었군.’

술이 들어가니 그렌타의 본심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음악가를 강하게 신뢰하고 있다고 해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선택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슈아도 술로 목을 축이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이해합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셨겠죠. 저도 오페라 가수 한 명을 데려왔는데 옳은 선택이었는지 매 순간마다 고민한답니다.”

“자네랑 같이 앉아 있던 저 남자 말인가?”

“네. 실력, 인성, 용모까지 갖추긴 했지만 그가 이 시장에서 살아남을지 말지는 직접 부딪혀 봐야 아는 것이지 않습니까?”

조슈아는 난처하다는 듯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그렌타는 혼자 앉아 있는 한진우 헌터를 빤히 바라보다 다시 조슈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저 청년의 노래를 한번 들어보는 게 어떻겠나?”

“앗, 그래도 될까요?”

“그럼. 내 부탁이면 오너도 기꺼이 무대를 내어줄 걸세. 잠깐 다녀오지.”

―드르륵.

그렌타는 비틀거리더니 금세 중심을 잡곤 바텐더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목소리를 낮춰 조슈아에게 말을 걸었다.

“한진우 헌터의 실력만으로는 그렌타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긴 어려울 거야.”

“알아요. 어디까지나 이건 중간 단계에 불과하니까요.”

“그렌타가 음악가를 오해하고 그를 버리게 만들 또 다른 장치가 필요해.”

조슈아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로 돌아온 그렌타를 보며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말해놨네. 조쉬, 어서 가서 저 청년에게 무대를 준비하라고 하게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허허허, 젊은 친구가 말은 참 잘하는군.”

조슈아는 그대로 한진우 헌터 쪽으로 가 말을 전했다. 이미 무대가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부터 자신이 노래를 부르게 될 거란 걸 알았는지 한진우 헌터는 크게 놀라진 않았다.

나는 다시 그렌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대화의 문을 열었다.

“그렌타 씨는 어떤 기준으로 예술가들을 뽑으시나요?”

“기준이라…….”

그렌타가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잠시 고민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감사함을 아는 마음 가짐인 것 같군.”

“둘 다 중요하죠.”

“특히 후자가 정말 중요하네. 단순히 후원자에 대한 감사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들으러 와준 관객과 음악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환경에 대한 감사함을 느껴야 하니 말일세.”

―탁.

그때, 구석에 있던 무대 위로 조명이 들어왔다. 바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무대를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슈아가 마이크 앞에 섰다.

“행복한 저녁입니다, 여러분. 저는 조쉬 에드밀라, 작은 극단을 운영 중인 사업가입니다.”

사람들은 식사를 잠시 멈추고 조슈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그들의 시선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곤 말을 이어갔다.

“오늘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 가수가 있어서 이렇게 무대에 올라오게 되었는데요. 바로 ‘지니’입니다.”

한진우 헌터가 무대 위로 올라오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간간히 그의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 들려오는 동안 한진우 헌터는 아무렇지 않게 마이크를 조정했다.

“지니는 저희 극단에 소속된 유일한 가수입니다. 본격적인 활동에 앞서 여러분들에게 처음으로 무대를 선보이겠습니다.”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검은 형체가 무대 옆에 있던 낡은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그가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린 후 한진우 헌터에게 눈으로 신호를 주었다.

―♬♪♩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성악곡의 반주가 흘러나오고 한진우 헌터가 그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고운 미성이 바 안에 울려 퍼지자 그의 실력을 의심하던 사람들의 눈이 하나둘씩 바뀌었다.

일반적인 가요 창법에 가까웠지만 듣기 편안한 음색이었다. 관객들과 시선을 맞추며 노래하는 한진우 헌터를 보며 나도 모르게 음악을 따라 몸을 흔들었다.

“예상 밖이군…….”

그렌타가 한진우 헌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지금쯤 동요하고 있으려나.’

술 기운 때문에 감정이 요동치는 상태에서 한진우 헌터의 노래까지 듣고 있으니 아마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한진우 헌터의 등장으로 그렌타의 마음을 약간 흔들어 놓았으니 다음 차례는 음악가다. 그렌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녀석도 동요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신뢰 관계에 균열을 생길지도 모른다.

한진우 헌터의 노랫소리와 함께 이곳에서의 두 번째 밤이 저물어갔다.

* * *

한진우 헌터에 대한 소문은 광장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한 외지인의 극단에 소속된 가수가 엄청난 공연을 보여 주었고, 그 공연을 본 그렌타가 기립 박수를 쳤다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이 음악가 녀석에게까지 제대로 전달이 됐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안 그런가?”

“그래. 기왕이면 왜곡된 상태로 퍼졌으면 좋겠네.”

레일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시장을 관통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그렌타 가문의 라이벌인 필립 가문의 극장이었다. 이 극장 역시 게시판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이젠 레일리의 역할이 중요해.’

레일리는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돈 많은 사업가 행세를 하며 수도에 있는 모든 극장을 돌아다녔다. 극장 주인들은 투자라도 얻어낼까 싶어 모두 레일리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 애썼다고 했다.

즉, 레일리의 입김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의 네 말대로 일단 이곳에 왔는데, 내가 뭘 하면 되지?”

“필립 가문이 이 공연장에서 음악가의 공연을 올리도록 설득해줘.”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레일리가 고개를 꺾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음악가가 필립 가문의 제안을 덥썩 물진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렌타가 다른 음악가를 찾고 있다는 식의 소문이 녀석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 혼자 오해한 음악가가 필립 쪽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얘기군.”

“맞아.”

[발언 결과 : 이해]

레일리는 그제서야 내 의도를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그나마 단정해 보이도록 했다.

“알겠다. 그 필립이라는 녀석을 제대로 설득해 보지.”

“응. 믿고 있을게.”

레일리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필립 가문이 운영하는 극장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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