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69화 (269/366)
  • 269화

    ‘생각보다 꽤 크게 붙어 있네.’

    행복한 음악가의 공연 포스터는 커다란 게시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연장을 오가는 사람이라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을 만큼 크게 걸려 있었고, 공연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게시판 앞을 서성거렸다.

    포스터 속의 행복한 음악가는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고개를 한쪽으로 꺾고 있었다. 연주에 완전히 심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렌타가 이번엔 이 청년을 키울 건가 봐.”

    “기대되네. 공연 날은 언제야?”

    “어디 보자, 5일 후네.”

    포스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니 음악가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음악가는 수도로 올라온 후 ‘그렌타’라고 하는 한 귀족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렌타 가문은 음악을 사랑하기로 유명한 가문이라, 매년 젊은 음악가를 육성한다고 했다. 그렌타 가문의 후원은 음악가에게 있어 성공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는 듯했고, 덕분에 음악가는 짧은 커리어를 가졌음에도 단독 연주회를 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후원을 끊고 공연을 취소시키면 크게 좌절하겠지.’

    5일 안에 그 일을 무조건 성공시켜야 한다. 나는 포스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를 나는 사람들의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저 음악가가 실력이 좋은가 봐요? 그렌타 가문의 후원을 다 받고.”

    “소문에 의하면 처음 보는 악기도 척척 잘 다룬다고 하더라고요.”

    중절모를 쓴 검은 형체가 대답하자 그 옆에 있던 다른 형체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사연이 딱해요. 산불 때문에 마을이 전소됐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그래서 더 눈에 띄는 것도 있죠. 사실 그렌타는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집안에서 음악 교육을 받은 청년들을 데려오던 사람들이니까요.”

    우리의 학살은 산불로 포장이 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진 모양이었다. 음악가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였을 텐데 사람들은 그것마저 음악가를 돋보이게 하는 어떤 사연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속이 영 불편했다.

    “혹시 그 그렌타 쪽 사람과 만날 방법이 없을까요?”

    “어엉? 그렌타를 만나고 싶다고요?”

    “네. 사실 제가 음악 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거든요.”

    “흐음…….”

    자리를 뜨려는 형체를 붙잡고 다시 말을 걸었다. 미소 띤 얼굴로 다가가자 형체는 고민하는 듯 잠시 말꼬리를 늘리더니 곧 공연장 옆에 있던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초록색 캐노피가 있는 건물 보이시죠?”

    “아, 네.”

    “그렌타의 차기 가주가 자주 가는 바예요. 이틀에 한 번은 꼭 간다고 들었어요. 엄청난 주당이라고 하더라고요.”

    형체는 가리킨 손을 거둬 자신의 모자를 고쳐 쓰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렌타의 저택은 근교에 있어서 많이 멀기도 하고, 그쪽이 간다고 해서 무조건 만나준다는 보장도 없거든요.”

    “차라리 저기서 기다리는 게 만날 확률이 더 높다는 거죠?”

    ―끼이익.

    그때 공연장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형체는 문 쪽을 흘긋 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이제 저도 들어가야겠네요.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렌타랑 잘 만났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알았네요.”

    중절모를 쓴 검은 형체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그도 모자를 벗으며 내게 인사하더니 그대로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타닥.

    나는 바로 그가 가리켰던 바를 향해 걸어갔다. 대낮이라 열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미 바 내부엔 몇 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이자 직원인 것 같은 검은 형체가 내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한 분이신가요?”

    “네.”

    “테라스 석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캐노피가 있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는 능숙하게 내 컵에 물을 따라준 후 메뉴판을 내밀었다. 먹으러 온 게 아니므로 가장 첫 페이지에 있던 아무 메뉴를 가리키며 주문을 끝냈다.

    ‘아직 그렌타랑 마주치기엔 이른 시간인가.’

    엄청난 주당이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낮보다는 저녁쯤에 올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주변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딸랑.

    가게의 문이 열리자 방울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졌다.

    “어서 오… 어라?”

    “안녕하세요.”

    “오냐, 어서 오거라. 그렌타 씨 식사 가지러 온 거지?”

    ‘그렌타?!’

    나는 대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게에 드문드문 세워진 기둥 사이로 검은 형체 대신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악보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음악가의 등장에 나는 로브 모자를 뒤집어쓴 후 재빨리 얼굴을 가렸다. 성인이 된 음악가는 자신이 어렸을 적 만났던 내가 음악 학교 교사가 아니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녀석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면 녀석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

    “네. 스테이크 샌드위치랑 오이 피클이요.”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녀석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린 채로 이야기에 집중했다. 얼핏 들어보니 그렌타의 심부름으로 이 가게에 온 듯했다.

    “공연 준비는 어떻게 잘 되어가?”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걱정이 더 크네요.”

    “그게 당연하지. 인생 첫 공연 아니냐.”

    직원은 그렇게 말하곤 낮게 웃었다.

    “게다가 이번엔 그렌타 씨가 처음으로 오페라를 포기했지. 그게 자네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으… 오히려 부담이 더 커지는데요.”

    “네 자신을 좀 더 믿도록 해!”

    ―달그락.

    그때 내 테이블 위에 팬케이크가 든 접시가 놓였다. 그들의 대화에 완전히 집중해 있던 터라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고 바로 고개를 들어 음식을 가져다준 직원을 바라보았다.

    “시, 식사 맛있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만약 저 형체에 얼굴이 있었다면 아마 나를 비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게서 멀어진 후 어깨까지 떠는 걸 보니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사람 그 포스터에 있던 사람이지?”

    “앗, 진짜다. 식사하러 왔나?”

    다른 테이블에 있던 형체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음악가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음악가는 그저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마침 포장이 끝났군. 가져가라.”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오늘 저녁에 그렌타 씨가 방문하실 거예요.”

    “그래? 로스트 비프를 준비해 놔야겠네.”

    중요한 정보가 귀에 꽂혔다. 곁눈질로 직원과 음악가를 슬쩍 보며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봬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딸랑.

    대화는 시시한 인사로 끝났다. 하지만 공연장 앞에서 들었던 대화부터 지금 이 이야기까지 종합해 보았을 때 그렌타에 대한 정보가 제법 많이 쌓였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몰래 꺼내 테이블 밑으로 손을 숨긴 후 메모장을 켰다.

    [귀족]

    [젊은 예술가 육성]

    [그동안 오페라 가수들만 후원했었음]

    [어느 정도 사는 집 애들만 교육했었음]

    전부 적고 나서 머릿속으로 생각을 한 번 정리했다.

    그렌타가 음악가를 후원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음악가는 오페라 가수도 아니고 좋은 환경에서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렌타는 음악가를 후원했고 이로 인해 생각보다 큰 관심이 음악가를 향했다.

    ‘이 관심을 완전히 끊기게 하려면, 역시 한진우 헌터가 나서야겠지.’

    오페라 가수만큼은 아니지만 메인 보컬로 활동했으니 음악가보다는 노래를 잘 부를 것이다. 오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렌타가 한진우 헌터의 노래를 듣고 무대에 세우는 걸로 결정하면 음악가에게 배신감과 좌절을 동시에 줄 수 있다.

    ―달그락.

    테이블에 올려진 팬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이 사르르 녹아 순식간에 없어졌다. 달콤한 맛이 혀를 통해 전해지자 머리에 피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 * *

    ―또각.

    “오.”

    양복점에서 나온 한진우 헌터와 조슈아를 보자마자 감탄이 터져 나왔다. 조슈아는 전통적인 양복을 입고 있어 젊은 사업가처럼 보였다. 반면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한진우 헌터는 과장 조금 보태서 조슈아보다 10살은 어려 보였다.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사업가와 가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때요? 서부극에 나오는 사업가 같지 않나요?”

    “그게 뭔진 잘 모르겠지만 사업가처럼 보이긴 해. 아, 한진우 헌터도 엄청 잘 어울려요.”

    “꼭 무대 의상을 입은 것 같아요…….”

    한진우 헌터는 하늘하늘한 소매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누가 그렌타인지는 바로 알 수 있겠죠?”

    한참 그렌타의 단골 바를 향해 가던 중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대화 몇 번 하다 보면 알겠지. 나도 같이 갈 거니까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든든하네요.”

    조슈아의 사람 좋은 얼굴을 뒤로 한 채 광장 쪽으로 나왔다. 밖에서 얼핏 본 바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마침 공연이 끝나는 시간과 겹쳤는지 공연장에서도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낮에는 휑했던 광장이 오히려 밤에는 생기를 띄고 있어 조금은 낯설고도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양복점에서 바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가게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만 움직여 이야기했다.

    “가게 안에선 모르는 사이야. 알았지?”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시죠.”

    그들의 대답을 들은 후 바 안으로 먼저 발을 들였다.

    ―딸랑.

    직원의 안내와 함께 바 테이블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들어온 한진우 헌터와 조슈아도 테라스 자리 주변에 앉은 후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응?’

    가게 안을 살피다 보니 낮에는 보이지 않았던 작은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가게 구석에 있는 그 무대엔 나름 스탠딩 마이크까지 있어 노래를 들려 주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한진우 헌터와 조슈아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자 그들과 시선이 맞닿았다. 대충 눈짓으로 무대를 가리키자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시 가게 안의 검은 형체들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렌타’라는 이름이 귀에 들릴 때까지 물만 홀짝이며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거 그렌타 씨 테이블에 갖다 놔.”

    “네~”

    그때였다. 내 맞은편에서 술을 섞던 바텐더가 직원에게 술잔을 건네며 이야기했고, 직원은 그것을 들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쭉 옮기자 무대 바로 앞 테이블에 다다랐다. 망토를 두른 검은 형체가 혼자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렌타 씨, 주문하신 마티니 나왔습니다.”

    “고맙네. 이게 얼마나 마시고 싶었던지.”

    틀림없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형체가 음악가의 후원자이자 우리가 공략해야 하는 대상, 그렌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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