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68화 (268/366)

268화

다음 교육을 시작한다는 상태창과 함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떤 장소일지 몰라서 녹두의 소환을 해제한 후 착지하자 얼굴 위로 바람이 훅 끼쳤다.

―툭.

“아, 죄송합니다.”

누군가 나와 부딪혀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음악가가 살았던 시골과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잘 닦인 타일 길을 따라 제법 높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묘하게 옛날 의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에겐 관심도 없는지 앞만 보고 갈 길을 갔다.

전형적인 도시의 풍경이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수도라는 걸 알아차렸다.

―탁.

그때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곧바로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확인하자 황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쉿, 일단 골목으로 이동하지. 아무래도 우리의 모습이 좀 눈에 띄어서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다 저쪽에 있다.”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이곳에 소환됐나 보다. 레일리는 나를 이끌고 양복점이 있는 건물 옆 골목으로 발을 옮겼다.

―끼익.

골목 초입에 있던 철문을 걸어 잠근 후 안쪽으로 들어가자 동료들이 벽에 기대어 선 채로 우릴 맞이했다.

‘벌써 지쳐 보이네.’

체력적으로 크게 힘이 들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신 마을 하나를 무자비하게 날린 것에 대한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고 있겠지.

그들이 안쓰러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미소를 짓는 걸로 위로를 대신했다. 그들도 내 미소의 뜻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여기가 수도인 것 같죠?”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이곳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음악가를 찾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군.”

비스가 인상을 구기며 한진우 헌터의 말에 대답했다.

―치지직.

우리가 한곳에 모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 번째 교육을 알리는 상태창이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두 번째 교육 목표 : 좌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나 봅니다.]

[음악가는 어느새 마을 사람들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정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분명히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였던 음악가가 이번엔 어른이 되어 나타났다. 문장들이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새로운 내용을 띄웠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녹록지 않죠.]

[그의 기회를 빼앗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그에게 좌절을 가르쳐 주세요.]

[교육 시간 : 168시간]

[현재 음악가의 정신력 : 70/100]

또다시 우리에게 교육 같지 않은 교육 의무가 생겼다. 168시간, 즉 일주일 안에 녀석의 꿈을 짓밟아야 한다는 뜻이다.

눈을 돌려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심드렁한 눈으로 상태창을 노려보던 조슈아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조금 빠듯하겠는걸.’

이곳은 음악가가 살던 마을과 다르게 대도시다. 비스가 말한 대로 음악가를 찾는 데만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 있다. 게다가 그에게서 뺏어야 하는 기회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려면 조금 더 공격적으로 정보를 모아야 했다.

“일단 일주일간 지낼 곳부터 찾자. 각자 정보를 모으고 공유할 장소가 필요하니까.”

“알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레일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바로 말을 덧붙였다.

“이 도시에서 사용할 우리의 가짜 신분을 만드는 게 어떻겠나?”

“가짜 신분?”

“그래. 네가 음악 학교 교사로 위장해서 마을에 있던 녀석들에게 다가간 것처럼 여기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음, 일리가 있네요. 아무래도 정보를 캐내려면 그럴싸한 신분이 있는 게 더 편할 테니까요.”

조슈아가 레일리의 말을 거들었다.

‘하긴 여기 사람들은 그 마을 사람들보다는 경계심이 높을 것 같아.’

잠깐 거리에 서 있었을 때 사람들은 서로 대화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인간들에게 대뜸 정보를 요구하면 분명 거절당하겠지.

“그게 낫겠네. 혹시 생각해둔 역할 있어?”

“사업가.”

“…좀 뜬금없네.”

“하, 지의. 뭘 모르는군. 사업가와 사기꾼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레일리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난 그대로 음악 교사로 할게. 이번엔 시골 교사라고 하지, 뭐.”

“전 레일리 씨와 같이 사업가로 하겠습니다. 길드 세울 때 투자자들을 많이 만났던 터라 대충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알고 있거든요.”

“그럼 두 사람은…….”

비스와 한진우 헌터를 돌아보았다. 비스는 팔짱을 낀 채로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고, 반면 한진우 헌터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인지 눈동자를 바쁘게 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진우 헌터가 우리 중에서 가장 음악가에 가까운 사람이네.’

아이돌로 활동했을 땐 메인 보컬이었고, 지금도 종종 음반을 낸다고 했다.

지금의 교육 목표는 좌절, 음악가에게서 기회를 빼앗고 좌절을 안겨줄 사건이 필요하다. 기회를 빼앗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떠올리기 쉬운 방법이 순간 뇌리를 스쳤다.

‘경쟁자에게 빼앗기는 것.’

그리고 그 경쟁자는 같은 음악가의 위치에 있는 사람, 즉 한진우 헌터가 적임자일 것이다.

“한진우 헌터.”

“네?”

“혹시 괜찮다면 가수 역할을 맡아주실 수 있나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한진우’가 동요한다.]

한진우 헌터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놀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난 머릿속으로 생각을 한번 정리한 후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이번엔 음악가의 기회를 빼앗고 좌절을 주라고 했잖아요. 아무래도 라이벌한테 뺏기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아서요.”

“로비가 필요하겠군. 선의의 경쟁이면 오히려 녀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시킬 테니까.”

레일리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진우 헌터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발언 결과 : 수긍]

“알겠어요. 한번 해 볼게요.”

“고마워요.”

“그럼 비스 씨는 어떤 역할이 좋을까요?”

“난 은신 스킬이 있어서 딱히 신분이 필요할 것 같진 않다. 뭐, 굳이 역할을 따지면…….”

―바스락.

‘응?’

비스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망토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우리의 시선이 그의 손을 향하자마자 그가 입을 열었다.

“자금 조달 역할이 되겠군.”

“지갑이잖아?!”

그의 손에 들린 건 지갑, 아니 지갑들이었다. 얼핏 봐도 지폐가 두둑히 들어 있는 지갑 세 개가 비스의 손에 당당히 들려 있었다. 너무 당혹스러워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 어떻게 한 거야? 훔쳤어?”

“그래. 은신 스킬을 쓰고 딱 봐도 돈 많아 보이는 녀석들 것을 털었지.”

“아하하하! 비스, 너 제법 배짱이 있는 녀석이군!”

“시끄러우니까 목소리 좀 낮춰라.”

“세상에, 생각보다 손버릇이 훌륭하시네요…”

“너도 입 좀 다물어라.”

비스가 레일리와 조슈아를 보며 인상을 구기는 동안, 나는 속으로 비스의 행동에 감탄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헛웃음이 터지자 비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툭.

그러더니 그가 제일 두꺼운 지갑을 내게 던졌다.

“이 정도면 숙박비는 해결될 것 같군.”

“그러게. 그럼 비스는 종종 돈을 좀 부탁할게.”

“알겠다.”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서일까, 돈을 훔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식이 이상해지기 전에 얼른 이 상황을 해결해야겠어.’

* * *

―끼익.

“보기보다 괜찮군.”

비스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중얼거렸다. 수도 광장 바로 옆에 있는 호텔은 허름한 외관과 다르게 방은 제법 깨끗했다.

‘그나저나 그 지갑에 있던 돈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비스가 내게 준 지갑에 있던 돈은 일주일 동안 방 세 개를 충분히 빌리고도 남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다른 지갑 두 개는 아직 열지도 않은 상태이니, 교육을 완료하는 동안 밥 굶을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나와 비스, 조슈아와 한진우 헌터, 그리고 레일리로 방을 나눴다. 레일리는 부유한 사업가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가장 큰 방을 혼자 쓰게 했다. 그리고 똑같이 사업가를 연기 중인 조슈아는 한진우 헌터를 무대에 세우기 위해 수도를 찾아온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그들이 미술관과 공연장을 돌아다니며 관계자들을 만날 동안 나는 음악가를 찾아야 한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는 걸 보니 여기서도 음악을 하고 있겠지.’

나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한번 정리한 후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나갈 건가?”

“응. 일단 음악가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빨리 파악하면 좋으니까.”

“알겠다. 나도 이 안에서 나름대로 정보를 모아 보지.”

―쿵.

비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건물이 높은 편이 아니라 로비까지 내려오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을 지키고 있는 도어맨을 향해 미소를 짓자 그 검은 형체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내게 문을 열어 주었다.

“흐음…….”

광장으로 나오니 검은 형체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이 검은 형체들 중 유일하게 색을 갖고 있는 녀석을 찾아야 하는데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나도 일단 아무 공연장이나 들어가 볼까.’

로비 직원에게 받은 지도를 꺼내어 광장에서 가장 가까운 공연장을 찾았다. 광장 중앙에 있는 시계탑의 뒤쪽에 작은 공연장이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를 한 손에 든 채 그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렌타 가문이 주최하는 공연 포스터 봤는가?”

“아~ 그 피아노 연주 공연 말인가?”

“그래, 그거.”

그때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두 검은 형체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참 신기한 일이야. 원래 그 가문은 오페라 공연만 주최했잖나.”

“후원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기 위함이겠지. 그렌타 사람들은 예술가 육성에 온힘을 다하니까.”

“오페라 가수가 아니라 피아니스트라… 어떨지 정말 궁금하군.”

걸음을 늦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후원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

그 말이 왠지 모르게 귓가에 맴돌았다.

―타닥.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걸어가자 어느새 공연장 앞에 다다랐다. 고풍스러운 붉은 지붕으로 덮인 1층짜리 건물은 공연을 보러 온 형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 마침 그 포스터가 있군.”

두 형체 중 하나가 손을 뻗으며 이야기하자 나도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건물 앞 게시판에 붙어 있는 포스터엔 악보 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인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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