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65화 (265/366)

265화

[알렌이 5분 내로 갈 거다.] ― 레일리

레일리에게 온 문자를 확인한 후 고개를 들었다. 야심한 시각이라 우리집 앞 골목엔 사람은커녕 길고양이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한진우 헌터, 약간 긴장했나?’

한진우 헌터는 맞은편 담벼락에 기댄 채 깜박거리는 가로등 불빛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치지직.

그때 등 뒤쪽으로 스파크가 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갈색 뒤통수가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알렌 씨.”

“앗, 깜짝아.”

갑자기 제 이름이 들려 깜짝 놀랐는지 그가 눈에 띄게 어깨를 흠칫 떨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밝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곤 옆에 있던 한진우 헌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 안녕하세요. 진우 씨……?”

“하, 한진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휴, 이름 부르기 쉬워서 좋네요. 전 알렌이라고 해요. 앞으로 자주 봐요!”

알렌은 여유롭게 웃더니 나와 한진우 헌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읏차.”

그의 손을 잡고 웜홀 안으로 발을 들이자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빙글 돌았다. 이 감각에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주 사용하다 보니 완전히 적응해 버렸다.

―타닥.

얼마 안 있어 발이 땅에 닿았고 그와 동시에 향긋한 홍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웜홀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일주일 전에 다 같이 모였던 그 연회장이었다.

“어서 와라.”

연회장의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레일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옆에 있던 작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후 평소와 다름없는 여유로운 미소를 보여 주었다.

“잘 지냈어?”

“보다시피.”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내 옆의 한진우 헌터를 향했다. 한진우 헌터가 작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인형처럼 생긴 녀석이 네가 말한 치유사로구나.”

―탁.

레일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진우 헌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소속, 한진우입니다.”

잠깐의 정적 후 한진우 헌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경직된 목소리를 들으니 그가 확실히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레일리는 그런 그를 한참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노블레스 길드장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다. 레일리라고 부르도록.”

―파지직.

두 사람이 악수를 하며 인사를 주고받을 동안 어느새 비스와 조슈아가 웜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조슈아는 나를 향해 싱긋 웃곤 한진우 헌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희 구면이죠? 이렇게 또 뵐 줄 몰랐네요, 한진우 헌터.”

“아, 조슈아 헌터 안녕하세요!”

“그냥 편하게 조슈아라고 부르세요.”

조슈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이야기했고 한진우 헌터는 여전히 어색한 듯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조금씩 버벅거렸다.

“비스 바즈라차르야다. 비스라고 불러라.”

“네, 비스 씨. 한진우입니다!”

“호오, 반짝거리는 아이구나.”

비스의 등 뒤에서 나타난 칼리가 한진우 헌터 쪽으로 고개를 쭉 빼자 한진우 헌터는 어깨를 파드득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똑같은 얼굴 수십 개가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칼리는 한진우 헌터의 반응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무슨 전시품을 보듯 찬찬히 뜯어 보고 있었다.

“다 모인 것 같으니 바로 출발하자. 레일리, 어디로 가면 돼?”

“이쪽으로 오도록.”

레일리는 연회장 밖으로 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커다란 액자가 걸린 벽 앞에 섰다.

―철컥.

그가 액자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자물쇠가 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와…”

“…별 이상한 공간을 만들어 놨군.”

그러자 한 사람 정도 통과할 만한 크기의 문이 옆으로 쭉 밀려났고 문 너머엔 밑으로 향하는 긴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레일리는 고개를 돌려 의기양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우리 길드 벙커다. 오직 나만 들어올 수 있으니까 다른 녀석들의 눈에 띄지 않고 은밀하게 갔다 올 수 있지.”

“만약 몬스터가 빠져나오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라. 알렌과 라파엘라에게 귀띔해 놓았으니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녀석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다.”

―탁, 탁.

계단을 통해 밑으로 내려가자 아까 우리가 있던 연회장만한 크기의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방 한켠에 가득 쌓인 물과 식량, 그리고 작은 화장실까지,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된 벙커였다.

“지의, 시작해도 되겠나?”

“아, 응.”

비스의 말에 벙커 내부를 둘러보는 것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파편을 꺼내서 스킬로 공격하면 돼요.”

직접 파편을 꺼내 본 조슈아가 말을 얹었다. 비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제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파지직.

그러자 불길한 기운의 검푸른 스파크와 함께 녀석의 파편이 비스의 손안에 들어왔다. 겉보기엔 평범한 돌덩이지만 묘하게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칼리 님.”

“알겠다.”

―쾅!

비스가 파편을 위로 던지자 칼리가 들고 있던 낫으로 그것을 내리쳤다.

―쿠구구궁.

낫은 파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파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벙커를 순식간에 에워쌌고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밀어낼 것처럼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사라락.

그때 종이 넘기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창조자의 파편이 어느새 커다란 악보가 되어 비스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탁!

비스를 향해 달려가 그의 손목을 잡은 후 다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이쪽으로!”

“네!”

“알겠다!”

레일리가 한진우 헌터와 조슈아를 낚아채다시피 양팔에 끼고 악보 쪽으로 몸을 날렸다.

―후웅.

몸이 붕 뜨더니 이내 악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파편의 주인은 무조건 정신을 잃는구나…….’

고개를 들어 비스를 바라보니 그는 이미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우릴 둘러싼 풍경이 이리저리 바뀌더니 이내 붉은 잉크로 그린 듯한 오선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펜촉이 종이를 휘갈기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오선 위로 음표가 그려졌다. 마르지 못한 잉크가 밑으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모습이 꼭 피를 닮아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행복한 음악가가 태어났습니다.]

[악기 연주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행복한 음악가입니다.]

[지금도 그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붉은 글씨로 쓰인 문장이 눈앞에 떠올랐다.

[하지만 예술가의 삶은 그래선 안 됩니다.]

[명작은 비극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명작을 만들기엔 지나치게 행복하군요.]

‘그동안 봤던 파편과는 묘하게 느낌이 다르네.’

제3자가 음악가의 삶을 관찰하며 이야기하는 듯한 말투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행복한 음악가가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면 그에게 고통을 줘야 합니다.]

[끔찍하고 비참할수록 그는 완벽한 음악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아아.

파도에 모래가 쓸려나가듯 문장이 사라지더니 곧 굵은 글씨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입장한 교육자 5명]

[파괴하는 시간선에 입장합니다.]

[*행복한 음악가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면 비탄의 음악가로 성장한 그와 만날 수 있습니다*]

‘삶을 파괴하라고?’

―타닥.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우리의 발이 땅에 닿았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악보는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고 한적한 시골 마을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으…….”

“정신이 좀 드나?”

“그래. 음악가의 삶을 파괴하라는 상태창도 봤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비스가 레일리에게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돌로 지어진 집이 흙으로 된 비탈길을 따라 드문드문 나 있었고, 집 앞엔 작은 밭도 딸려 있었다.

“꼭 프랑스 구석에 있는 깡촌 같군.”

레일리의 말대로 유럽의 시골 마을을 그려낸 것 같은 풍경이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어렴풋이 들려 이곳이 창조자의 파편 안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나저나 지금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비탄의 음악가의 파편은 확실히 다른 파편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전까지는 특정 조건을 만족시켜서 보스 몬스터를 만나는 형태였다면, 지금은 우리가 보스 몬스터를 직접 키워서 만나는 방식이다.

“뭐, 일단 이곳에서 음악가를 찾아서 그 녀석을 고통스럽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삶을 파괴하라고 했는데, 설마 죽여야 하는 걸까요?”

비스와 한진우 헌터가 차례로 이야기 하자 모두의 머릿속이 또 다시 복잡해졌다.

―파지직.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해 할 무렵 또 다시 눈 앞에 상태창이 들이밀어졌다.

[첫 번째 교육 목표 : 이별]

[이 평화로운 마을은 그가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 뿐입니다.]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몰살하여 그에게 이별을 가르쳐 주세요.]

[교육 시간 : 36시간]

[현재 음악가의 정신력 : 100/100]

“…저희를 교육자라고 칭한 이유가 있었군요.”

“하, 교육 방법 한번 뭐 같군.

―치지직.

그 밑으로 또 다른 문장이 나타났다.

[*교육자들은 이곳의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행동에 주의하십시오.]

[*교육은 총 네 번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모든 교육이 종료된 후 음악가의 정신력이 남아 있으면 그는 행복한 음악가로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정보들을 천천히 머릿속으로 정리하자 목표는 금방 명확해졌다.

네 번의 기회 안에 행복한 음악가의 정신력을 0으로 만들어 비탄의 음악가로 성장시키는 것, 그것이 이 파편을 파괴할 첫 번째 조건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이해했지? 네 번 안에 정신력을 0으로 만들어야 하고 지금은 36시간 안에 첫 번째 교육을 성공해야 해.”

“한 번에 적어도 25씩은 깎아야 한다는 건데,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정신적인 충격이 필요한 건지 모르겠군.”

내 말에 레일리가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으로 제 턱을 두드렸다.

“저 미션을 최대한 녀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방향으로 수행해야겠네요.”

“예를 들면?”

“음…….”

잠시 고민하던 조슈아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제 손으로 마을 사람들을 죽인 걸 알게 되는 거죠.”

“정말로 잔인한 이야기군.”

레일리는 조슈아의 발상이 끔찍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지만 난 그런 조슈아의 얼굴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느낀 가장 큰 절망이 의도치 않게 자신의 친구를 죽인 일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끼익.

조슈아의 말에 마음이 무거워질 때쯤 몇몇 집에서 문이 열리고 검은 인영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유, 외지인들이 왔네.”

“이 시골 마을에 무슨 일이래?”

우리의 존재가 인식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 우리를 향한 의문 섞인 말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눈치를 보다 내가 먼저 목소리를 낮춘 후 입을 열었다.

“일단 각자 흩어져서 이 마을이랑 음악가에 대해서 조사해 보자. 30분 후에 저기 언덕 풍차 옆에서 만나는 걸로, 어때?”

“알겠다.”

“먼저 가 볼게요.”

내 말에 저마다 대답하며 뿔뿔히 흩어졌고 나도 로브의 모자를 뒤집어 쓰며 마을의 광장 쪽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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