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64화 (264/366)

264화

<어떤 음악가의 비극>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

비스는 내 말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가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언제 이 녀석의 몸에서 그 파편을 제거할 셈이냐, 빛의 아이야.”

“다음 주.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해결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

“누구와 함께 들어갈 지가 중요하겠군.”

레일리의 말이 맞았다. 사실 언제 들어가느냐보다 누구와 들어가서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다.

“일단 파편의 주인인 비스 씨는 강제로 들어가게 될 거고, 파편을 파괴하려면 신지의 헌터도 들어가야 하죠?”

“네.”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그동안 들어갔던 창조자의 파편 내부를 떠올려 보았다.

오만한 소설가의 파편은 소설 속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던전이었고, 표리부동한 연기자의 파편은 연기를 하고 있는 가짜를 가려내는 던전이었다. 그리고 희생하는 화가는 녀석의 피사체가 될 대역 인형을 세우는 던전이었다.

‘보스 몬스터와 만나기 위한 조건이 파편의 이름과 비슷하게 설정되어 있었지.’

나는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비스를 바라보았다.

[‘카르마 : 비탄의 음악가’ : 절대자 ‘창조자’가 각성자 ‘비스 바즈라차르야’에게 씌운 비탄의 음악가의 업. 비나를 연주해 생명체의 꿈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창조자의 파편 이름은 ‘비탄의 음악가’, 즉 보스 몬스터와 만나려면 음악과 관련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할 가능성이 높다.

“비스는 비탄의 음악가의 파편을 갖고 있어. 아마 던전도 음악과 관련된 형태로 나오겠지.”

“음악이라…….”

“…다들 음악 배운 적 있어?”

어이없는 질문이긴 하지만 다들 진지한 태도로 생각에 잠겼다. 나는 학교 음악 수업에서 배운 게 전부라서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뭐, 너희들 중에선 내가 제일 많이 배웠겠군.”

그때 레일리가 입을 열었다.

“레일리 씨가 음악을요?”

“의외인가?”

“당연히 의외죠. 레일리 씨가 그런 교양 있는 교육을 받으셨다니.”

조슈아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놀란 티를 냈다. 일부러 속을 긁으려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레일리의 눈 밑이 파르르 떨린 것을 보니 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긴 했나 보다.

레일리는 잠시 분을 삭이는가 싶더니 곧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왕실에서 나오기 전까지 바이올린을 배웠다. 리아는 피아노를 배웠지. 그 애의 앙상블 상대가 되어 주려면 매일매일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거든.”

“좋아. 그럼 레일리도 들어가는 걸로 하자.”

“일단 세 사람은 확정됐고…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도 함께해도 될까요?”

조슈아가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눈을 크게 뜨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지만 구성을 봤을 때 제가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 그렇네. 비스, 조슈아, 레일리 세 사람의 전투 합이 괜찮았으니까.”

“바로 그겁니다.”

조슈아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그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합류로 파편 안으로 들어가기로 한 사람은 총 네 명, 여전히 평소 들어가는 인원보다 적었다.

“치유계 헌터가 한 명 들어가면 더 안정적일 것 같군.”

“아까 왔던 그 신부 녀석은 어떻지?”

“라파엘라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하지만 음악에 대한 부분이 조금 애매하군. 뭐, 찬송가라면 어느 정도 부르겠지만 말이야.”

레일리가 비스에게 대답한 후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치유계이면서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

나도 머릿속으로 그동안 만났던 모든 헌터들을 떠올렸다. 치유계 스킬을 가진 헌터들은 꽤 많이 떠올랐지만, 음악에 익숙하고 파편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고려하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한진우 헌터를 데려와야 할 것 같아.”

“그게 누구지?”

“우리나라 S급 치유계 헌터야. 아이돌 메인보컬 출신이었고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

“이번 작전에 딱이군.”

비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한진우 헌터만큼 제격인 헌터가 없었다. 물론 한진우 헌터를 설득해야 한다는 점과 그의 부재를 협회가 모르게 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지만 일단 부딪혀 봐야겠지.

“한진우 헌터에겐 내가 물어볼게. 만약 안 되면 라파엘라라도 데리고 가자.”

“동의합니다.”

“알았다.”

“좋아요.”

“그래.”

나는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헌터 인트라넷을 열었다. 시간 되냐는 내용으로 한진우 헌터에게 문자를 보내 놓은 후 다시 핸드폰을 넣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내 말을 기다리는 듯 입을 다문 채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결과는 금방 알려줄게. 창조자가 먼저 행동하기 전에 해결하자고.”

“좋다.”

“아, 신지의 헌터. 혹시 질문을 좀 해도 될까요?”

그때 센이 말문을 뗐고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비스 씨의 파편 파괴까지 종료되면 지옥도가 바로 열리는 건가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그렇진 않을 거예요. 전부 파괴했을 때도 몇 달 지나고 나서 겨울에 열렸거든요.”

“그놈이 갑자기 미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물론 레일리나 센을 파편 안으로 강제로 데리고 들어가거나, 세빈이를 없애기 위해 사전 작업을 시도한 것을 보면 지금 당장 지옥도를 갖고 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지옥도의 수준은 많이 떨어지겠지.’

지옥도의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사도들에게 나눠 주었던 녀석의 파편은 파괴되었고, 그 파괴는 창조자의 능력 자체에도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컸다. 즉, 마냥 불리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자가 미친 짓을 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으론 우리가 무조건 이겨. 그러니까 일단 비스의 파편을 파괴하는 것에 집중하자.”

“그래.”

―우웅.

레일리가 대답하자마자 인벤토리 안에 넣어뒀던 내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곧바로 확인해 보니 기다리던 한진우 헌터의 답장이었다.

[마침 오늘 아무 일도 없어요! 무슨 일이세요 ^0^?] ― 한진우 헌터

* * *

“좋아요! 같이 갈게요!”

“…네?”

내 부탁을 듣자마자 한진우 헌터는 정확히 3초 고민한 후 곧바로 대답했다.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무 흔쾌히 수락하시는 거 아니에요?”

“수락하길 바라신 거 아니었어요?!”

“다, 당연히 한진우 헌터가 와 주시면 든든하죠! 근데 경계보다도 위험한 장소니까 한진우 헌터에게 부탁드리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려서요.”

한진우 헌터는 한국의 유일한 S급 치유계 스킬 보유자인데다가 지옥도가 열릴 때까지 무조건 살아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정말 만에 하나 상황이 잘못되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나 스스로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거야.’

―두근, 두근.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으로 그려지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신지의 헌터도 알다시피, 전 전투 능력이 거의 없어요. 함정계 스킬이 있긴 하지만 도망갈 시간을 주는 정도의 수준이죠.”

그때 한진우 헌터가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그의 모습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저도 헌터예요. 몬스터들을 직접 무찌를 순 없어도, 죽어가는 동료들을 살릴 힘은 있어요.”

“한진우 헌터……!”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그 위험한 곳에 뛰어들었는데 저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죠. 저도 함께하게 해주세요!”

한진우 헌터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확신과 의지로 가득한 눈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떠올랐던 끔찍한 상상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괜한 걱정을 했나 보네.’

난 한진우 헌터를 향해 미소 지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인형처럼 커다란 그의 눈이 반으로 접혀 예쁜 포물선을 그렸다.

―달그락.

그때 나와 한진우 헌터 사이에 있던 테이블 위로 커피잔이 든 쟁반이 놓였다.

“뭐야, 커피 내려온 사이에 얘기 다 끝났나 보네?”

‘아, 여기 하미준 헌터 집이었지.’

대화에 열중한 탓에 우리가 하미준 헌터의 손님방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곤란한 이야기라 만날 장소가 애매했는데, 내 사정을 들은 하미준 헌터가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주었다.

“그럼 언제쯤 가는 거야?”

“다음 주 초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행히 한진우 헌터도 별일이 없다고 해서요.”

“파견 다녀온 지 아직 이틀밖에 안 되기도 하고요~”

“괜찮네.”

하미준 헌터는 커피 한 잔을 챙겨 방 한 켠에 있던 일인용 소파에 앉더니 우리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이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게 오히려 좀 꺼림칙하네.”

“아…….”

그의 말에 한진우 헌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아무 말 없이 그를 향해 웃어 보이며 애써 안심시켰다.

창조자의 파편이 사라진 원인이 나한테 있다는 걸 김강희가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구경이라도 할 셈인지 나를 만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회장님은 왜 그 창조자라는 존재와 손을 잡은 걸까요?”

한진우 헌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조심스럽게 말문을 텄다.

김강희가 창조자와 한배를 탄 이유, 그것은 지금의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창조자의 편이라는 사실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고 세상이 무너지는 그 날까지 그와 함께했다.

“세상에 무슨 불만이 있길래 세상을 멸망시킬 녀석과 함께 하는 걸까.”

“…지옥도가 열릴 때쯤엔 알 수 있겠죠.”

지옥도가 내 바람대로 잘 해결되면 김강희는 숨겨뒀던 게이트를 다시 한번 열 것이다. 98번째 회귀 땐 그를 바로 죽였지만, 이번엔 죽이지 않고 그 원인을 알아낼 것이다. 내가 모르는 그의 업과 사명이 존재할 수도 있으니까.

난 생각을 정리한 후 한진우 헌터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럼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연락드릴게요.”

“아, 네! 잘 부탁해요, 신지의 헌터.”

환하게 웃는 한진우 헌터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창조자의 마지막 파편, ‘비탄의 음악가’의 파편을 파괴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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