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63화 (263/366)

263화

“모두 정상― 이유를…….”

“미치겠… 벌써 1시간―”

‘라파엘라랑 레일리인가……?’

누군가 눈꺼풀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다행히 정신은 서서히 또렷하게 돌아오고 있어 주변의 말소리들이 귀에 제대로 꽂히기 시작했다.

“일단 잠들어 있는 것 같으니 조금 지켜보죠.”

“…저만 느낀 것일 수도 있지만, 아까 던전에 있었을 때 이상할 정도로 힘이 남지 않았나요?”

“그쪽도 느낀 건가?”

“네.”

비스의 질문에 센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게 신지의 헌터 덕분인 것 같아서요.”

“신지의 헌터가……?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거죠?”

“던전에 있을 때 신지의 헌터와 잠깐 대화를 하고 나서 갑자기 몸 컨디션이 엄청 좋아졌습니다. 그에게 물어보니 대답을 얼버무리더군요.”

정적이 생겨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빨리 눈을 떠서 뭐라 설명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좀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답답해서 죽을 맛이었다.

“혹시 창조자 놈이 지의에게 뭔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쿵.

비스가 중얼거리자 탁자를 내리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X발,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자식이 지의에게 직접 해를 가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는데.”

그 소리를 만든 주인공이 레일리였는지 그가 욕을 뱉으며 말을 덧붙였다.

“비스 씨, 혹시 창조자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저희 중에서 여전히 사도인 사람은 당신밖에 없잖아요.”

“너희들도 겪어봐서 알잖아. 우리 마음대로 녀석을 만날 권한이 없다는 걸.”

“하지만 오늘이 지날 때까지 깨어나지 않는다면 비스 씨가 직접 창조자를 만날 수밖에 없어요.”

“…골치 아프게 되겠군.”

불안 섞인 추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가위눌린 몸을 풀듯 발끝에서부터 힘을 주어 천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으윽…….”

“지의!”

“신지의 헌터! 괜찮으신가요?!”

그러자 다행히 누가 본드를 붙여놨던 것처럼 떨어지지 않던 눈이 떠졌고, 잇새로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니 함께 던전에 들어갔던 네 사람과 라파엘라가 눈에 들어왔다.

“하아아…….”

센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길게 숨을 뱉었고, 그의 옆에 있던 조슈아 역시 손등으로 이마를 슥 닦더니 곧 가벼운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몸은 완전히 돌아왔네.’

조금 피곤한 것을 빼곤 평소와 다름없는 컨디션이었다. 상태창을 열어 업적을 살피니 내가 올려놨던 모든 사람들의 신체 능력 수치가 초기화된 상태였다.

오늘처럼 상황이 전부 종료된 후에 기절한 것이면 모를까, 한창 전투 중에 정신을 잃었다면 분명 어떤 방향으로든 큰일이 났을 것이다.

‘몸에 이상이 느껴지는 대로 조절할 필요가 있겠어.’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그때 레일리가 입을 열었다.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엔 레일리답지 않은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에게로 시선을 옮기니 황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묘하게 탁한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가슴 한켠이 쿡쿡 쑤셨다.

―딱.

“악!”

“그래서 설명 좀 해 봐. 아까 센이 하는 말 들어보니까 네가 던전 안에서 뭔 짓을 한 것 같던데.”

레일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전에 그가 내 이마에 딱밤을 놨다. 머리 전체가 울리는 통증에 양손으로 이마를 싹싹 문지르자 라파엘라가 기도문을 읊으며 곧장 치료를 시작했다.

“아하하~ 길드장님, 딱밤 오랜만에 보네요. 전에 그걸로 호두도 깨시던데.”

“지금 그 힘으로 내 이마를 때린 거야?!”

“잔말 말고 설명이나 해라, 지의.”

이번엔 비스가 말을 뱉었다. 한껏 낮아진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비스도 레일리 못지않게 내게 화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전부 털어놓아야겠네.’

―사락.

상체만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고 옆에 있던 라파엘라를 슬쩍 쳐다보았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내 의도를 눈치챈 건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밀 이야기에 꼭 끼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나가 봐라, 라파엘라.”

“네~”

그는 레일리를 향해 고개를 숙인 후 이내 방을 나섰다.

“이제 말해 주시겠어요?”

“…네.”

다정하게 물어오는 센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하아, 그러니까 네 말은.”

내 얘기를 잠자코 듣던 레일리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다 곧이어 말을 덧붙였다.

“사명인지 뭔지 하는 것의 보상으로 받은 힘을 시험해 보려고 우리를 데리고 던전에 들어간 거고, 그 힘을 무리해서 쓰다가 기절한 거라고?”

“응…….”

왠지 모르게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덟 개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냥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정적을 뚫고 조슈아가 말문을 텄다.

“그럼 굳이 다른 핑계를 댈 필요가 없잖아요. 꼭 거짓말을 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어.”

다시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을 덧붙였다.

“능력이 상승됐다는 걸 안 상태에서 전투를 하면 이 힘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제대로 확인이 안 될 것 같았거든.”

“하긴,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데 신체 능력이 올라갔다는 소리를 들으면 진짜로 그렇게 느끼는 경우도 있으니까.”

“플라시보 효과를 차단하기 위해서였군요.”

“그런 이유도 있고, 너희들끼리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됐으면 해서 그런 것도 있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내 말에 모두 눈을 크게 떴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레일리보다 먼저 입을 열어 말을 이어갔다.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전투 중에 호흡이 맞다 보면 금방 친해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난데없이 팀으로 나눠서 공격하자고 한 것도 그런 이유였나?”

“응.”

레일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고, 반면 조슈아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고 있었다.

‘내 생각이 너무 짧았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인데 고작 이런 만남으로 친해질 거라고 기대한 것이 어리석었다. 내 생각을 이들에게 밀어붙인 거나 다름이 없었다.

―탁.

내 행동에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쯤, 주름진 손이 내 손 위로 얹혔다. 고개를 홱 들자 센이 차분한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신지의 헌터, 저희가 이렇게 모인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덕이라고 하긴 뭐하고, 저 때문에 모여 주셨죠.”

“그래요.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신지의 헌터가 불러서 이 자리에 온 거예요.”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창조자의 사도라는 이름 아래 모였을 땐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어요.”

“서로가 없었으면 놈의 힘을 독차지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비스가 센의 말을 거들었다. 그와 시선이 맞닿자 비스가 먼저 눈을 피했다.

“내가 창조자의 시나리오에 집착하는 바람에, 왕실에서 나온 이유조차 잊고 있었지. 고작 길드전에서 이기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닌데 말이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새X… 아니, 창조자의 밑에 계속 있었다면 평생 벤자민을 속이고 살았을 거예요.”

레일리와 조슈아를 쳐다보자 미소를 머금은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동의한다.”

그리고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하고 있던 비스도 말을 덧붙였다.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물론 한순간에 가까운 사이가 되는 건 어렵겠죠. 이제야 서로의 정체를 겨우 알았는데.”

센이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얹곤 양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에 박힌 굳은살이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지금은 신지의 헌터의 동료로서 모였으니 모두 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일 거예요. 그쵸?”

“그럼요!”

센의 말에 조슈아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고 비스와 레일리도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센은 감싼 손에 힘을 주어 말을 덧붙였다.

“우린 모두 신지의 헌터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걸 꼭 기억해 주세요.”

“…뭐, 친해지는 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초를 치네…….”

비스의 퉁명스러운 말에 레일리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투둑.

“어?”

“어머.”

“지의?!”

하지만 요동치는 내 감정을 터트리기엔 충분했다. 결국 가슴 속에 쌓였던 감정이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고, 서둘러 소매로 눈을 벅벅 닦았다. 다행히 눈물은 금세 말라 없어졌지만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은 이미 휘둥그레 뜬 이후였다.

절대로 동료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이미 내 손으로 한번 죽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결국 우린 동료가 됐고 같은 목표를 향해 걸어갈 준비를 끝냈다.

‘난 정말 멋진 사람들을 동료로 뒀구나.’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긋지긋하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지난 삶들이 지금을 위한 밑거름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고마워.”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기쁨]

“그래. 앞으로는 속이지 말고 내게 의지하도록. 언제든 알렌을 시켜 웜홀을 열어 줄 테니.”

“저도 언제든지 열려 있답니다~”

레일리와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센의 손등 위로 내 손을 올려 손을 꽉 잡았다. 센의 눈이 반달로 접혀 예쁜 포물선을 그리자 그의 눈 주위에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았다. 그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격려를 받은 것 같았다.

“후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 후 이번엔 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날 보던 비스와 시선이 맞닿자 그가 고개를 살짝 꺾어 의문을 표했다.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비스, 이제 네가 창조자로부터 자유로워질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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