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쾅, 쾅, 쾅.
활성화된 특성과 상승한 신체 능력 덕분에 전투는 수월하다 못해 시시할 정도였다. 레일리가 시종장과 에르제베트의 공격을 받아낼 때마다 아더의 방패가 그것을 바로 반사했고, 조슈아와 비스의 무기가 녀석들의 급소를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조심해라, 쿠마리!”
“차라리 이름으로 불러라, 이 덜떨어진 자식아!”
“허, 걱정을 해줘도 난리군.”
―콰앙!
사도명으로 불린 비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를 노렸던 시종장의 식칼이 힘없이 튕겨 나왔다. 시종장은 자신을 향해 다시 날아오는 식칼을 잡은 후 이번엔 자신의 다리 뒤쪽에 있던 조슈아를 노렸다.
“이크.”
―퍼버벙!
시종장이 그를 향해 몸을 튼 순간 조슈아가 뒤로 가볍게 굴러 녀석과 거리를 벌리더니 이내 시뻘건 용암 기둥을 소환했다.
“크아아악!!”
용암은 정확히 녀석의 얼굴을 덮쳤다. 녀석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틈을 타 조슈아의 검이 녀석의 무릎 밑을 찍자 검은 치마 밑으로 검붉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조슈아는 기동력을, 비스는 체력을 조금 더 올려줄까.’
수치를 조금씩 올리자 바로 효과가 느껴지는지 두 사람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피곤에 젖어 있던 비스의 붉은 눈동자엔 총기가 서렸고 조슈아의 이동 속도와 도약 높이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혹시 우리 중에 보조계 헌터가 있나?”
“없을걸.”
비스의 말에 레일리가 대신 대답한 후 메이스로 에르제베트의 발등을 내리쳤다. 그는 완전히 지금의 컨디션을 즐기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전투에 열중했다.
“나도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몸이 개운하긴 하네.”
“아까 홍차에 뭐 타신 거 아니죠?”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군.”
―콰그작!!
레일리가 녀석의 다리를 완전히 부러트린 것을 시작으로 세 사람이 다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퍼즐을 맞추듯 완벽한 타이밍으로 들어맞는 공격에 에르제베트와 시종장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저희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저들끼리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내 옆에 있던 센이 중얼거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예 무기까지 거둔 채 그들의 전투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따금 광휘로 시종장의 길을 막을 뿐 큰 개입은 하지 않았다.
‘센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은데.’
다정한 말이 오가는 건 아니었지만 센을 제외한 세 사람은 함께 싸우는 사이에 어색함이 많이 사라진 듯했다. 센 혼자 소외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치직.
[아마노 레이]
[특성 ‘조화’ : 활성화 시 반경 100m 내의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해당 특성을 활성화할 시 각성자 ‘신지의’의 체력이 대폭 하락합니다.]
센의 특성을 다시 한번 살폈다.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으니 에르제베트와 시종장의 공격은 물론 저 세 사람의 움직임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센은 베테랑 헌터니까 공격 경로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어디로 공격을 가해야 할지도 금방 알아채겠지.
“센 씨.”
“네?”
“혹시 페이즈 스킵 해 보신 적 있으세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아마노 레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그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C급 던전에선 몇 번 있었죠.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왠지 센 씨라면 이번 던전에서도 가능할 것 같아서요.”
“…오늘따라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센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쯤 슬슬 에르제베트와 시종장의 체력이 바닥났을 것이다. 지난번처럼 4페이즈로 넘어가기 전에 페이즈 스킵을 만들어내면 무적 상태의 에르제베트를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센의 특성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외쳤다.
‘활성화.’
“…음?”
동시에 센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 공격력 수치까지 올려놓자 센은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동요했다. 던전 내부를 이리저리 헤매던 시선의 끝은 결국 나를 향했고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설마 지금 스킬을 쓰신 건가요?”
“스킬은 아니에요.”
“대체 뭘…….”
“빨리요. 4페이즈로 넘어가면 엄청 까다로워질 거예요.”
내가 씩 웃으며 말을 덧붙이자 그는 미간을 살짝 구기며 의아해했다.
―철컹.
하지만 곧 검을 손에 쥐며 자세를 잡았다.
“무슨 생각이신진 모르겠지만 일단 거신 기대에 부응은 해보겠습니다.”
그가 나를 흘긋 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투쾅!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아마테라스를 시전하더니 전투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새하얀 후광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는 게 버거워 보일 정도로 그는 빠르게 이동했다. 에르제베트와 시종장이 거대한 팔을 휘둘렀지만, 그는 이미 예상한 듯 몸을 가볍게 돌려 공격을 피한 후 오히려 역습을 시도했다.
―후두둑.
녀석의 벌어진 손가락 틈으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 센이 검 날을 위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녀석의 손목을 정확히 관통하자 검붉은 피가 바닥 위로 쏟아졌다.
“앗, 센 씨 조심……!”
―콰과광!!
센이 지나간 방향으로 시뻘건 용암 기둥이 치솟았지만 조슈아의 경고가 무색하게 그것은 센의 털끝 하나 태우지 못했다.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움직임이 눈앞에 미리 펼쳐질 테니 지금 그를 해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 양반, 갑자기 날아다니는군.”
레일리가 센을 흘긋 보며 중얼거렸다. 자로 잰 것처럼 완벽한 공격과 훨씬 가벼워진 움직임 때문에 남은 세 사람도 더욱 공격적으로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쿵, 쿵.
‘호흡이 잘 맞네.’
특성 상성이 좋은 비스, 조슈아와 레일리,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을 전부 알고 있는 센까지 합세하니 전투는 조금의 위기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모두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철컹.
그때 센이 벽에 있던 진열장에 착지한 후 검을 고쳐 들었다.
“끝내겠습니다! 저 둘의 움직임을 최대한 묶어 주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귀찮게 구는군.”
조슈아와 비스가 동시에 대답했다.
―두두둑.
레일리가 에르제베트와 시종장의 발 주변으로 흙으로 된 벽을 세웠고 조슈아는 그 안에 용암을 채워 넣어 그들의 발을 묶어 놓았다. 용암 속에 발을 담근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두 녀석은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을 질렀다.
“칼리 님!”
“알겠다!”
칼리는 비스의 몸 안에서 나오더니 이내 거대한 창이 되었다. 평소보다 더욱 위협적으로 스파크를 뿜어대는 칼리의 창은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르더니 이내 용암에 발이 묶인 에르제베트와 시종장을 향해 운석처럼 추락했다.
―콰그작!
“키에에엑!!”
둘 다 동시에 창에 꿰뚫리자 에르제베트의 소름끼치는 비명이 던전 안에 울려 퍼졌다. 센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는 녀석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고 있었다. 광휘로 집중 공격할 준비를 취하는 듯했다.
―치지직.
센이 마지막 공격을 퍼붓기 전에 그의 공격력을 최대치로 올렸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후광과 주변을 맴도는 빛무리가 더욱 환하게 반짝거렸다.
“윽…….”
그러자 피로감이 몰려오며 눈앞이 핑 돌았다. 다행히 다들 전투에 몰입한 덕에 눈치채진 못했다.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한 20분쯤 지난 건가.’
확실히 네 사람의 특성을 전부 활성화하고 신체 능력 수치까지 올리다 보니 체력 소모가 꽤 컸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시 몬스터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피를 내놓아라!”
“주인님께 피를 바쳐라!”
―투쾅!
그때 에르제베트와 시종장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주변에 있던 모든 물건을 닥치는 대로 던지기 시작했다.
―콰과광!!
그와 동시에 천장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무차별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센이 진열장에서 뛰어내려 빛줄기 사이로 몸을 날렸다.
“하아아아!!”
―콰과광!!
센의 기합 소리와 함께 광휘가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덮쳤다. 에르제베트와 시종장은 이를 아득 갈며 무서운 기세로 센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센은 능숙하게 피해 오히려 그들의 팔 위에 착지했다.
―서걱.
그리고 새하얀 검이 정확히 몬스터들의 목을 벴다. 검붉은 핏방울이 허공을 잠시 부유하다 이내 벽과 바닥에 흩뿌려졌다.
“오…….”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조슈아가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분명 단순한 공격이었는데 공격력이 올라간 탓인지 에르제베트와 시종장의 몸이 돌처럼 완전히 굳어 버렸다.
―쿵!!
녀석들의 몸은 수십 개의 조각으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고 곧이어 검은 재로 변해 버렸다.
의심할 여지 없이 클리어였다.
―바스락.
“하, 참 재미있는 일이군. 이번에도 페이즈 스킵이라니.”
레일리는 부츠 끝으로 재를 헤집으며 아이템이 나왔는지 살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어 보였다.
“지난번에도 페이즈 스킵이 있었나요?”
“그래. 지의가 아주 완벽한 스킵을 만들었지.”
다른 사람들도 몬스터의 잔해를 바라보며 저마다 말을 얹었다. 그런 그들을 앞에 둔 채 난 업적 상태창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엄청난 것이었어.’
‘구원자의 가호 아래’, 직접 써보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성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신체 능력 수치와 특성 모두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큰 효과가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적인 힘을 이끌어낼 수도 있…….
―삐이이이이.
“윽?!”
“지의?”
“신지의 헌터!”
그때였다. 끔찍한 이명과 함께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머리가 어지러워 상체를 숙인 채로 최대한 숨을 들이마셔 봤지만 그럴수록 목구멍만 더욱 따가워질 뿐이었다.
‘젠장할, 무리했구나.’
센의 특성을 활성화하는 데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한 모양이었다. 얼른 이 성능들을 꺼야 하는데 상태창을 켤 정신조차 없어 자꾸만 의식이 끊겼다.
“지의!”
비스의 목소리와 함께 그대로 정신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