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전부 국가 차원에서 배리어 겔의 계약이 완료된 상태다.”
“비협조적으로 유명한 대륙인데 의외네요.”
“부정할 순 없군. 하지만 체스터, 그건 네 협상 실력이 부족해서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거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나?”
“아하하, 유럽 녀석들과는 애초에 교류도 별로 안 해 봐서요. 그렇게 매력적인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아, 아무튼 레일리 계속 얘기해 봐.”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끊자 레일리가 인상을 팍 구기며 말을 덧붙였다.
“국가 소속 기관과 취약 계층들이 거주하는 거주지역 중심으로 설치를 하는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 중이라고 하더군. 길드들은 알아서 하기로 했고. 아, 그리고 설치는 2월이나 3월 중으로 전부 끝날 거다.”
“대단하네. 유럽 쪽은 큰 걱정 없겠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만족]
레일리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굳이 상태창을 읽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 상태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은근히 알기 쉬운 구석이 있다니까.
“일본도 유럽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때 센이 입을 열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을 덧붙였다.
“저희도 배리어 겔 계약 자체는 완료한 상태입니다. 특히 신제품인 Q 타입과 P 타입도 우리 나라에서 먼저 시범 운영하기로 했고요.”
“시범 경기 중에 계약이 체결된 것 같던데 생각보다 엄청 빠르게 진행됐네요.”
“신제품을 묶어서 계약해서 그럴 거예요. 야마모토가 협상에 도가 튼 사람이니 아마 안 소장에게도 매력적인 방향으로 제안을 했을 겁니다.”
‘하긴 생각해 보니 그때 배리어 겔 계약 얘기도 야마모토 씨가 먼저 꺼냈지.’
관중석에서 아자디바르 남매에게 먼저 다가가 계약 의사를 표하는 그의 모습이 금방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마워요, 센 씨. 많이 정신없었을 텐데.”
“별말씀을요. 큰일을 한 것도 아닌데요.”
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어딘가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저희도 꽤 괜찮은 사업을 진행 중인데, 공유해도 괜찮을까요?”
“아, 응. 얘기해 줘.”
이번엔 조슈아였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한번 정리한 후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속한 길드인 ‘불릿’은 던전 공략 전문 길드입니다. 미국 내 가장 많은 던전 소유권을 갖고 있는 길드인 동시에 던전 공략에 탁월한 헌터들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죠.”
조슈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어갔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저희 불릿이 던전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인 ‘DG허브’를 인수할 예정입니다.”
“DG허브?”
“네. 대충 이런 사이트입니다.”
그가 내 쪽으로 핸드폰을 내밀자 가운데 껴 있던 레일리가 그것을 대신 전달해 주었다. 핸드폰 화면에 영어가 한가득 있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등급별로 분류한 던전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는 사이트라는 건 금방 알아차렸다.
“원래 이 사이트는 헌터들이 던전에 대한 정보와 팁을 주고받는 사이트였죠. 더 많은 정보를 보려면 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럼 너희가 이걸 인수하는 이유는 뭐지? 정보 독점은 아닐 것 같은데.”
“당연히 아니죠.”
조슈아는 레일리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곤 말을 덧붙였다.
“저희가 갖고 있는 던전에 대한 모든 정보와 경계를 공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말로?!”
“네. 물론 무료로 공개하는 건 아니고, 판매할 예정이에요. 등급에 따라 1만 달러에서 최대 30만 달러 정도로 가격이 정해질 것 같아요.”
“자원봉사나 다름없군.”
“맞아요. 저희 길드 혼자서 모든 걸 막을 수 없으니 서로 돕고 살아야죠.”
레일리의 말에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거 완전 횡재잖아?’
지옥도는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던전들을 엮어 만든 재앙이기 때문에, 던전의 공략법을 모두가 숙지하고 있다면 공략 난이도는 급격히 낮아진다. 98번째 회귀에서 지옥도를 막아낼 수 있던 것도, 내가 아득바득 모은 던전에 대한 정보 덕분이었다.
아무리 유료라고 해도 조슈아가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공개하게 되면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이 정보를 볼 수 있게 된다. 즉, 모두가 지옥도를 대비할 수 있게 된다.
“아, 그리고 미국 던전은 물론이고 저희가 공략했던 해외 던전들도 공개할 거예요. 유럽에 있는 던전 몇 개는 그 대~단한 비밀 유지 협약 때문에 어렵겠지만요.”
“어느 던전이지? 지금 대부분의 유럽 던전 소유권은 우리가 갖고 있으니 그건 내가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군.”
“그래 주시면 좋죠.”
내가 바라던 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조슈아, 고마워.”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조슈아 체스터’가 동요한다.]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서 고마움이 치고 올라왔다. 그대로 진심을 전하자 조슈아는 즐겁다는 듯 싱긋 웃었다. 얇은 쌍꺼풀이 자리한 눈이 반달로 접혔다.
[발언 결과 : 만족]
“벤자민이랑 아직 하고 싶은 게 많거든요. 그러려면 지옥도를 빨리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아마 꽤 노력했을 것이다. 분명 반발하는 길드원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조슈아는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알다시피 우리 쪽은 여건이 그렇게 좋지 않다.”
정적을 깨고 비스가 말문을 텄다. 그가 골치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자 레일리가 대답했다.
“그쪽 지역은 아직도 체계가 안 잡힌 건가?”
“그래. 노력을 안 하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 무방비 상태로 있던 지역들이 고작 몇 년 사이에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는 건 아무래도 어렵지.”
비스가 정식 헌터로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 사정이 조금 좋아진 줄 알았는데 한두 달 사이에 큰 변화를 기대하는 건 욕심이었나 보다.
“그래도 우리도 배리어 겔을 계약하긴 했다.”
“앗, 정말로?”
“그래. 대신 지정 대피소에만 설치하는 걸로 했지. 주요 건물까지 전부 챙기기엔 시간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니까.”
배리어를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비스도 그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인상으로 말을 덧붙였다.
“인접한 국가들도 비슷한 상황이겠지. 아마 진짜 지옥도가 열리면 네팔을 중심으로 연합 세력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기면 그쪽 지역을 잘 부탁할게.”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셈이다.”
비스의 이야기를 끝으로 정보 교환이 끝났다. 내 예상보다 훨씬 좋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준 것이다. 지옥도를 막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말이다.
‘이제 남은 건 서로를 동료로 인식하는 거겠네.’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다들 고마워. 몇 개월 만에 엄청 많은 일을 해줬네.”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만족]
다들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웃어 보인 후 바로 화제를 돌렸다.
“언젠가 같이 싸워야 할 수도 있으니까, 슬슬 던전으로 가도 될까?”
* * *
―끼익.
코를 찌르는 피 냄새에 헝가리 A급 던전에 들어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비스를 마지막으로 모두가 던전 안에 도착했고 저마다 무기를 꺼내며 전투를 준비했다.
“정말 오랜만이군. 여기서 네 힘을 처음 봤었는데.”
메이스로 제 어깨를 통통 두드리던 레일리가 이야기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는 레일리의 얼굴이 보였다.
헝가리 A급 던전에 처음 왔을 땐 나나 레일리나 둘 다 서로 날이 잔뜩 서 있는 상태였는데, 그때를 아름다운 추억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웃음이 샜다.
“4페이즈로 된 보스 몬스터 한 마리만 존재하는 것 맞죠?”
“응. 엄청 어렵진 않을 거야.”
“정말로 호흡을 맞추기 위한 전투군요.”
조슈아는 눈으로 사람들을 죽 훑다 갑자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서로 발목 잡는 일만 안 생겼으면 좋겠는데.”
그러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에게 협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도 입 밖으로 말만 안 꺼냈지 조슈아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공허한 눈으로 전진할 뿐이었다.
아직 에르제베트의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인데 삐걱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꼭 소환수 클랜에 처음 들어갈 때를 보는 듯했다.
대놓고 싸우는 조슈아와 레일리는 장미랑 호양이,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비스는 덕배, 그리고 별다른 말을 얹지 않는 센은 두심이랑 닮아 보였다.
‘…잠깐.’
우리 클랜의 믿음직스러운 소환수들을 떠올리고 나니 답이 없을 것 같던 지금 상황에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소환수들의 호흡이 맞지 않아 그들의 전투 스타일을 바꿨고, 그 이후로 모든 전투가 수월해진 동시에 협동의 진가를 알게 되어 소환수들의 사이가 많이 가까워졌다.
‘비록 지금은 소환수가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좋게 만드는 것이라 난이도가 배가 되겠지.’
하지만 이들의 전투 스타일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업적 ‘구원자의 가호 아래’를 사용해 그들의 능력을 더욱 키워줄 수도 있으니 시도해볼 만하다.
“이봐 지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지?”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다들 이렇게 모여 있으니까 조금 두근거려서.”
“허, 두근거릴 일도 참 많군.”
비스는 퉁명스럽게 말을 뱉곤 저택의 정원으로 발을 들였다.
―끼이익.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정원을 지나 어느새 에르제베트의 저택 안까지 도착했다. 융단이 깔린 긴 복도와 그 끝에 있는 거대한 여자의 뒷모습을 보니 이 던전을 돌았던 때가 금방 생각났다.
나는 살짝 달려 나가 앞장선 후 그대로 뒤를 돌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안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시작이야. 공략법은 다들 기억하지?”
“그럼요.”
“물론이다.”
모두 전투를 치를 준비가 끝난 듯했다. 든든한 기분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에르제베트의 방을 향해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