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59화 (259/366)

259화

“와…….”

알렌의 웜홀을 타고 노블레스 길드의 연회장 안에 도착했을 땐 사도들을 맞이할 모든 준비가 끝난 후였다.

연회장은 꽃과 미술품으로 가득해 미술관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고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그것들을 더욱 빛나게 했다.

중앙으로 발을 옮기자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난주에 왔을 때도 그렇고… 디저트가 엄청 화려해졌네요.”

“최근에 프랑스에서 파티시에 한 분을 모셔왔거든요. 매일 맛있는 디저트를 무료로 먹을 수 있어서 저희 길드원들이 엄청 좋아해요.”

알렌이 자랑스러운 듯 눈을 빛내며 미소를 지었다. 테이블엔 사치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화려한 접시와 찻주전자가 사람 수별로 놓여 있었다. 거의 예술의 경지에 오른 비주얼의 디저트도 심심찮게 보였다.

―끼익.

그때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레일리가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하얀 머리와 대비되는 검은 가죽 코트가 그의 종아리 근처에서 펄럭거렸다.

“왔나?”

그가 내게 짧게 인사를 건넨 후 연회장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내부가 만족스러웠는지 씩 웃곤 내 앞에 바로 섰다.

“진짜로 전투복 입고 왔네.”

“뭐,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 않나.”

레일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곧 말을 덧붙였다.

“다른 녀석들도 던전 공략에 동의한 것 맞나?”

“응. 전부 가겠다고 했어.”

“하, 다들 보통 배짱들은 아니군.”

“좀 놀랐어. 망설이지도 않더라고.”

지난주 레일리와 헤어진 후 나는 사도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다 같이 만나서 정보를 공유하고 호흡을 맞춰보기 위해 헝가리 A급 던전을 함께 돌자는 제안을 모두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이곳에 모든 사도들이 모일 예정이었다.

―탁.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기다리고 있다] ―비스

[언제 올 셈이야?] ―조슈아

[준비되었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센

약속 시간에 가까워지자 세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알렌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신호를 주자 그가 내 뜻을 단번에 알아듣고 웜홀을 열었다.

“그럼 모셔올게요~”

―우우웅.

그가 검은 균열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나와 레일리는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았다.

‘괜찮겠지?’

이 만남을 만들 때까지의 과정이 너무 순탄한 탓에 오히려 걱정되기 시작했다. 딱히 충돌할 이유는 없겠지만 막상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하니 내가 무언가 놓친 부분이 있을까 봐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게 됐다.

―또각.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게타 소리가 연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센이 알렌의 부축을 받으며 웜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알렌은 센이 연회장에 완전히 착지한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웜홀 안으로 들어갔다.

“센 씨!”

“신지의 헌터, 오랜만입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미소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쪽으로 걸어올 때마다 그의 외투에 수놓아진 금색 실이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끼익.

그는 내 왼편에 앉은 후 몸을 살짝 앞으로 빼 레일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보기만 하다, 이내 센이 픽 웃곤 입을 열었다.

“통성명은 사람들이 다 모인 다음에 하죠.”

“…동의한다.”

―타닥.

“자, 저~기 앞으로 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연기라고 생각할 정도로 지나치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슈아가 내 쪽을 향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신지의 헌터?”

“그런 친절한 말투 정말 오랜만이네.”

“아하하, 이제 이걸 제 진짜 성격으로 받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벤자민에게 모범이 되는 양육자로 보이려고 X나…….”

갑작스러운 비속어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고작 몇 달 만에 연기로 만들어진 성격을 실제 자기 모습으로 만드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았다.

―찰싹.

조슈아는 제 입을 스스로 때린 후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매우 노력 중이거든요.”

“푸핫!”

레일리가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조슈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지만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센과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탁.

어색한 정적을 깨듯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자, 마지막 손님이십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알렌이 도망치다시피 웜홀 안으로 쏙 들어가자, 그 앞에 있던 비스가 어정쩡한 자세로 웜홀과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랜만이야, 비스.”

“그래. 정말 오랜만이…….”

“오랜만이구나, 빛의 아이야!”

비스의 등 뒤에서 칼리가 불쑥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비스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흠칫 떨었고 곧 미간을 찡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칼리 님. 제가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아, 미안하구나. 반가워서 그만.”

칼리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테이블에 앉은 사도들을 수십 개의 눈으로 쭉 훑었다.

“재미난 존재들만 모였군. 아주 흥미로워.”

“소환체가 신인 것보다 흥미로운 게 있다니, 그거야말로 놀랍군.”

“맹랑한 녀석도 있고 말이야. 아하하!”

―쉬이익.

칼리는 레일리의 말에 대답한 후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모습을 감췄다. 비스는 벌써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짚더니, 입고 있던 붉은 망토를 등받이에 대충 걸쳐 놓으며 레일리의 옆에 앉았다.

레일리, 센, 조슈아, 비스, 그리고 나. 창조자의 구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 *

“큼흠…….”

왠지 모르게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꽂혀 뭐라 말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 느껴졌고 나는 목을 한번 고른 후 입을 열었다.

“다들 와 줘서 고마워.”

“…….”

“…일단 좀 먹으면서 할까?”

“하하하!”

미숙한 진행이 우스웠는지 레일리가 크게 웃었다. 그러곤 집게로 미니 케이크를 집어 제 접시 앞으로 가져왔다.

“그래.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내가 가져온 거다. 마음껏 들도록.”

레일리의 말에 다들 저마다 차를 따르거나 케이크를 가져오며 이 적막을 해소하려고 했다. 나도 바로 앞에 있던 파이 하나를 가져와 나이프로 조금씩 잘라 먹었다. 단 것이 들어가니 긴장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다.

―달그락.

“그럼 서로 자기소개 좀 해도 될까요?”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자 센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우리를 향해 시선을 건넸다. 주변을 슬쩍 보니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센이었다.

“사도명 영능, 센입니다. 일본 헌터 협회의 1대 협회장입니다.”

“본명이 따로 있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네. 하지만 센으로 불러 주시면 좋겠어요.”

“그러죠.”

조슈아가 센을 향해 싱긋 웃으며 대답하곤 손으로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불릿의 길드장, 조슈아 체스터입니다. 사도명은 가면이었고, 작년에 창조자로부터 완전히 해방됐습니다.”

“텍사스에 있는 그 길드 맞나?”

“네, 맞습니다. 알고 계신다니 영광이네요.”

“하, 말 한번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군. 물론 영광스러운 일이긴 하겠지만 말야.”

조슈아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그 원인인 레일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잔 안에 있던 홍차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탁.

그가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자 모두가 레일리를 쳐다보았다.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 레일리라고 불러라. 영국 제1 길드이자 유럽 길드 랭킹 1위인 노블레스의 길드장이다.”

“탕자죠?”

“그래.”

“후후, 다분히 그렇게 보이네요.”

“만약 그게 도발이었다면 실패했군, 체스터. 난 공영 방송에서도 미친X 소리 들어왔던 사람이라서 말이야.”

“그런가요? 앞으로 영국 뉴스도 종종 챙겨 봐야겠네요. 엄청 공정하고 정확하네.”

조슈아의 말에 레일리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조슈아는 에끌레어를 반으로 갈라 입에 넣곤 레일리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하여간 둘 다 성격 한번…….’

두 사람의 신경전 때문에 차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유치해서 원…….”

그때 비스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갔다. 비스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후 입을 열었다.

“비스 바즈라차르야, 사도명은 쿠마리였다. 현재는 네팔 던전 관리국 소속이다.”

“칼리의 창으로 활동하셨던 분이죠?”

“뭐, 그랬지. 내 얘기가 일본까지 흘러갔나?”

“뉴스에서 가끔 보였어요.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을 구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 소개됐거든요.”

센이 비스를 향해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사도였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지만.”

“머, 멋있긴 뭐가.”

센의 칭찬에 비스가 잠시 버벅거렸지만 곧 평소의 까칠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뭐, 이만하면 다들 소개는 끝난 것 같군, 지의.”

“아, 응.”

레일리가 내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겼고 난 사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전에 얘기한 대로 지금 비스가 갖고 있는 음악가의 파편을 제외한 모든 창조자의 파편이 파괴되었어.”

“쿠마… 아니지, 비스 씨의 파편을 남겨둔 이유는 뭐죠?”

“창조자의 경계심을 낮추려고. 갑자기 모든 파편이 사라지면 의심할 테니까.”

‘센을 강제로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훨씬 빠르고 전략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는데 말이지.’

그게 변수였다. 공략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신지의 헌터는 의심받고 있습니다.”

그때 센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나를 흘긋 본 후 다른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조자를 통해 신지의 헌터가 회귀했다는 걸 전해 들었거든요.”

“뭐?!”

“그걸 알아차렸다고요?”

비스와 조슈아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화들짝 놀랐다. 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완벽하게 확신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높은 가설로 보고 있죠.”

“쯧, 귀찮게 됐군.”

레일리가 혀를 차며 미니 샌드위치를 입에 쑤셔넣었다.

‘아마 김강희는 확신하고 있을 거야.’

미식가의 파편을 파괴한 후 둘이서 식사를 했을 때, 그는 내 회귀에 대해서 어렴풋이 아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세빈이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을 때, 나에 대한 의심을 더욱 키웠을 거고.

난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린 후 숨을 들이마셨다.

“일을 이 정도로 진행시켰으니 의심받는 건 어쩔 수 없지.”

“…….”

“그러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더욱 공격적으로 움직이자.”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욕]

내 말에 모두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의지로 빛나는 그들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비스의 파편은 늦어도 이번 달 내로는 해결하는 걸로 하자. 아, 그리고 다들 배리어 겔 계약 상황은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

“하, 그 질문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레일리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의기양양한 태도로 나를 내려 보았다.

“그럼 나부터 이야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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