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친해지길 바라>
―달그락.
수저까지 전부 물로 헹구고 나서야 설거지가 끝났다. 고무장갑을 싱크대에 대충 걸쳐놓은 후, 거실로 발을 옮겼고, 그러자 바닥에 누워 있던 녹두가 눈만 살짝 굴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툭.
털썩 주저앉아 녹두의 등에 얼굴을 묻자 녀석은 고개를 되는대로 꺾어 코끝으로 내 등을 톡톡 건드렸다. 이따금씩 그릉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얼마만의 평화냐…….’
물론 비스와 만나서 그의 파편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지만, 부모님이 만들어 놓고 간 반찬에 저녁을 먹고 녹두와 함께 거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꿈만 같았다.
“하아…….”
나는 녹두에게서 얼굴을 뗀 후 이번엔 녀석의 등을 베고 누웠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녹두의 몸 때문에 머리가 흔들렸지만 묘한 안정감이 느껴져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센이 일본으로 돌아간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그가 귀국하기 전에 그에게 지옥도와 김강희의 정체, 그리고 사도에 대한 정보를 전부 전달했고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까지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많은 건물에 배리어 겔을 설치하는 것, 그리고 일본에서 생성되고 소멸된 모든 던전들의 정보를 모으는 것이었다. 다행히 둘 다 그의 능력 내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사도들도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겠네.’
센에게 전달한 것을 마지막으로, 비로소 모든 사도들이 자신이 누구와 한배를 탔는지 알게 되었다. 창조자의 사도로 엮였을 땐 동료라는 인식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옥도를 부수고 종말을 막기 위해 함께 싸우는 동료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한번 모이는 게 좋겠다. 던전에서 합을 한 번 맞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읏차.”
잠들 뻔한 정신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다. 내 행동에 녹두가 아쉽다는 듯 꼬리로 내 몸을 휘감았고 난 그런 녀석의 어리광을 받아주기 위해 북슬북슬한 턱을 벅벅 긁어줬다.
‘상태창.’
만약 모든 사도들과 함께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다면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는 상태창을 한참 눈으로 훑다 업적 부분에서 시선을 멈췄다.
<업적>
[구원자의 가호 아래]
[다른 사람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업적]
[업적 효과 : 활성화 시 구원자의 시야에 들어온 생명체 중 지정한 대상의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한다. 대상이 많을수록 체력이 많이 소비된다.]
‘신체 능력 대폭 상승이라고 되어 있는데, 과연 얼마나 큰 차이가 날까.’
저 효과를 활성화하는 데 얼마나 많은 체력이 소비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면 이 업적은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을 만들어 갈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철컥.
인벤토리에 넣어둔 자동 통역기를 귀에 끼운 후 핸드폰에서 레일리의 연락처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먼저 연락을 준 건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응. 간만에 좀 쉴 틈이 생겼거든. 너도 별일 없지?”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워.
레일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곧 내쉬었다. 지옥도의 존재를 알고 있어서인지, 완전히 편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무슨 일이지? 긴 얘기가 될 것 같으면 지금 당장 알렌을 시켜서 널 이쪽으로 데려오게 할 수도 있는데.
“아, 얼굴 보고 얘기하면 좋을 것 같긴 하네. 부탁할게.”
―1분 안에 알렌이 네 쪽으로 갈 거다. 조금만 기다려라.
“알겠어.”
녹두를 다시 팔찌 안으로 집어넣은 후 현관에서 슬리퍼를 챙겨 알렌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납치 이후로 노블레스에 가는 건 처음이네.’
몇 달 전에 납치당했던 장소에 내 발로 직접 들어가는 게 좀 우스워 혼자 헛웃음을 터트렸다.
―치지직.
그때 거실 한가운데 검은 균열이 생기더니 그 속에서 갈색 꽁지 머리가 튀어나왔다. 머리의 주인공인 알렌은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지이 씨! 오랜만이에요!”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것은 여전히 힘든 모양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알렌 씨. 거의 4개월 만인 것 같네요.”
“벌써요? 시간 정말 빨리 가네요. 아, 일단 들어오세요!”
균열 안으로 발을 들이자 몸이 붕 뜨는 감각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탁.
5초 만에 어두웠던 주변 풍경이 레일리의 화려한 집무실로 바뀌었다. 차가운 대리석이 발바닥에 닿자마자 곧바로 챙겨온 슬리퍼를 신으려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커다란 그림자가 내 위로 걸렸다.
“하, 알차게도 챙겨왔군.”
“맨발로 올 수는 없으니까.”
허리를 펴 레일리를 쳐다보자 평소와 다름없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보였다.
“일단 앉지. 식사는 했나?”
“응. 방금 저녁 먹고 왔어.”
“다행이군. 마침 나도 티 타임을 갖고 있었거든.”
그는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은 후 집무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원래 이렇게 화려했나?’
테이블 위엔 못해도 10가지는 넘을 디저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쁜 생김새에 조금 압도됐지만, 레일리는 아무렇지 않게 쿠키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다.
“수고했다, 알렌.”
“네~ 돌아가실 때 불러 주세요!”
알렌은 생글생글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고 방 안은 레일리가 홍차를 따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가 건네는 찻잔을 받으며 소파에 가볍게 등을 기대자 그가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자, 그래서 할 말이 뭐지?”
“사도들끼리 한번 만나 보는 거 어때?”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레일리 힐데가르트 아서 프레데릭’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레일리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내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는 듯한 행동이었다.
“아직 비스가 갖고 있는 파편을 파괴해야 하지만, 일단 사람들 자체는 전부 내 편으로 끌어왔어. 다 같이 모여서 한번 정보를 공유하고 작전을 세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리가 있긴 하군.”
―달그락.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건 여전히 좀 껄끄럽지만 말이야.”
“껄끄럽다고?”
“그래.”
내가 앞에 있던 미니 타르트를 베어먹는 동안 레일리가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채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대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마주하게 생겼는데 안 껄끄럽고 배기겠나?”
“…도대체 어떤 식으로 대화를 했길래 그러는 거야.”
“익명의 무서움을 모르는군. 서로의 정체를 모르니 거기 있던 모두가 서로를 물어뜯고 무시했다. 그 당시엔 어떻게 저런 녀석이 절대자의 사도씩이나 됐는지 이해하지 못했지.”
‘엄청나게 안 맞았나 본데.’
레일리, 조슈아, 비스, 센. 네 사람 모두 개성도 강하고 각자 추구하는 것도 다르다 보니 대화 코드가 끔찍하게 맞지 않았나 보다. 레일리나 연기하지 않는 조슈아의 성격은 말할 것도 없고, 비스도 경계심이 높다 보니 말이 곱게 나왔을 리가 없다.
사도들을 하나둘씩 떠올리다 보니 레일리의 표현에서 가장 거리가 먼 한 사람이 남았다.
“센도?”
“아 그 양반. 그 양반은…….”
레일리가 대답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중에 가장 어른스러웠지.”
“아, 역시 센은 한결같았구나.”
“그래. 그 양반 정체를 알게 됐을 때도 크게 놀라지 않은 것도 그 성격 때문이었다.”
레일리는 한숨을 길게 쉬더니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일단 대충 상황은 파악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유대감은커녕 서로를 향해 이빨만 드러내던 사이인데, 나로 인해 갑자기 동료가 됐으니 모두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기엔 그들을 동료로 만든 보람이 없어.’
엄청난 신뢰 관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없어도 정보와 전략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사이가 됐으면 하는 것뿐이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레일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사도들끼리 서로 왕래하는 사이가 되면 좋을 거야. 최대한 빨리 한번 만나는 걸로 하자. 기왕이면 던전도 한번 돌아보고.”
“던전까지? 이거 원 강제로 짝꿍 만들어 주는 유치원 선생이구만.”
“다른 사도들한테는 내가 미리 말해 놓을게. 아, 그리고 하나 더.”
말을 하다 보니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비밀스럽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알렌 씨 통해서 사도들을 전부 이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을까?”
“정식 입국 말고 지금처럼 몰래 만나는 걸 말하는 건가?”
“응.”
“흐음.”
레일리가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몇 번 두드리다 곧 대답했다.
“가능하긴 하다. 대신 한 며칠 정도 시간은 좀 걸릴 거다. 알렌이 그들을 직접 볼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렇겠네. 알겠어.”
“…확실히 눈빛이 달라졌어.”
“응?”
―덜컹.
레일리가 몸을 앞으로 쭉 빼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과 테이블이 그의 무릎에 부딪혀 그릇들이 덜컹거렸지만 다행히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깜짝이야…….’
황금색 눈동자가 날 잡아먹을 것처럼 이글거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백발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백사자를 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 성숙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봤던 애송이 티는 완전히 사라졌군.”
“애송이라니.”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돌리려 한 순간 레일리가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고 이내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사도 중에선 내가 가장 처음으로 동료가 됐으니, 애송이였을 적 네 모습을 아는 것도 나뿐이겠구나.”
“그래서 다른 사도들한테 텃세 부리겠다는 거야?”
“그것도 재밌겠군.”
“어휴.”
농담으로 얘기한 건데 레일리는 내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슬슬 가 볼까.’
머핀 하나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일리가 내 얼굴을 따라 고개를 위로 들었다.
“이제 갈 건가?”
“응. 사도들한테 연락 다 돌리면 연락 줄게.”
“알겠다. 나도 내일 바로 알렌을 보내서 사전 작업을 해 두지.”
레일리는 말을 마친 후 곧바로 알렌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끊은 지 10초도 되지 않아 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게 고개를 살짝 숙인 후 곧바로 웜홀을 열어 주었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그래.”
레일리를 향해 손을 흔든 후 웜홀 안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