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57화 (257/366)

257화

오랜만에 보는 사명 상태창이다. 한동안 눈에 안 띄었기도 하고 의식을 하고 지낸 것도 아니라 ‘사령탑’의 달성도가 이 정도로 많이 쌓인 줄 몰랐다.

“신지의 헌터?”

“아.”

상태창 너머로 보이는 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난 곧바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 저도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요.”

센은 차분히 미소 지으며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중에 더 자세히 봐야겠어.’

―치지직.

센과 손을 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다른 상태창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났다.

[통제받는 시간선이 영원히 소멸합니다.]

―쿠구궁.

지긋지긋하던 희생하는 화가와의 전투가 막을 내린다는 알림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작업실 풍경은 서서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사방이 새하얀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세빈이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미 파편 밖으로 빠져나간 건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걸로 창조자와의 관계도 끝나는 건가요?”

센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제가 파괴해야 완전히 깨져요.”

“흠, 그렇군요.”

“…지금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철컥.

벌써 세 번이나 한 일인데 왠지 모르게 못할 짓을 하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우물쭈물하며 그를 향해 자아를 조준했다. 센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내가 자신을 해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싱긋 웃어 보였다.

“센 씨, 저희의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각오하고 있어요. 절대자씩이나 되는 존재를 상대하려면 보통 싸움이 아니겠죠.”

―또각.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와 자아의 바로 앞에 섰다.

“그래도 질 생각 없잖아요? 저나 신지의 헌터나.”

여유로운 그의 태도에 나까지 동화된 듯, 가슴 깊은 곳에서 이유 모를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래, 이젠 정말로 끝이 보여.’

아직 비스가 갖고 있는 파편이 남았지만, 센을 마지막으로 창조자의 모든 사도들을 내 동료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남은 건 그들과 함께 종말을 대비하고 함께 싸워서 이기는 일뿐이다.

―우웅.

카르마의 탄환을 장전하자 자아가 손안에서 약하게 진동했다.

[카르마의 탄환]

[각성자에게 씌워진 업을 파괴할 수 있다]

[파괴 시 업으로 인한 모든 효과가 사라진다]

[*말의 씨앗이 개화한 상대에게만 사용 가능]

[파괴할 수 있는 업이 감지되었습니다]

[‘카르마 : 희생하는 화가’]

[절대자 ‘창조자’가 각성자 ‘아마노 레이’에게 씌운 희생하는 화가의 업. 각성자가 액자 속에 스스로 갇힐 시 소원이 실현된다.]

“아…….”

내 주위로 빛이 모여들자 나를 보는 센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는 그의 몸 안에 기생하고 있을 창조자의 파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카르마 : 희생하는 화가가 파괴되었습니다]

[각성자 ‘아마노 레이’가 절대자 ‘창조자’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파열음과 함께 센의 목숨을 쥐고 있던 창조자의 파편이 완전히 사라졌다. 센은 탄환이 관통한 가슴을 손으로 더듬으며 잠시 혼란스러워하다 이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제 창조자는 더 이상 센 씨를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나갈…….”

“앗!”

그때 센이 크게 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고, 센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사명이……!”

“네?”

상태창이라도 읽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방금 분명 사명이라고 했는데……?’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센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명의 달성도가 8%에서 99%로 올라갔어요.”

“99%요?!”

난생처음 듣는 상승 폭에 입이 쩍 벌어졌다. 늘 차분하고 침착함을 유지하던 센이 잔뜩 흥분한 채 말을 이어갔다.

“창조자와 함께하는 동안 달성도가 계속해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더 조바심이 났던 건데, 방금 신지의 헌터의 탄환을 맞고 나서 이렇게 된 겁니다!”

“다행이에요.”

“제가 사람들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킬 운명이란 걸 증명한 거예요!”

―텁.

그는 급기야 내 어깨를 끌어안고 웃음을 터트렸다. 검술로 단련된 팔이 몸을 단단히 옭아매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나도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나까지 기분 좋아지네.’

센이 ‘아마테라스의 의지’라는 사명을 얼마나 이루고 싶었는지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는 걸로 저렇게 기뻐하는 사람이 어떻게 선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을 더 일찍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지금이라도 만났으니 됐죠.”

센이 한 발짝 물러나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약간 상기된 얼굴을 보니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러더니 조금 부끄러웠는지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하하하… 실례했습니다. 너무 기뻐서 그만.”

“이해해요. 저였어도 그랬을 거예요.”

그는 숨을 깊게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고, 난 그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창조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여기서 나갈까요?”

“좋습니다.”

―파아앗.

그를 향해 미소를 짓자 새하얀 공간이 어느새 내 시야까지 집어삼켜 순식간에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쿵.

“아! 나왔다!”

붕 뜨던 감각이 사라지고 발이 어딘가를 딛자 이시카와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주위를 둘러보니 센의 병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들어갔던 액자는 병실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아수라장이었던 내부는 그새 정리를 한 건지 새것처럼 깔끔했다.

“센 님!”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그때 병실 안으로 카렌 씨와 야마모토 씨가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내 옆에 있던 센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그를 부축하더니 질질 끌다시피 침대 쪽으로 데리고 갔다.

―끼익.

센이 침대에 앉자 카렌 씨가 허리를 숙여 그의 몸을 살폈다. 센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곧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카렌 씨가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전 괜찮아요. 츠구나가, 야마모토 둘 다 계속 기다리신 건가요?”

“당연하죠! 센 님이랑 애들이 던전에 빠졌다는데!”

“애들 아니거든?!”

카렌 씨의 말에 이시카와가 발끈했지만 그는 신경도 안 쓰고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혹시라도 센 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저희들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센이 단호하게 이야기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센답지 않은 행동에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커다래졌고, 센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전 여러분들을 비롯한 국민들, 제 나라를 두고 죽지 않을 거예요. 끝까지 살아남아서 지킬 겁니다.”

“센 님……!”

센의 시선이 잠깐 나를 향했다. 그가 나를 향해 생긋 웃자 그의 눈가에 그동안 싸워온 세월을 실은 주름이 졌다. 그는 헌터들을 눈으로 쭉 훑은 후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은퇴는 철회해야겠군요.”

“센 님!!”

이시카와와 사와구치도 센을 향해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엉겨 붙은 네 사람이 침대 위로 쓰러졌고, 맞은 편에서 지켜보던 야마모토 씨가 우물쭈물하다 곧 센에게 안겼다.

‘일본 쪽은 완전히 안심해도 되겠어.’

―텁.

그 훈훈한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쯤 세빈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올리니 은은하게 미소를 띤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벌어진 일치고는 최상의 결과가 나왔네.”

“그러게. 도와줘서 고마워. 아, 최민 헌터도요.”

“신지의 헌터가 무사해서 다행일 따름입니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최민 헌터에게도 말을 건네자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일 뿐이었다.

‘아, 새로 생긴 업적을 좀 확인해 볼까.’

그러고 보니 사명 ‘사령탑’의 보상으로 받았던 업적을 아직까지 확인하지 않았다. 난 상태창을 열어 곧바로 사명을 찾았고, ‘생명의 은인’ 밑에 생긴 낯선 글자를 천천히 읽어갔다.

<업적>

[구원자의 가호 아래]

[다른 사람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업적]

[업적 효과 : 활성화 시 구원자의 시야에 들어온 생명체 중 지정한 대상의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한다. 대상이 많을수록 체력이 많이 소비된다.]

“어, 어?”

“왜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최민 헌터와 세빈이가 동시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이겨내며 업적을 다시 한번 읽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도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생명의 은인만큼이나 괜찮은 업적이잖아?’

누군가를 대신해서 공격을 받았을 때 절대 죽지 않는 업적과 보는 것만으로 강화 효과를 걸어줄 수 있는 업적.

완벽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네팔로 날아가 비스의 파편을 해결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이 생겼다.

“지의야?”

“…괜찮으십니까?”

“아.”

일단 혼란스러워하는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좋은 게 손에 들어와서요.”

* * *

[속보, 돌발성 던전에 빠진 한국, 일본 헌터 전원 생존]

[한국 내 돌발성 던전 출현, 사상자 0명 기록]

[일본 헌터협회 전 회장 ‘센’, 은퇴 발언 철회 → “평화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

태블릿으로 기사를 보던 레일리가 중간에 들어간 지의의 사진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하여간 조용히 처리하는 법이 없군, 지의.”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지만 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건 숨길 수 없었다. 그는 화면을 몇 번 두드리며 지의와 관련된 뉴스를 찾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와 손가락을 멈췄다.

“쯧.”

그가 혀를 찬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금방 끝났군. 총리가 뭐라고 했지?”

―정부 차원에서의 배리어 겔 계약은 이미 체결됐다고 합니다. 영국 보급량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수급 시점은?”

―내년 2월 중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괜찮네.”

―오독.

레일리가 집무실 테이블에 놓인 레몬 쿠키를 씹어먹은 후 통화 상대에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영국만으로는 부족해. 내가 곧바로 정부에 연락을 취했다간 우리 글로리아 전하께서 나를 죽이려 들 테니 제1 길드 위주로 연락 돌려. 늦어도 내년 상반기까지는 그 배리어를 수급받으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레일리가 전화를 뚝 끊은 후 핸드폰을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이걸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지옥도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첫 단계, 배리어 겔의 배포. 그것만 제대로 완수하면 피해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지의 네가 노력하는 만큼은 나도 힘을 써 줘야지.’

레일리는 픽 웃으며 한참 먼 곳에 있을 지의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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