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30년 전.
“이야아아!!”
―탁!
죽도 두 개가 서로 맞부딪히다 이내 떨어졌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도복이 펄럭거렸고, 대련 중인 두 사람의 숨소리가 도장에 가득 찼다. 도복을 입은 다른 사람들도 도장 주변을 기웃거리며 그들의 경기를 몰래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여명 검도장의 후계자가 될 ‘아마노 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탁, 탁, 탁.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 쪽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레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움직임으로 그를 몰아 세우더니 곧 양손을 높이 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쿵.
머리를 맞은 상대가 자리에 주저 앉았다. 잠깐의 침묵 후, 경기를 바라보고 있던 중년 남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
“승자, 아마노 레이!”
“와아아!”
도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환호했다. 그 소리에 레이가 몸을 흠칫 떨더니 호면을 벗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존경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으… 진짜 누나한테는 한 번을 못 이기네.”
레이의 남동생, 아마노 토우야 역시 호면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레이는 토우야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킨 후, 서로 허리를 숙여 인사함으로써 경기를 끝냈다.
“네가 이 도장을 맡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런 서운한 말씀 하지 마세요, 아버지.”
“맞아요. 아직 혈기왕성하시면… 악!”
“이게 애비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남매의 부친이자 현 여명 검도장의 관장인 아마노 진이 커다란 손으로 토우야의 등을 내리쳤다. 토우야가 도장 바닥을 구르며 호들갑을 떨자 레이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곤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하나로 묶어 올렸다. 먹물에 담갔다 뺀 듯한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목 부근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역시 레이 님이야. 토우야 님도 엄청난 실력자인데 일격에 쓰러트리셨어.”
“저분 밑에서 검도를 배울 수 있다니… 진짜 운이 좋다니까.”
―달그락.
레이가 호구를 정리한 후 도장 밖으로 나왔다. 게타를 신으며 그의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야마자키 씨와 같은 무인과 함께 이 도장에 있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레이 님……!”
레이의 밤색 눈동자가 야마자키의 모습을 담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도요!”
야마자키와 그의 옆에 있던 동료가 함께 허리를 숙였다. 레이는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하며 도장 뒤쪽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여명 검도장, 명문 검도인 가문인 아마노 가(家)가 100년 넘게 지켜온 검도장이었다. 본래 아마노 가문의 뿌리는 사무라이에 있지만, 현대에 접어들면서 검도의 명문가로 바뀌었다.
그 가문의 차기 가주이자 검도장의 관장 후계자인 레이는 어렸을 때부터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왔다. 절제와 인내는 그의 삶이었고 선(善)은 그의 천성이었다.
일각에서는 그런 레이에게 ‘아마테라스의 현신’이라 칭송하기도 했다.
“후읍…….”
레이가 도장의 뒤편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풀 내음 가득한 공기가 그의 폐부에 가득 들어차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웃었다.
‘이런 날이 항상 이어졌으면 좋겠네.’
올곧은 심성과 무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수련하는 삶. 그 삶이 레이가 원하던 삶이자 이상 그 자체였다. 그는 매일 행복과 보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살았다.
―쿠구궁.
“…저게 뭐지?”
그가 집의 지붕 위에서 검은 균열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콰아앙!!
“윽?!”
검은 균열은 갑자기 크기를 키워 집을 그대로 반 토막 냈다. 흙먼지를 가득 실은 바람이 그의 얼굴 위에 훅 끼쳤고, 레이는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기침을 토해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지진인가?”
“산사태라도 난 거 아니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레이는 균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누나, 괜찮아?!”
“다친 곳은 없느냐, 레이!”
“토우야! 아버지!”
그런 레이의 뒤로 그의 동생과 부친이 허겁지겁 나타났다. 그들은 레이의 몸을 살핀 후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균열을 살펴보았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균열은 꿈틀거리며 형태를 바꿀 준비를 하는 듯했다.
“저게… 대체 뭐야?”
“산 짐승은 아닌 것 같구나.”
“…일단 사람들부터 대피시켜야 합니다.”
레이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머릿속으로 도장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다행히 오늘은 청년층들이 많아. 대피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거야.’
“알겠다. 내가 저들을 대피시키고 올 테니 잠깐만…….”
―쿵!!
진이 대답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균열이 네모난 형태가 되어 바닥 위로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검은 형체였던 그것은 시골 여관에서나 볼 수 있는 낡은 나무 문으로 변해 있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레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릿속이 서서히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문…?”
“진 님! 괜찮으신가요? 일단 ‘텐노카타나’는 챙겼습니다!”
“대피 준비도 끝났습니다!”
그때 젊은 여자 둘이 나타나 빠르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진은 그들을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제자들은 침착하게 이 상황을 이겨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사키 씨, 카오리 씨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저 문은 뭐죠? 산사태나 지진인 줄 알았는데…….”
미사키가 문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 모든 소란을 만들어 낸 원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은 물건이었다.
“저희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거라.”
“…일단 대피합시다.”
진의 말에 미사키와 카오리는 앞장서서 검도장 본관 쪽으로 달려 나갔다. 레이와 토우야도 침착한 그들의 태도에 안심하며 뒤를 따랐다.
―타닥.
가장 뒤에 있던 레이가 발을 멈추고 고개를 흘긋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원래 열려 있었나……?’
아까까지 닫혀 있던 문은 어느새 사람 한 명 정도 드나들 수 있는 틈이 만들어져 있었다.
“누나, 뭐 하고 있어? 얼른 가자!”
“…알았어.”
레이는 마지못해 몸을 돌리곤 본관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짐과 도장의 진검들을 갖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레이는 도장에 들어가 자신의 죽도를 챙겨 어깨에 메고 나왔다. 누군가가 사람들을 공격할 것 같다는 기묘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준비가 다 되셨으면 출발하겠습니다. 두 줄로 서서 차례로 내려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진의 말에 제자들은 줄을 맞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토우야, 레이. 너희들은 가장 뒤에 서라. 낙오되는 사람이 없도록 잘 부탁하마.”
“알겠습니다.”
진은 자식들에게 이야기하곤 제자들의 가장 앞에 섰다.
―탁, 탁.
산 중턱에 있는 탓에 시내까지 한참 걸어 내려가야 했다. 사람들의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물건이 서로 부딪혀 덜그럭거리는 소리만이 숲을 가득 채웠다.
“엇!”
“왜 그래?”
“일본 각지… 아니, 전 세계에 정체불명의 문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다는데?”
그때 제자 중 한 명이 핸드폰을 보며 이야기했다. 그 말소리는 가장 뒤에 있던 아마노 남매에게까지 전달됐고,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둘 다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문? 무슨 문?”
“몰라. 기사엔 그냥 문이라고 되어 있어.”
“더 읽어 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이 문은 물리적인 힘이 전혀 통하지 않으며, 일부 문에서는…….”
―쾅!!
“정체불명의 괴수가 나타났다…….”
―콰과과광!!
균열이 생겼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땅 전체가 뒤흔들려 사람들은 주저앉았고 물건을 들고 있던 일부 사람들은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으아악!”
“다들 괜찮으세요?! 각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 확인 부탁드립니다!”
계단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키고 부상자들을 파악하느라 소란스러워졌고, 가장 뒤에 있던 레이와 토우야 역시 사람들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키에에엑!!”
그때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날카로운 괴성이 숲에 울려퍼졌다. 레이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도장의 입구 앞에 서 있는 검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타악!
“잠깐, 누나!!”
―콰과광!
생각보다 몸이 더 앞섰다. 레이는 천 가방에서 죽도를 바로 꺼내 계단을 뛰어올랐고, 그와 동시에 입구 앞에 있던 검은 형체도 레이를 향해 덩굴을 뻗었다.
―쿵
레이가 촉수처럼 생긴 긴 덩굴을 발로 밟고 죽도로 쳐올리자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이 뜯어져 나갔다.
―타닥!
그리고 계단을 빠르게 올라 덩굴을 뽑아낸 녀석의 정체를 살폈다.
‘이게 그 괴수야?’
다리가 달린 작은 묘목이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양손을 높이 들어 묘목을 내리치자 그것은 쉽게 산산조각이 나 바닥 위로 흩뿌려졌다.
“허억, 헉…….”
갑자기 나타난 균열과 문, 그리고 정체불명의 괴수까지.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하늘이 벌을 내린 기분이었다. 지옥의 문처럼 느껴지는 저 문이 전 세계에 퍼져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참을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슥, 슥.
그때 본관의 뒤로 묘목들이 또다시 나타났다. 그는 순간 다리가 얼어붙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죽도를 고쳐 쥐며 그것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켜야 해.’
레이에게 있어 전 세계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땅만큼은, 이 도장만큼은 제 손으로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콰그작!
묘목 두 개를 순식간에 해치운 후 문 앞으로 향했다.
―두근, 두근.
이 문 너머에 괴수들이 가득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레이는 서서히 망가져 가는 죽도를 꽉 쥐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누나, 지금 뭐 하는 거야!”
“깜짝이야……!”
그때였다. 토우야가 한 손에 검 두 자루를 들고 레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레이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고, 그사이에 토우야는 제 형제의 바로 앞까지 왔다.
―탁.
그러곤 레이의 손 위에 푸른 검집에 든 검을 올려놓았다. 아마노 가의 보검이자 명검인 ‘텐노카타나’였다. 레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자 토우야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전달하라고 하셨어. 어차피 이 검은 누나 것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나, 괴수들을 잡을 생각이지?”
레이는 시선을 떨구곤 고개를 끄덕였다. 토우야는 예상했다는 듯 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 그럴 것 같아서 아버지가 날 이쪽으로 보낸 거야.”
“뭐? 너까지 싸울 생각이야?!”
“당연하지. 그럼 누나 혼자 저 안으로 보내? 하나보다 둘이 훨씬 낫잖아.”
―탱그랑.
토우야가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날카로운 검 날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레이는 검과 그를 번갈아 보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신 위험할 것 같으면 무조건 도망가.”
“네~ 네.”
토우야가 싱긋 웃으며 문 쪽으로 발을 돌리는 동안 레이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뻐어억!!
“윽?!”
―털썩
레이의 죽도가 토우야의 목 뒤를 제대로 내리쳤다. 토우야는 목을 감싸 쥐더니 그대로 주저앉았고 레이는 그의 허리를 잡아 어깨에 들쳐멨다.
‘이런 위험을 부담하는 건 나 하나만으로 충분해.’
―사락.
그는 수풀 주변에 토우야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다시 문 쪽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의 갈색빛 눈동자는 희생 정신으로 결연하게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