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53화 (253/366)

253화

‘왜 이 사람들한테도 액자가 생긴 거지?’

지의는 천천히 다른 사람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들도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인지 잔뜩 경계하는 눈치로 액자를 살피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그때 센이 입을 열었다. 지의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지혜로운 잿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긴 합니다. 하지만 저희 모두에게 액자가 생겼다는 건, 저희 공격이 전부 통한다는 거 의미하겠죠.”

“그, 그렇네요!”

센의 말에 심각해져 있던 사와구치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남은 체력은 15만, 여섯 명의 헌터가 한꺼번에 공격을 퍼부으면 5분도 안 돼서 상황이 종료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패턴 자체가 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지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희생하는 화가를 바라보았다. 제 눈앞의 녀석은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몬스터가 등장하거나 클리어 조건이 충분히 바뀔 수 있다.

―치지직.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기를 잠시, 이제는 모두의 눈에 익은 상태창이 떴다.

[희생하는 화가는 명작을 만들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마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는 명작을 만들기도 전에 이미 삼도천 앞에 섰습니다.]

[“정말로 난 아무런 작품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건가?”]

[현재 체력 : 157,999]

녀석의 미련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상태창의 글자가 전보다 느리게 사라졌다.

[그때 희생하는 화가의 머릿속에 묘안이 스칩니다.]

[“아니야. 아직 작품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것이 나를 완전히 죽이는 일이더라도.”]

‘언니!!’

상태창이 사라짐과 동시에 녹두가 소리치더니 지의의 몸을 살짝 물고 뒤로 잡아당겼다.

―쿵!

그러자 지의가 서 있던 곳에 커다란 캔버스가 떨어졌다. 그가 녹두에게 완전히 기댄 채로 캔버스를 바라볼 때쯤 이번엔 녀석의 두 동강 난 몸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쿠구구궁.

희생하는 화가의 상체와 하체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오더니 이내 캔버스 위에 널브러졌다. 캔버스 밖으로 팔다리가 삐져나왔지만, 몸을 그 안으로 구겨 넣을 의지가 없는 듯했다.

예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자꾸만 벌어지니 이 공간의 모든 사람은 긴장의 끈을 조금도 놓칠 수 없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캔버스를 가만히 노려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벽에 걸려 있던 거대한 팔레트 나이프 두 개가 캔버스 위에 동시에 꽂혔다.

[희생하는 화가는 스스로를 캔버스에 가둬 놓으려 합니다.]

[팔레트 나이프로 그를 공격해 완전한 안식을 선사해 주세요.]

[현재 체력 : 157,999]

[제한 시간 : 30분]

‘제한 시간 내에 체력이 전부 닳을 때까지 찌르면 되는 건가?’

지의가 팔레트 나이프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가 손잡이를 잡자, 이번엔 새로운 상태창이 떴다.

[단, 희생하는 화가가 당한 공격을 똑같이 돌려받습니다.]

“…뭐?”

―쾅!

그가 마지막 문장을 읽자마자 그의 그림자에서 손이 튀어나와 그대로 팔레트 나이프를 뺏어갔다.

―탱그랑.

검은 손은 캔버스 바로 위로 팔레트 나이프를 날려 버린 후 다시 지의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지의는 날아간 팔레트 나이프와 제 그림자를 번갈아보다 이내 이 스킬의 주인공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

세빈은 굳은 지의의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을 전에도 겪어본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내 업보지, 뭐…….’

지의는 한숨을 길게 쉬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얼마나 돌발 행동을 많이 했으면 세빈이 저렇게 반사적으로 스킬을 썼나 싶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대충 읽은 후 입을 열었다.

“일단 몇 가지 실험을 해 보죠.”

“실험?”

“응. 아까 본 설명으로 확인이 안 되는 것들이 좀 있어서.”

―탕.

지의가 이시카와에게 대답한 후 자아로 화가의 몸을 쏘아 맞혔다. 하지만 탄환은 녀석의 몸에 닿자마자 안개처럼 흩어졌고 체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성가셔졌네.’

지의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의 스킬은 아군에게 피해를 줄 수 없으니, 이 공격이 통한다면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쉽게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지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말을 덧붙였다.

“일단 팔레트 나이프 외의 무기로는 전혀 타격을 줄 수 없어.”

“무기는 확인됐으니 다음은 체력을 확인해야 할 것 같군요.”

―철컹.

이번엔 센이 팔레트 나이프를 들고 지의의 옆에 섰다.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혀야 15만 체력을 소모시킬 수 있는지 말이죠.”

“잠깐……!”

그가 화가의 팔 쪽으로 나이프의 끝을 댔다.

“센 님!!”

그러자 이시카와가 소리를 지르며 화가의 몸 위로 착지했다. 그는 사색이 된 채 센의 양팔을 붙잡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센 님께 이런 일을 하시게 둘 수 없어요!”

“이시카와 말고 제가 하겠습니다.”

“농담할 기분 아니야, 사와구치!”

“내가 지금 농담하는 걸로 보여? 너 회복력도 안 좋으면서……!”

“둘 다 그만.”

이시카와와 사와구치의 소란이 센의 말 한마디에 정리됐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화를 내던 것을 멈추고 센을 바라보았다. 센은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자신의 어린 후배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시험해 보는 겁니다. 제 고유 스킬과 방어구에도 치유력 상승 기능이 있으니 금방 치료될 것이고요.”

“…이상한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괜찮아요, 이시카와.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푹.

“읏.”

센이 화가의 팔뚝을 살짝 찌르자 동일한 상처가 그의 팔에도 생겼다.

[현재 체력 : 150,387]

‘확실히 적군.’

센이 조용히 혀를 차며 상태창을 노려보았다. 반 뼘 정도의 상처는 1만도 되지 않은 수준의 피해였다. 여기 있는 여섯 명 모두가 팔 하나, 또는 다리 하나를 날려 버리지 않는 이상 화가를 30분 안에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눈을 굴려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지의는 세빈과 민 사이에 서서 무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사와구치와 이시카와는 제 옆에 꼭 붙어 서서 제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시카와, 사와구치. 잠깐 이쪽으로.”

“센 님 나이프 이리 주세요.”

“아하하…….”

―철컹.

두 사람은 팔레트 나이프를 뺏다시피 가져간 후, 지의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센은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풍경이구나.’

젊은 헌터들이 한데 모여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센에게 감동 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헌터로 살아온 30년간, 그에게 가장 큰 보람을 안겨준 건 억만금의 재산도 ‘일본 헌터의 정신’이라는 명예도 아니었다.

자신과 뜻을 함께하며 던전과 몬스터에 맞서 싸우는 헌터들이었다.

‘레이.’

‘네.’

‘너 설마, 저들을 위해 희생할 생각인 거냐?’

그때 센의 무기,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동요하는 듯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반면에 센은 침착했다.

‘네. 저 혼자 이 석고상에게 치명상을 입히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거라. 저 빛의 꼬맹이도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

‘넌 희생으로 너의 땅을 지킬 사람이 아니라고.’

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경기 중에 자신을 향해 소리치던 지의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감정을 추스르더니 곧 고개를 들었다. 온화하고 차분한 얼굴이 희생하는 화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제가 여기서 살아 나간다 하더라도, 제가 태어난 땅을 지키는 건 제가 아니라 저들일 겁니다.’

‘…레이.’

‘믿음직한 헌터들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 것만으로, 제 소명을 다했습니다.’

센은 상태창을 열어 자신의 사명을 다시 살폈다.

<사명>

[아마테라스의 의지]

[네가 태어난 땅을 네 손으로 지켜라.]

[달성도 : 8%]

[보상 : 고유 스킬 ‘아마테라스’의 지속 시간 무제한]

창조자에게 협조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는데도 달성도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센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상태창 너머의 지의를 바라보았다. 밤색 눈동자가 의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센 씨, 제안 하나 해도 될까요?”

그때 이야기를 마친 지의가 센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센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의는 들고 있던 팔레트 나이프 중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이 몬스터는 저와 센 씨 둘이 해결하죠.”

“이유는요?”

“제 방어구엔 치유 스킬과 치유력 상승 기능이 있어요. 그리고 센 씨의 고유 스킬도 비슷한 효과가 있고요.”

“맞습니다.”

센은 지의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녀석의 양쪽 허벅지, 팔뚝, 이걸로도 안 되면 옆구리까지 찌르는 거예요. 거절하셔도 괜…….”

“각오했습니다. 바로 진행하죠.”

지의가 눈썹을 치켜떴다. 자신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도 센은 기꺼이 화가를 찌를 의지가 있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는 긴장한 듯 입술을 잘근 씹다 이내 화가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그를 마주 보았다.

“센 씨.”

“네?”

“당신이 추측한 대로, 전 회귀자예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아마노 레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놀람]

센이 눈을 크게 뜨다 곧 살짝 반달로 접었다.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센 씨가 희생해도 일본이 무사하지 않다는 걸 아는 거예요.”

“…….”

“센 씨, 저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해본 적이 있어요.”

센이 고개를 들어 지의를 바라보았다. 지의는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덧붙였다.

“희생 자체도 실패했고, 지키는 것도 실패했죠. 무엇 하나 남는 게 없었어요.”

“신지의 헌터도 그런 경험이 있었군요.”

“그 이후로 전 숭고한 희생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아마노 레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당황]

지의와 센의 시선이 맞닿았다.

“제 희생으로 슬퍼할 누군가가 있고, 문제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확인할 수도 없는데 그 희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잠깐…….’

센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을 향해 담담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지의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

“잠깐 신지의 헌……!”

―쾅!!

지의가 팔레트 나이프의 손잡이로 센을 밀어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뒤로 넘어진 센을 향해 지의는 미소 띤 얼굴로 마지막 말을 건넸다.

“센, 당신도 희생시키지 않을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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