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52화 (252/366)
  • 252화

    갑자기 나타난 불 지붕에 지면에 서 있던 세 사람이 멈칫했다.

    ‘이건 아까 그 붉은 머리 여자의 스킬인데……!’

    사와구치가 벙찐 채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불의 지붕은 방금 전처럼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태울 기세로 강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끼기기긱.

    희생하는 화가는 불에 가로막혀 천장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녀석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마찰음만 낼 뿐이었고, 당혹감에 푸른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지?”]

    [“내가 그리는 그림에 의미가 있나?”]

    [희생하는 화가는 허무함을 느낍니다.]

    [현재 체력 : 435,725]

    “사와구치! 지금이야!”

    그때 불 지붕 너머로 지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와구치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지의가 오른쪽 벽 옆에 서서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텁.

    사와구치가 대답하기 전에 이시카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투쾅!!

    그러곤 ‘태풍의 눈’을 시전해 함께 위로 날아올랐다. 사와구치는 이시카와의 얼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시카와가 고개를 들어 제 소꿉친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처리하고 와라!”

    “알았어!”

    이시카와가 바람에 사와구치를 태워 날려 보낸 후 뒤로 물러났다. 사와구치는 검을 든 양손을 높이 든 채로 화가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쾅!!

    녀석의 뒷덜미에 장검을 깊게 꽂아 단단히 고정한 후 다른 한 손으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쾅! 쾅! 쾅!

    그러곤 곧바로 녀석의 목을 쉴 새 없이 내려 찍기 시작했다.

    [현재 체력 : 436,567]

    [현재 체력 : 435,918]

    ...

    ...

    ...

    [현재 체력 : 419,939]

    단도가 녀석의 목을 찌를 때마다 체력이 빠르게 닳았지만, 희생하는 화가는 옴짝달싹 못 한 채 그 공격을 그대로 받아낼 뿐이었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사와구치가 발로 녀석의 어깨를 누른 채 장검을 빼냈다. 그러자 그의 몸이 바닥으로 향해 희생하는 화가와 거리를 벌렸다.

    ―퍼버버벙!!

    그가 착지하기 직전, 여러 개의 불의 폭풍이 녀석의 상체를 전부 집어삼켰다. 불기둥의 틈으로 화가의 팔이 튀어나와 한참 허우적거렸고, 그의 팔까지 번진 불길이 주변 물건에 닿아 함께 타기 시작했다.

    [현재 체력 : 399,925]

    사와구치의 마지막 공격으로 피사체가 넘어갈 조건이 충족되었다. 모두의 눈앞에 체력 상태창이 뜨자 뒤죽박죽이 됐던 작업실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불꽃으로 고통스러워하던 화가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스툴에 앉아 멍하니 이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몸은 군데군데 커다란 금이 가고 머리는 반쯤 깨져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다행히 이 방법이 통했네…….’

    지의는 너덜너덜해진 녀석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와구치가 피사체가 됐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가 공격이 가능한 위치에 희생하는 화가를 오래 머무르게 하는 것이었다. 민의 ‘방공호’를 바리케이드처럼 쓸 수 있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이제 피사체 후보는 둘이군요.”

    화가의 제압을 맡던 세 사람이 전부 지면으로 착지하자 센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지의와 세빈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시카와 헌터 때처럼 가죠. 그게 제일 합리적일 것 같아서요.”

    “좋다. SS급, 겁먹지 말고 마음껏 날뛰어라.”

    “알았어, 고마워.”

    이시카와는 세빈의 말에 대답한 후 지의를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의는 못 이기겠다는 듯 픽 웃곤 다시 희생하는 화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생하는 화가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탱그랑.

    상태창이 나타나는 동시에 책상에 있던 스케치용 연필이 떨어졌다. 그것은 화가의 발 앞으로 도르륵 굴러왔고 녀석은 그것을 주워 가만히 살폈다. 탁했던 푸른 눈동자에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연필을 잡는 연습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어쩌면 이 습작이 피사체 그 자체를 표현할 수도 있겠어.”]

    [현재 체력 : 399,925]

    ―치지직.

    사와구치의 주위에 있던 액자가 세빈에게로 옮겨갔다. 세빈은 눈으로 그것을 슥 훑으며 아무렇지 않게 물을 계속해서 마신 후 빈 병을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콰과광!!

    세빈이 그림자 손으로 화가의 양손을 묶은 후 녀석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어떤 그림을 그리려는 거지.’

    지의는 또다시 작업실을 날아다니기 시작하는 팔레트 나이프를 쏘아 맞히며 상태창 너머로 보이는 희생하는 화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녀석은 캔버스 대신 나무판을 꺼내더니 허공에 소환된 종이를 잡아 나무판에 집게로 고정했다.

    ―스윽, 슥.

    녀석은 스케치북의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칠하기 시작했다. 팔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종이엔 일정한 두께의 검은 선이 그려졌다.

    “선 연습하는 몬스터는 난생처음 보는군.”

    그때 나무 팔레트를 반 토막 낸 이시카와가 지의의 옆에 착지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정리하며 다른 한 손으론 가위를 고쳐 쥐었다.

    “미술 학원 다녀 본 적 없나?”

    “없어. 아무튼 저게 그림은 아니라는 거지?”

    “맞다. 하지만 녀석이 저걸 전부 칠해서 작품이라고 우긴다면… 할 말은 없지.”

    지의는 이시카와의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그림의 완성도가 얼마나 올라갔는지 바로 알 수 있는 건 편했지만 동시에 초조해지기도 했다.

    ‘뭐가 됐든 빨리 끝내야겠어.’

    ―콰그작.

    지의가 이젤의 다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중심을 잃은 이젤이 희생하는 화가 쪽으로 기우뚱 고꾸라졌지만, 녀석은 태연하게 한 손으로 그걸 잡은 채 위아래로 선을 그었다.

    “비켜라!”

    ―쾅!!

    이시카와가 이번엔 거대한 마네키네코 장식품으로 바뀌었다. 육중한 철 덩어리가 이젤 위로 떨어져 산산조각을 내자 지면 전체가 울렸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시카와는 화가의 손목을 가위로 한 번 찍어 내린 후 다시 녀석과 거리를 벌렸다.

    ―우두둑.

    피사체가 아닌 이시카와에게 받은 상처는 금방 치유되었다. 희생하는 화가가 부러진 손목을 한번 털자 뼈가 금세 맞춰졌고, 그것을 바라본 이시카와가 인상을 팍 구겼다.

    [“자네, 결국 작품 활동을 관두는 건가?”]

    [“그럴리가. 연습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희생하는 화가는 화방 주인의 말에 대답하며 연습에 박차를 가합니다.]

    [현재 체력 : 312,683]

    ―슥, 슥, 슥.

    선을 긋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 변화를 느끼자마자 녀석의 팔과 종이쪽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었다.

    “읏!”

    커다란 팔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강한 바람이 불어 지의가 잠시 중심을 잃었다. 그는 금방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틴 후 자아를 바주카로 바꾸었다.

    ―퍼엉!!

    소리 포탄 세 개가 일제히 종이를 향해 날아갔다. 종이는 눈 깜짝할 새에 갈기갈기 찢겨 눈처럼 바닥에 쌓였고 힘을 버티지 못한 이젤 역시 함께 부서졌다.

    ‘세빈이는 무아 상태인가?’

    지의가 새 종이가 소환되는 족족 바주카로 터트리며 작업실을 눈으로 훑었다. 그 어디에도 세빈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각.

    그때 천장 쪽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지의가 이젤을 다섯 개째 날려 보내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들자 천장을 딛고 무릎을 굽힌 세빈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후우…….”

    세빈이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곤 희생하는 화가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의 커다란 몸만큼이나 거대한 그림자는 당장이라도 끓어 넘칠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쾅!!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세빈이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 화가의 머리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희생하는 화가의 그림자는 뱀처럼 녀석의 몸을 타고 올라가 순식간에 목을 움켜쥐었다.

    ―우두둑.

    그림자로 만든 손은 녀석의 목을 뒤로 꺾은 후 세빈을 바로 보게 만들었고, 세빈은 검날을 세워 녀석의 얼굴을 향해 쏜살같이 떨어졌다.

    ―푹.

    “저런 정신 나간…….”

    사와구치가 세빈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이 들릴 리가 없는 세빈은 아무렇지 않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곤 자신의 공격이 만들어낸 결과를 내려다보았다.

    ―후두둑.

    희생하는 화가의 두 눈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악!!”]

    [희생하는 화가는 두 눈을 감쌉니다.]

    [그의 노력과 연습에 대한 보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돌아왔습니다.]

    [현재 체력 : 235,827]

    치명타였다. 순식간에 시각을 잃은 녀석은 양손으로 눈을 감싸 쥐며 몸을 덜덜 떨었고, 세빈은 녀석의 어깨 위로 착지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얼굴을 했다.

    ‘이번 공격으로 끝날 줄 알았더니.’

    그는 혀를 한번 차곤 유유히 녀석의 빈 머리 안으로 들어가 검을 고쳐 들었다.

    ―쾅, 쾅, 쾅.

    화가의 몸 안에서부터 파괴할 생각이었다. 텅 빈 석고상 몸의 내부는 밑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어두워져, 무기 영(影)의 파괴력이 계속해서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쨍그랑!

    그가 화가의 안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복부에서 시커먼 검이 튀어나왔다. 깨진 석고 조각이 작업실의 바닥 위로 힘없이 떨어졌고, 녀석의 복부엔 커다란 틈이 생겼다.

    [희생하는 화가는 사고를 멈춥니다.]

    [그냥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현재 체력 : 209,811]

    ―콰그작!

    그림자 손이 그 틈을 잡아 벌리자 녀석의 속이 훤히 드러났다.

    ―쿵.

    결국 녀석의 상체가 반으로 갈라져 뚝 떨어졌다. 희생하는 화가의 상체는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었지만, 녀석의 하체는 여전히 이젤 앞 의자에 앉은 자세가 유지되고 있었다. 마치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현재 체력 : 157,999]

    ‘여기서 더 깎을 체력이 있는 거야?’

    지의는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화가의 몸과 상태창을 번갈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봐도 녀석은 다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또각.

    세빈이 지의의 옆에 착지하며 검을 바닥에 꽂았다. 마지막 공격에 어깨 관절에 무리가 갔는지, 그가 오른팔을 돌릴 때마다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5분 만에 끝났군요.”

    공포심이 들 정도로 파괴적인 세빈의 힘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센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남은 건 SS급뿐인데…….”

    “…저거, 더 싸울 수 있는 상태야?”

    사와구치가 턱짓으로 희생하는 화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희생하는 화가는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파스슥.

    세빈의 차례가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듯 그의 주위에 있던 액자가 먼지처럼 사라졌다.

    “별다른 전투 없이 목숨만 붙어 있는 상황이면 좋겠네.”

    “체력은 15만뿐이다. 네 녀석의 파괴력 정도면 열 발 안에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주위로 액자가 생기기를 기다렸다.

    ―두근, 두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액자는 생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 가는 긴장감에 심장이 뛰는 소리만 더욱 크게 들렸다.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

    “신지의 헌터, 혹시 당신에게만 뭔가 나타났나요?”

    “아니요. 상태창은커녕 비슷한 것도 없…….”

    ―치지직.

    그때 지의의 주위로 금색 액자가 떠오르며 스파크 소리가 들렸다. 지의는 어깨를 흠칫 떨더니 이내 제 몸에 딱 맞게 만들어진 사각형의 프레임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액자가 생겨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줄은 몰랐네.’

    지의가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로 고개를 돌린 그 순간, 그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들에게도 같은 액자가 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