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센은 역할을 나눌 때 보았던 세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하는 사와구치의 뒤에서 조용히 굳어가던 그 얼굴을.
‘아무래도 위험한 사람인 것 같은데, 이자를 계속 신지의 헌터 옆에 둬도 되는 건가?’
―쾅! 쾅!
그때 새하얀 창이 이젤의 다리에 꽂혔다. 이젤은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이내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산산조각 났다. 그림 그릴 곳을 잃은 화가가 허망한 듯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낯선 무기에 센은 창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손에는 자아를, 다른 한 손엔 스스로가 만든 창을 든 지의가 화가를 차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평범한 사람의 모습인데,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초월한 듯한 분위기 때문에 센은 지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뭐, 저 사람이라면 누가 옆에 있든 상관없겠군.’
센은 자신의 걱정이 무의미했음을 깨달으며 다시 고개를 내렸다. 지의의 옆에 있으면 누구든 결국 그의 동료가 될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이 그러했듯 말이다.
―퍼버버벙!!
그때 시퍼런 불꽃이 화가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결국 의자에서 떨어졌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괴로워했다.
[“이건 내가 원하던 그림이 아니야!”]
[희생하는 화가는 화풍을 바꿔보려 합니다.]
[현재 체력 : 599,938]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두두둑.
‘뭐지?’
무언가 뜯어지는 듯한 소리에 지의는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희생하는 화가의 작업실은 바뀐 것 없이 그대로였고, 피사체임을 알리는 액자 역시 여전히 민에게 붙어 있었다.
―쿵.
희생하는 화가가 몸을 일으켰다. 녀석의 푸른 눈동자는 예술에 대한 집착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 굳이 인물화가 아니어도 괜찮지.”]
[“저 추악한 납치범들을 향한 내 혐오감을 표현하자.”]
[희생하는 화가는 추상화를 그릴 준비를 합니다.]
―쿠구궁.
화가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자 작업실을 둘러싼 사방이 쳇바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위아래가 쉬지 않고 뒤집혔지만, 물건은 떨어지지 않고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희생하는 화가 역시 자신의 이젤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갔다.
엉망진창이 된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오직 헌터들 뿐이었다.
―파지직.
“읏?!”
그때 사와구치의 주위로 액자가 옮겨왔다. 녀석이 또다시 목표를 바꾼 것이다. 사와구치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기며 액자를 바라보다 곧 상황을 받아들이곤 양손에 든 검을 고쳐 쥐었다.
―또각.
그러자 함께 지면에 있던 센이 그의 옆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사와구치가 어깨를 흠칫 떨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센은 관람차처럼 돌고 있는 화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사와구치, 평소의 당신처럼 침착하게 행동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센 님.”
“사와구치이!!”
―쾅!
이시카와가 소리를 지르며 사와구치의 바로 옆에 착지하자 사와구치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순간 말하는 법을 까먹었다. 그가 입을 떼기 전에 이시카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엄호를 하겠다! 마음 놓고 싸우도록!”
“네네……? 아, 아니 이시카와가 왜?”
“세빈이보다 이시카와가 널 보호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대답을 한 건 이시카와가 아니라 지의였다. 그는 사와구치의 앞에 착지한 후 곧바로 말문을 열었다.
“너도 봤다시피 세빈이 스킬은 저 녀석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데 특화되어 있거든. 그래서 세빈이가 아예 통제 담당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확실히 그렇겠네요.”
센이 지의의 말을 거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보는 듯했다.
“이시카와, 당신은 기동성이 좋으니 사와구치를 보호하는 동시에, 공격하기 좋은 포인트로 그를 데려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랑 최민 헌터도 저 녀석을 담당할게요.”
지의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걱정하는 투로 말을 덧붙였다.
“추상화다 보니 언제, 어떻게 그림이 완성될지 모릅니다. 아예 그림 자체를 못 그리게 해야 해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충격]
지의의 말에 모든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지점이었다.
―콰드득.
세빈은 그림자로 희생하는 화가의 모든 관절을 꺾어 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곤 무아로 모습을 감춘 후 곧 녀석의 이젤 위에 착지했다.
세빈의 신발, ‘그림자 밟기’의 효과 덕에 그는 그림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평지처럼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선 하나 그어 놓고 그림을 완성한다면 사와구치는 허무하게 죽게 될 거야.’
이시카와는 불안함에 이를 아득 갈았다. 추상화라는 새로운 패턴이 추가된 탓에 잔뜩 긴장한 그는 제 소꿉친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5분 안에 해치워라. 명령이다.”
“…알겠어.”
이시카와의 미묘한 변화를 모를 리가 없는 사와구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순순히 대답했다.
[“이것이라면 작품을 금방 끝낼 수도 있겠어.”]
[희생하는 화가는 즐겁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상태창이 눈앞에 뜨자마자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지의와 민은 단숨에 화가의 주위로 달려 나갔고, 사와구치는 천장과 오른쪽 벽을 지나 자신이 서 있는 땅 쪽으로 다가오는 화가에게 공격을 퍼부을 준비를 했다.
―퍼버버벙!!
사지가 그림자에 꽁꽁 묶인 화가를 향해 화염 폭풍이 날아갔다. 녀석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공격을 전부 받아냈다.
[현재 체력 : 542,784]
“이시카와!”
“으랏차!”
―탁.
이시카와가 사와구치를 자신의 바람에 함께 태우며 그를 화가의 어깨 위로 올려놓았다. 녀석의 몸이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가자 사와구치가 순간 중심을 잃었지만, 곧바로 자세를 낮춰 녀석의 관자놀이에 검을 꽂아 넣었다. 검이 빠져나간 녀석의 머리엔 십자로 된 틈이 만들어졌다.
사와구치가 바닥 위로 뛰어내리는 동시에 그가 만들어둔 십자 틈으로 염풍을 일으켰다.
―퍼버버벙!!
그러자 희생하는 화가의 머리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녀석의 푸른 눈이 순식간에 감춰졌다.
[희생하는 화가는 괴로워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그의 예술 활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눈만이 세상을 비추는 것은 아니니까요.]
[현재 체력 : 492,501]
‘아직까진 순조로운 것 같네.’
지의는 빠르게 깎여 가는 체력을 확인한 후 희생하는 화가를 쫓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뚜두둑.
문제는 녀석이 그림을 그리는 속도였다. 그림자 손을 뜯어내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고, 이젤 위에 새로운 캔버스가 소환되는 주기도 점점 짧아졌다. 더군다나 캔버스 자체의 방어력도 올라가 일반적인 탄환 공격 한두 번으로는 소멸하지도 않았다.
[“어이! 그러고 보니 자네가 페인트를 주문한 걸 깜빡했지 뭐야!”]
[“이곳에 둘 테니 알아서 쓰라고!”]
[화방 주인이 붉은 페인트를 놓고 사라집니다.]
[현재 체력 : 490,287]
또다시 등장한 화방 주인의 손이 화가의 옆에 페인트 통을 두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것은 희생하는 화가와 함께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끼이익.
“잠깐……!”
그때였다. 페인트 통 뚜껑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더니 안에 있던 붉은 페인트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윽!”
바닥으로 떨어지는 붉은 액체가 지의의 다리를 스쳐 커다란 화상 상처를 만들었다. 지의는 마치 칼에 찔린 듯 화끈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려 밑에 있을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
하지만 지의의 눈에 들어온 건 페인트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아니라 거대한 불의 지붕이었다. 지붕 위로 고인 붉은 페인트는 밑에 있던 사람들에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다리, 괜찮습니까?”
그리고 그 지붕을 만들어낸 민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냥 화상일 거예요.”
지의는 간단하게 대답한 후 다시 고개를 내렸다. 민이 스킬을 해제했는지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사아악.
그때 희생하는 화가가 넓적한 붓을 들어 캔버스 위로 한 획을 그었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그 소리가 죽음의 종소리처럼 들려, 지의는 곧바로 그것을 향해 자아를 조준했지만 이내 멈칫했다.
‘이제 이걸로는 부족하겠지.’
―철컥.
그는 확성기를 바주카포 형태로 바꿨다. 무거워진 무기를 양손으로 꽉 쥔 채 포구를 캔버스 쪽으로 돌렸다.
―펑!!
새하얀 포탄이 묵직하게 허공을 가르더니 금방 캔버스에 박혔다. 캔버스는 새하얀 실밥을 이리저리 흩뿌리며 반 토막이 났고, 세빈이 그것을 검으로 한 번 더 벤 덕에 더 이상 미술 도구로써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다.
“사와구치! 이번 공격으로 끝낼 수 있겠어?!”
“지면에 머무르는 시간을 조금만 더 늘리면 가능해!”
사와구치는 지의의 말에 쏘아붙이듯이 대답하곤 오니의 발자국으로 화가가 지나갈 지점에 미리 불기둥을 세워 놓았다. 희생하는 화가는 천장에서 벽을 지나 서서히 사와구치가 서 있는 바닥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공격 시간이 딱 10초만 더 늘어났으면 좋겠는데.’
사와구치는 자신의 공격에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스킬은 이미 최대 출력으로 내보내고 있으니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늘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퍼버벙!
화가가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오자 사와구치는 다섯 개의 불의 폭풍을 소환해 녀석을 집어삼켰다. 녀석이 불기둥을 지나 왼쪽 벽으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그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희생하는 화가는 또다시 창작의 고통에 시달립니다.]
[더 나은 표현 방법을 찾기 위해 고뇌하고, 또 고뇌합니다.]
[현재 체력 : 452,991]
“사와구치! 잡아라!”
―텁.
이시카와가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사와구치를 바람에 태워 점점 천장을 향하는 화가를 향해 올려보냈다.
―서걱!
사와구치의 검날이 동시에 녀석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현재 체력 : 435,725]
‘조금만 더……!’
―퍼버벙!
“아!”
상처를 향해 내보내려던 염풍이 전혀 엉뚱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마음이 급해 거리 조절에 실패한 것이다. 사와구치의 몸이 의미 없이 바닥을 향했다.
‘젠장, 딱 한 방이면 되는데……!’
스킬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서서히 올라가는 희생하는 화가를 보며 사와구치는 이를 악물었다.
―쾅!!
“어……?”
그때였다. 평온하게 올라가던 화가의 몸이 어딘가에 부딪혀 큰 굉음을 냈다. 지면에 있던 세 사람이 고개를 들고 희생하는 화가의 경로를 막은 것을 확인했다.
불과 몇 분 전, 자신들을 페인트로부터 지켜준 불의 지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