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이 몸의 공격에 전율하도록 해라! 이 오만한 화가 자식아!”
―쾅!!
이시카와가 바람을 타고 화가의 정수리를 가위로 내리찍었다. 그는 아예 녀석의 머리에 올라선 채로 ‘태풍의 눈’을 시전했다. 그러자 금이 간 틈새로 날카로운 바람이 파고들었다.
[희생하는 화가는 창작의 고통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마저도 그에겐 기쁨입니다.]
[현재 체력 : 894,845]
이시카와의 공격이 쉴 새 없이 몰아치자 체력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희생하는 화가는 이시카와를 공격할 생각이 없는지 캔버스 위로 꾸역꾸역 밑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투웅.
수십 개의 연필이 이시카와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지의는 자아로 실드를 만들어 그의 앞으로 던졌다.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된 실드는 바닥으로 뚝 떨어져 연필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센 쪽도 잘 되어 가는 것 같네.’
지의는 고개를 살짝 내려 밑을 바라보았다. 화가가 연필을 쥐기 무섭게 녀석의 손목을 잘라내는 새하얀 검, 사지를 움켜쥐는 검은 그림자, 그리고 캔버스를 찢어 버리는 굵은 단도까지. 세 사람은 각자의 위치에서 녀석의 작품 활동을 완벽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신지의 헌터.”
그때 민이 갑자기 옆으로 다가와 지의에게 말을 걸었다.
―쉬이익!
그와 동시에 브러쉬가 그들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왔다.
―쾅!
지의는 자아로 뽑아낸 배트로 브러쉬를 날려 버렸고, 민의 불꽃이 그것을 완전히 재로 만들어 버렸다. 지의는 숨을 돌리며 민에게 대답했다.
“무슨 일이에요?”
“방공호는 해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캔버스가 계속 소환되고 있어서요.”
지의가 눈썹을 올리며 희생하는 화가를 바라보았다. 방 한켠에 쌓여 있던 캔버스는 어느새 화가의 이젤에 자동으로 소환되는 형태로 바뀌어서, 방공호로 가둬 봤자 그 순간만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뿐이었다.
지의는 머릿속으로 금방 결론을 내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체력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이대로 이시카와 헌터를 계속 엄호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민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이시카와의 주위로 불꽃을 피워냈다. 불꽃은 태풍의 눈을 만나 사방으로 날아갔고, 덕분에 그의 목을 노리던 팔레트 나이프가 순식간에 타 버렸다.
―똑똑똑.
그때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투 상황과 맞지 않는 소리에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 틈에 생긴 문 안으로 박스를 든 손이 불쑥 들어왔다. 손은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곤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봐! 주문한 재료야!”]
[“이번에는 인형 말고 진짜 사람을 그려 보라고. 아하하!”]
[화방 주인이 희생하는 화가를 조롱하며 재료와 도구 상자를 두고 갑니다.]
―쾅!
희생하는 화가가 자신의 몸을 비튼 그림자 손을 전부 떼어 내더니, 이내 한 손으로 벽을 세게 쳤다.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길이 그것 외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쿠구구궁.
그러자 벽에 걸려 있던 도구는 물론 상자 안에 있던 재료들까지 한꺼번에 반응해 작업실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짜증나게 됐네……!’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중을 떠도는 미술 도구의 수가 늘어났다. 위험 요소가 늘어난 상황에 지의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의는 몸을 숙여 나무 팔레트를 피한 후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겨 작업실 전체에 새하얀 음파를 내보냈다.
추진력을 잃은 도구들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고 그중 몇 개는 아예 부서졌다. 그럼에도 상자 밖으로 도구가 끊임없이 나타났다.
“하앗!”
―콰과과광!!
센이 화가의 손목을 벤 후 광휘로 미술 도구를 파괴했다.
―퍼버벙!
곧이어 사와구치의 염풍이 부서지다 만 도구를 집어삼켜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염풍이 지나간 자리는 새까맣게 그을려 누가 보아도 화재 현장처럼 보였다.
‘네네, 괜찮으려나.’
사와구치는 고개를 들어 제 소꿉친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피사체의 증거인 액자는 여전히 이시카와를 가둔 채였다.
[희생하는 화가는 밑그림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희생하는 화가가 검은색 물감을 찾습니다.]
“윽!”
사와구치가 급하게 캔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캔버스 위엔 어느 틈에 이시카와의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시카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의 이성을 서서히 좀먹기 시작했다.
―퍼벙!
사와구치가 오니의 발자국과 함께 캔버스를 향해 달려들자 희생하는 화가의 손이 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내려왔다.
―콰직.
하지만 화가의 손이 사와구치를 짓누르는 것보다 수십 개의 그림자 손이 녀석의 손가락을 비트는 것이 더 빨랐다. 전부 다른 방향으로 꺾인 손가락 때문에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들어 보호할 수도, 자신을 괴롭히는 헌터들을 직접 공격할 수도 없었다.
‘그림 그리는 속도가 많이 증가했네.’
캔버스 위 이시카와의 밑그림을 보며 세빈이 생각했다. 그러곤 곁눈질로 이미 부수어 놓은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캔버스에 선 몇 개를 긋는 것이 전부였던 녀석의 손짓은 어느새 채색을 위한 밑그림을 완성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서걱.
세빈은 양손으로 검을 고쳐 쥐더니 녀석이 무방비해진 틈을 타 캔버스를 반으로 찢었다. 검은색 물감을 찾는다는 안내가 무색해질 정도로 화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콰그작!
동시에 희생하는 화가의 머리만을 집요하게 공격하던 이시카와가 결국 녀석의 머리에 구멍을 냈다. 그는 후련함을 느끼며 씩 웃은 후 작업실의 천장 쪽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곤 밑을 내려다보며 크게 소리쳤다.
“다들 물러나 있거라! 세, 센 님도 피해 주세요!”
“알겠어요.”
호기롭게 소리치던 이시카와는 센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갑자기 양손을 모으며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이시카와의 경고에 모두 뒤로 물러나자 이시카와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정신을 집중시키더니, 곧 그의 모습이 다른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저건……!’
지의는 점점 커지는 그의 형체를 보자마자 이시카와가 무엇으로 변신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콰과광!!
그의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시카와는 화물차로 모습을 바꾸어 그대로 희생하는 화가를 덮쳤다. 깨진 정수리 부분을 그대로 들이받자 주먹만 하던 구멍의 주위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녀석의 머리 절반이 날아갔다.
[희생하는 화가의 창작의 고통이 극에 달합니다.]
[현재 체력 : 817,472]
화가는 텅 빈 석고상 머리를 감싸 쥐며 몸을 크게 흔들었다.
―쨍그랑!
녀석이 벽에 몸을 부딪치자 걸려 있던 액자가 밑으로 떨어져 화가의 머리를 가격했다.
[“…내가 그리고 싶던 건 이 피사체가 아닌가?”]
[희생하는 화가가 그림의 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현재 체력 : 798,889]
희생하는 화가의 푸른 눈동자가 바삐 굴러가다 이내 민에게 고정되었다.
―파지직.
그러자 이시카와에게 둘려 있던 액자가 사라지고, 동시에 민의 주변으로 액자가 나타났다. 민이 움직임을 덜컥 멈추더니 제 키에 딱 맞게 만들어진 액자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액자는 민의 손에 닿자마자 모양이 흐트러지다 이내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제가 보호할게요!”
―타닥.
그때 지의가 민의 바로 옆에 착지했다. 민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차분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구원자의 상태 : 약한 긴장]
‘전투 상황이니 어쩔 수 없나…….’
민은 제 눈앞에 뜬 상태창을 닫으며 지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상황이 주는 압박감을 이겨내고 이 상황을 헤쳐 나가려는 굳은 의지가 그의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듯했다.
민 자신의 구원자, 그리고 이 세상의 구원자와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며 민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 몸도 합세하겠다!”
―까앙!
날아오는 페인트 통을 가위로 쳐내며 이시카와도 민의 옆으로 날아왔다. 민은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곧바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희생하는 화가는 연필 대신 목탄을 쥡니다.]
[거대한 불꽃과 연기를 표현하고 싶어 합니다.]
[현재 체력 : 798,889]
‘피사체가 바뀌는 기준은 시간이 아니라 체력인가 보네.’
지의는 상태창을 노려보며 눈으로 피사체가 될 헌터들을 훑었다.
‘화가의 체력은 총 100만, 납치범은 5명. 이시카와가 녀석의 체력을 80만 이하로 떨어트려 놓았을 때 타깃을 최민 헌터로 바꿨지.’
결론은 간단했다. 피사체가 된 납치범들이 각자 20만씩 공격을 성공시키면 녀석을 해치울 수 있는 것이다.
―철컥.
생각을 마친 지의는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꾹 당겼다. 새하얀 음파가 허공을 날아다니는 팔레트 나이프를 튕겨내자, 민이 자세를 잡고 폭발을 일으킬 지점을 눈으로 계산했다.
―퍼버버벙!!
희생하는 화가의 머리와 목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었다. 끔찍한 통증에 녀석의 눈이 크게 떠졌고 들고 있던 목탄을 놓으며 양손으로 목과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자 녀석의 새하얀 피부에 검은 얼룩이 생겼다.
[현재 체력 : 709,274]
―쾅!
세빈의 검이 캔버스의 정중앙에 박혔다. 민의 뼈대만 겨우 잡아 놓은 그림은 세로로 길게 찢어졌고, 희생하는 화가는 분노한 듯 마구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세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는 ‘무아’로 유유히 몸을 숨겼다. 동시에 센의 광휘가 녀석의 팔에 꽂혀 오히려 움직임을 제압당했다.
“은신계 스킬인가 보군요.”
다시 모습을 드러낸 세빈을 향해 센이 말을 건넸다. 세빈은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잠시 대답을 고민하다 입가에 미소를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헌터의 정신이라고 불리는 분과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저야말로 젊은 실력자들과 함께해서 기쁘네요.”
‘이자가 신지의 헌터의 소꿉친구인가.’
센은 지의를 신뢰하기 시작한 후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지의가 신뢰하는 자는 곧 자신이 신뢰해도 될 대상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미리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서걱!
센이 검으로 화가의 손목을 베는 동시에, 위쪽에서 녀석을 공격하는 민을 올려다보았다. 민의 비행 궤도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폭발의 파괴력 역시 DF 상위 랭커다운 모습이었다.
―콰그작.
이번엔 세빈 쪽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림자로 화가의 손목을 비튼 후 손안의 목탄을 검으로 부쉈고, 가끔 고개를 들어 지의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본 센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자를 옆에 둬도 괜찮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