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46화 (246/366)
  • 246화

    세빈이가 저주를 받았다는 말에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의문을 가진 건 이시카와도 마찬가지였는지 당황한 얼굴로 세빈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 그림자 군주, 네가 저주에 걸렸다고? 무슨 저주였지?”

    “충동의 저주라고 하는데, 솔직히 제대로 받은 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네요.”

    ‘저주를 받았는데, 받았는지를 모르겠다……?’

    세빈이는 아무리 봐도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나와 이시카와를 보자마자 표정이 평소보다 더 굳었던 걸 제외하곤 큰 변화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상태창 설명으론 1시간 동안 충동 상태가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때 최민 헌터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를 흘긋 본 세빈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신계 스킬 수준의 저주가 아니었을까? 만약 그런 거라면 나한테 안 통한 것도 말이 되고.”

    “그건 그렇긴 하지. 하지만 완전히 면역이 있는 건 아니잖아.”

    “공포와 관련된 정신계 스킬이면 거의 완전 면역이야. 다른 건 안 당해 봐서 모르겠네.”

    세빈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충동을 공포와 비슷한 감정으로 보기엔 조금 거리가 있어 여전히 의문점이긴 한데 말이지.

    “아무튼 설명이 애매하네… 평소보다 더 충동적으로 변하는 건가?”

    “오호라, 그림자 군주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시카와.”

    “쳇, 무슨 말도 못하게 하는군.”

    이를 악문 채 이야기하는 사와구치에 이시카와가 혀를 내보이며 조롱했다. 그럴수록 사와구치의 얼굴엔 그늘이 질 뿐이었다.

    세빈이와 충동,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관련이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98번째의 세빈이가 그걸 증명했으니까.’

    ―두근, 두근.

    끔찍한 기억에 가슴이 불쾌하게 두근거렸다. 늘 침착해 보이는 세빈이더라도 언제든지 그때와 같은 돌발 행동을 할 수 있다. 내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살아 있던 동료 전부를 몰살시켰던, 용서받을 수 없는 그 행동.

    그때의 충동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시간선에선 잠깐이나마 ‘학살자의 업’까지 뒤집어썼다.

    충동의 저주까지 받은 상태에서 만약 세빈이가 정신적으로 몰린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지겠지.

    ―텁.

    “아…….”

    이시카와의 손을 놓고 세빈이의 팔을 붙잡자 세빈이의 눈이 천천히 커다래졌다. 막 물에서 건져 올린 조약돌처럼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완전히 나를 향했다.

    ‘엇나가지 않도록 내가 붙잡아야 해.’

    세빈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해결할 방법은 항상 있으니까, 너무 겁먹지 마. 알았지?”

    “겁?”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세빈이는 내 말에 의문을 가졌지만, 세빈이의 충동은 결국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98번째의 세빈이가 직접 이야기했으니까.’

    ―사락.

    세빈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알겠어. 지의 너만 믿을게.”

    “…응.”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는 모르겠다. 세빈이의 이성이 충동을 잘 억눌러 주기만을 기대하는 수밖에.

    “그럼 신지의 헌터는 한 시간 동안 강세빈 헌터와 손을 잡고 계시는 겁니까?”

    최민 헌터가 내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붙였다. 녹두에게 눈짓을 하자 녀석이 꼬리를 더욱 힘차게 흔들며 내 옆으로 왔다.

    ―텁.

    ‘역시 되는군.’

    소환수도 생명체이다 보니 녹두의 등에 손을 얹자 숨이 잘 쉬어졌다. 나는 다시 최민 헌터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녹두 등에 타고 있으려고요.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되거든요.”

    “아,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최민 헌터가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건 채 녹두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다섯 번째 액자 앞으로 발을 옮겼다.

    [빛을 품은 영웅은 어두운 폭풍 속에서도 기꺼이 지옥 불을 향해 나아간다]

    누가 보아도 우리 다섯 명 모두가 들어가야 하는 장소였다. 액자에 그려진 흰 원이 무엇을 말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나와 이시카와가 해치웠던 몬스터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의 녀석이 나올 것임이 분명했다.

    “들어가자.”

    “네 사역마에게서 1초도 떨어지지 말아라.”

    “알겠어.”

    이시카와의 걱정 아닌 걱정을 들으며 액자 안으로 발을 들였다.

    ―휘이잉.

    모두가 액자 안으로 들어오자 상쾌한 바람이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절인가?’

    살짝 감았던 눈을 뜨니 오래된 절처럼 보이는 목조 건물이 저 멀리 보였다. 우린 건물 입구를 향해 뻗은 돌길 위에 서 있었고, 길 양옆으로 높은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어, 잠깐. 익숙한데?”

    그때 사와구치가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행동에 이시카와도 팔짱을 낀 채 서서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가로수를 지나 입구처럼 보이는 커다란 나무 문을 통과하자 사와구치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여명 검도장!”

    “맞다, 사와구치! 잘 기억해 냈구나!”

    “검도장?”

    사와구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곧바로 말을 뱉었다.

    “센 님의 가문이 운영하는 도장이야. 100년도 더 된 역사적인 장소지.”

    “네 녀석들은 모르겠지만 센 님의 혈통인 아마노 가문은 유서 깊은 검도인 집안이다. 원래는 센 님께서 이 도장을 물려받으실 예정이었지만, 헌터가 되시는 바람에 현재는 남동생께서 이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 장소가 이 안에 있다는 건… 몬스터도 센 씨와 관련된 장소가 나올 확률이 높겠네요.”

    세빈이의 말을 들으며 도장 안을 둘러보니 한가운데에 새하얀 원이 둥둥 떠 있었다.

    ‘응?’

    자세히 보니 원이 아니라 거울이었다. 그것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우리의 모습이 얼핏 비쳐 보였다. 아무래도 마지막 부품은 저것인 것 같네.

    ―파지직.

    도장 안쪽에서 새하얀 스파크가 일더니 곧 무언가가 도장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타닥.

    인간의 형체를 띄고 있는 두 마리의 몬스터였다. 이목구비는 물론 실루엣까지 전부 하얀색이라 마네킹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몬스터들이 누구의 흉내를 내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

    머리를 틀어 올린 녀석은 센, 반면 머리를 밑으로 내려 묶은 쪽은 도장을 이어받았다고 한 그의 남동생이었다.

    [시대의 부름에 응한 자와 역사를 이어가는 자가 도전자를 마주합니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딱 하나.]

    [정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부름에 응한 자]

    [철사, 50x30x160cm]

    [체력 : 4,000 / 4,000]

    [역사를 이어가는 자]

    [철사, 60x40x180cm]

    [체력 : 4,000 / 4,000]

    [시대의 부름에 응한 자와 역사를 이어가는 자를 쓰러트리면 대역 인형의 후광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인간형 몬스터 둘, 체력은 똑같이 4천씩이다. 일단 지금은 섣불리 공격하는 것보다 어떤 스킬을 쓰는 녀석들인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쾅!!

    센을 흉내 내는 ‘시대의 부름에 응한 자’가 칼을 빼 들고 세빈이에게 달려드는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녹두야 위쪽으로!’

    ‘알겠어!’

    ―후웅.

    녹두가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라 두 몬스터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난 한쪽 팔로 녹두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방아쇠를 길게 당겼다.

    새하얀 소리의 파동이 도장 전체 쓸고 지나가자 몬스터의 형체에 노이즈처럼 흠이 생기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빈틈을 보이는구나!”

    ―쾅!!

    역사를 이어가는 자의 움직임이 멈추자마자 이시카와가 크게 소리치며 녀석의 목을 가위의 양날로 잡았다.

    ―끼기긱!

    목을 자르는 것까지는 무리였는지 가위 날은 녀석의 목을 조금 파고드는 것에서 그쳤다.

    [역사를 이어가는 자는 쉽게 죽을 수 없습니다.]

    [그는 역사를 계승해야 할 운명입니다.]

    [체력 : 3,148 / 4,000]

    ―후우웅.

    “이시카와!”

    이시카와가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장검의 날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와 그의 손목을 노렸다.

    ―탕!

    역사를 이어가는 자의 검에 정확히 소리 탄환이 박혀 녀석이 검을 놓쳤고 그 틈에 이시카와는 바람을 타고 녀석과 거리를 벌렸다.

    ―콰과광!!

    그와 동시에 불의 소용돌이가 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와 몬스터를 집어삼켰다. 불기둥이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 검은 연기의 사이로 사와구치가 나타났다.

    ‘이게 경기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고유 스킬이구나……!’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불 폭풍 자체도 굉장히 빠르게 생성됐는데, 주변에 있던 가로수들도 전부 새까맣게 재로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

    ―지지직.

    역사를 이어가는 자는 뒤로 굴러 불의 소용돌이를 피했지만 이미 형체의 일부분이 검게 그을린 후였다.

    “이 자식이……!”

    사와구치가 매섭게 눈을 뜬 채로 장검을 든 손을 높이 들었다.

    ―챙, 챙, 챙.

    긴 검끼리 미친 듯이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쉴 틈 없이 서로 떨어졌다 붙어 있기를 반복한 탓에, 탄환으로 녀석을 공격하는 건 영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철컥.

    자아를 작살총 형태로 바꾼 후 녀석의 발목 쪽을 향해 겨눴다. 마침 사와구치가 공격을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이라, 역사를 이어가는 자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콰그작!

    날아간 작살이 녀석의 뒤쪽에 있던 바닥에 박히기 무섭게 녀석의 뒤꿈치가 작살 끝에 연결된 끈에 걸렸다.

    “사와구치! 지금이야!”

    ―퍼버벙!!

    역사를 이어가는 자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동시에 사와구치의 염풍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집어삼켰다. 녀석의 몸이 힘없이 공중으로 붕 뜨자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시카와가 가위를 배트처럼 들고 허리를 뒤로 틀었다.

    “이야아아!”

    ―콰그작!

    뒤이어 이시카와가 기합을 내지르며 가위의 끝을 녀석의 가슴 한가운데에 박았다. 반짝거리는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쿵

    이시카와가 발로 녀석의 몸을 차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역사를 이어가는 자는 검을 바닥에 박더니 덜덜 떨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흥, 발악을 하는구나. 어이, 사와구치. 네 녀석의 플레임 버스터를 한 번 더 보여 주거라. 그럼 이 몸의 크림슨 토네이도도…….”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더 얘기 안 해도 돼…….”

    사와구치는 이시카와의 이야기에 넌더리가 난 듯 눈까지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꽤 오래 알고 지낸 눈치인데 사와구치는 저 소리를 오래전부터 듣고 있는 건가…….

    [역사를 이어가는 자는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그가 아닙니다.]

    [이동 속도가 상승합니다.]

    [체력 : 2,258 / 4,000]

    방금의 연계 공격으로 체력을 반 넘게 깎았다. 이동 속도가 상승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결과다.

    ‘이 정도면 15분 안에는 끝날 수도 있…….’

    “지의야!”

    “윽!”

    ―콰과광!!

    그때 번개 같은 새하얀 빛줄기가 바로 눈앞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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