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44화 (244/366)
  • 244화

    “신지의 헌터!!”

    “허억……!”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겨우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인형 팔이 깨지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자꾸만 멀어지려는 정신을 잡기 위해 혀를 꽉 물었다.

    ―턱.

    그때 최민 헌터가 내 몸을 안아 올리더니 곧바로 우리가 들어왔던 곳을 향해 날아갔다. 피부에 뜨거운 기운이 닿아 몸이 나른해졌다.

    “빨리 스틱스 강을 사용하세요!”

    “고작, 이걸…로 쓸 순, 컥, 없어요……!”

    “고작이라니…….”

    최민 헌터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지만, 이 정도 상처로 스틱스 강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 병원에서 준 지혈 스프레이와 회복 알약, 그리고 녹두의 배리어로 최대한 회복하는 수밖에.

    ―쾅!

    액자 밖으로 나왔는지 연한 파란색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지의야!”

    그리고 동시에 세빈이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경악한 세빈이를 향해 인형 팔을 내밀며 힘겹게 입을 뗐다.

    “일단 이걸…….”

    “알겠어. 알겠으니까 스틱스 강부터 써.”

    세빈이가 경고에 가까운 말을 하곤 인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윽……!”

    “신지의 헌터!”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바스락.

    그가 꽃밭 위에 나를 내려놓자마자 나는 피범벅이 된 손으로 팔찌의 나무 구슬을 쓰다듬었다.

    ―키이잉!

    마찰음과 함께 연둣빛 구체가 튀어나오더니 곧 녹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그림자가 내 몸 위로 걸리자마자 녹두가 울음소리를 길게 뺐다. 그러자 불투명한 파동이 돔 형태로 바뀌더니 나와 최민 헌터가 있는 곳을 완전히 덮었다.

    ‘언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괜찮아. 별일 아냐…….’

    ‘별일이 아니긴!’

    소리를 꽥 지르는 녹두를 뒤로한 채 인벤토리에 있던 약상자를 꺼냈다.

    ―달그락.

    손에 힘이 풀려 결국 상자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내용물이 빠져나왔다. 굴러가는 지혈제를 향해 손을 뻗자 반 장갑을 낀 손이 그것을 먼저 낚아챘다.

    “실례하겠습니다.”

    “으극!”

    ―치이익.

    최민 헌터가 내 옷을 걷고 지혈 스프레이를 뿌렸다. 쓰라림에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샜지만, 최민 헌터는 아랑곳없이 연필이 관통한 부분에 스프레이 한 통을 다 쓸 기세였다.

    “하아, 하…….”

    배리어의 치료 효과까지 더해져 서서히 고통이 가시기 시작했다.

    ‘기절하는 줄 알았네…….’

    그 짧은 사이에 식은땀을 얼마나 흘린 건지 온몸이 끈적했다. 상체만 살짝 들어 상처 부위를 보니 검붉은 피딱지가 울퉁불퉁하게 올라와 있었다. 조금만 더 치료되면 전투도 가능할 것 같았다.

    ―또각.

    그때 세빈이가 대역 인형과 함께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조립까지 했대.’

    오는 사이에 팔과 머리를 끼웠는지 대역 인형의 상반신이 완성된 채였다. 세빈이는 그것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후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상처를 살폈다. 그의 미간이 순식간에 깊게 파였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몬스터 때문이야?”

    “몬스터는 인간형 C급 수준이었습니다.”

    나 대신 최민 헌터가 대답했다. 세빈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몬스터는 5분 만에 끝냈지만 신지의 헌터가 인형의 팔을 쥔 순간 저주가 내렸습니다.”

    “흡혈 형태의 저주였어. 이런 식으로 무식하게 피를 낼 줄은 몰랐네.”

    역시 인형의 재료를 쉽게 줄 리가 없었다. 만약 이 저주가 내가 들어갔던 곳만의 일이 아니라면, 사와구치와 이시카와도 분명 저주를 받고 나올 것이다.

    두 사람이 들어간 액자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보는 액자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쾅!!

    그때 액자 밖으로 이시카와가 튀어나왔다. 그는 한쪽 옆구리에는 인형의 다리를, 반대쪽에는 사와구치를 낀 채로 녹두의 배리어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이시카와! 괜찮아?!”

    “어어? 뭐야 이거.”

    이시카와는 그제야 자신이 배리어를 딛고 서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화들짝 놀라며 발밑을 바라보았다.

    “윽…….”

    “오오, 사와구치! 정신이 드느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팔에 들려 있던 사와구치 역시 눈을 떴다. 부상이라도 입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외상은 없는 듯했다.

    ―타닥.

    이시카와와 사와구치가 배리어에서 뛰어내리자, 녹두는 그들이 배리어 안으로 들어올 틈을 만들어 주었다.

    ‘응?’

    이시카와는 배리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녹두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 이 아름다운 털을 가진 맹수는 네 사역마인 것이냐?!”

    “사역마……? 내 소환수야. 태양을 삼킨 늑대라는 아이템이고.”

    “오오……!”

    이시카와가 녹두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녀석을 한참 눈에 담았다.

    ‘언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라보는 이시카와 때문에 결국 녹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구조 신호를 보냈다.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겁먹으면 나를 먼저 찾네.’

    그 신호를 무시할 수가 없어 이시카와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인형 다리부터 줘. 얼른 끼워야 하니까.”

    “아, 그렇지. 여기 있다.”

    ―달그락.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는 비주얼이다. 진짜 사람 다리와 똑 닮은 그것을 인형의 상반신에 연결하는 동안 이번엔 최민 헌터가 사와구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그쪽도 저주를 받으신 겁니까?”

    “네. 몬스터는 금방 해치웠는데 인형 다리를 들자마자 갑자기 기절했어요.”

    “네가 든 거야?”

    “어.”

    사와구치의 대답을 듣자마자 최민 헌터와 시선을 교환했다.

    ‘인형 부품을 든 사람에게만 저주가 내려지는 형태구나.’

    “수면 저주라고 했다. 하마터면 나까지 저기서 같이 잠들 뻔했으니 말이다.”

    “이시카와도?”

    “그래.”

    이시카와는 사와구치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잠든 저 녀석을 데리고 나오는 중이었는데 새빨간 가스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마치 케르베로스의 숨결과도 같았지.”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뛰어나온 거였군.”

    “너희도 받은 거지? 어떤 거였어?”

    “물리적인 공격. 흡혈이라고 하더라.”

    두 사람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사실상 몬스터는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진짜 미션은 인형 부품을 가져온 후 강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저주,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다.

    ―슥, 슥.

    희생하는 화가가 또다시 붓질을 시작한 건지 희미한 밑그림만 있던 꽃밭에 서서히 색이 돌았다.

    “일단 인형 부품을 줍는 사람이 무조건 저주를 받으니까 다른 사람이 책임지고 데리고 나오는 걸로 하자.”

    “좋다. 그럼 다음 관문은…….”

    이시카와가 배리어에서 나와 세 번째 액자 앞에 섰다.

    [두 개의 불꽃은 어둠을 밝히고]

    “사와구치, 붉은 머리, 그림자 군주의 시련이군.”

    “그리고 네 번째는 너랑 내가 들어가야 하고.”

    “쳇.”

    “너무 대놓고 싫어하는 거 아니야?”

    세빈이랑 같이 못 들어가서 그런가, 이시카와는 입을 비죽거리며 불만스러운 티를 냈다. 세 번째 액자 앞을 서성거리는 이시카와를 뒤로 한 채 네 번째 액자 앞으로 발을 옮겼다.

    [빛은 폭풍을 축복한다]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조합이라 다행이네. 겹치는 속성이 있었다면 시간이 더 걸렸을 텐데. 세 사람이 세 번째 액자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이시카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시카와, 들어가자.”

    “알겠다. 이 몸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해라.”

    “알았어, 알았어.”

    ―타닥.

    액자 안으로 발을 들여 주위를 살피니 이번엔 밝은 대리석으로 된 공간이 우릴 둘러싸고 있었다.

    “하, 이동계 스킬이 없는 우민들은 가져가지도 못하게 해놨군.”

    그때 이시카와가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를 따라 고개를 올리니 샹들리에에 센의 검 모형이 걸려 있었다. 이시카와의 말대로 이동계 스킬이 없다면 저 모형을 안전하게 꺼내는 건 쉬워 보이지 않았다.

    ―끼릭, 끼리릭.

    안쪽에서 태엽을 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자아를 손에 든 채 전투에 대비할 때쯤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협동]

    [화강암, 5x6x3m]

    [체력 : 6,000/6,000]

    [힘을 합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협동을 쓰러트리면 대역 인형의 검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돌로 만든 팔이 서로 얽혀 거대한 거미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튀어나온 여덟 개의 다리 역시 팔로 되어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생김새였다.

    “역겨운 마물이구나. 이를 흙으로 돌리는 것 역시 마왕인 이 몸의 책임이겠지.”

    “그런 대사는 매번 생각하고 있다가 나오는 거야?”

    “하, 대사라니. 마치 이 몸이 마왕을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네네 님은 신주쿠에서 태어난 마왕의 후계…….”

    ―두두두두.

    이시카와의 헛소리가 시작되자마자 ‘협동’이 우리를 향해 빠르게 기어 왔다.

    ―우웅.

    낮말을 듣는 새로 공중으로 뛰어오른 후 방아쇠를 당겨 녀석의 움직임을 멎게 했다. 새하얀 음파에 정신을 못 차리는 녀석의 위로 이시카와가 가위를 들고 빠르게 하강했다.

    ―콰그작!

    둥그런 몸체의 한가운데에 박힌 가위를 다시 빼낸 후 이시카와가 태풍을 일으켰다.

    [어려울수록 함께 하는 것이 협동의 미덕입니다.]

    [방어력이 상승합니다.]

    [체력 : 4,516/6,000]

    ‘상대적으로 까다롭군.’

    다섯 번째 액자에 가까워질수록 몬스터의 수준도 상승하는 건지, 처음 만났던 몬스터에 비해 체력도 높고 스스로 방어력을 강화하기까지 했다.

    ―탕, 탕, 탕.

    그래도 기동성 면에선 우리가 더 유리하지.

    공중에 머문 채로 ‘협동’의 움직임을 따라 탄환을 쏘자 녀석은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며 그것을 피하기 바빴다.

    ―투쾅!

    그때 녀석이 바닥에서 높이 튀어 올라 내 쪽으로 몸을 날렸다.

    “흡!”

    ―콰과광!!

    곧바로 자아를 바주카로 바꿔 발포하자, 정확히 녀석의 배 한가운데에 포탄이 명중했다. 팔들은 서로를 더욱 꽉 잡으며 형태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커다란 균열이 생겨 팔 몇 개가 떨어져 나갔다.

    “이시카와!”

    “크림슨 토네이도오!!”

    ―쾅!

    정체불명의 외침과 함께 태풍의 눈을 두른 이시카와가 녀석을 향해 돌진했고 바람에 밀린 ‘협동’의 몸이 보기 좋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어떤 시련이 와도 우리는 함께 합니다.]

    [방어력이 상승합니다.]

    [체력 : 4,184/6,000]

    “흥. 확실히 단단해지긴 했구나.”

    “그래도 공격은 허술한 편이야. 지금처럼 계속 공격 넣어 보자.”

    “마왕에게 명령을 하다니 건방지구나.”

    ―철컹.

    말은 툴툴거렸지만 이시카와는 가위를 고쳐 들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림자 군주의 친우라고 하니 넘어가 주겠다.”

    “그래, 영광이네…….”

    ―탕!!

    이시카와의 헛소리에 장단을 맞춰주는 동시에 몬스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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