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43화 (243/366)
  • 243화

    상자 안에 든 것을 보고 순간 몸이 굳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해 보려 숨을 깊게 들이마셨지만 오히려 떨리는 숨소리가 더욱 적나라하게 들릴 뿐이었다.

    ―달그락.

    그때 세빈이가 상자 안으로 상체를 숙이더니 그것들을 꺼냈다. 평온한 얼굴로 집어 든 탓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자 세빈이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인형이야. 만져 보니까 도자기 같네.”

    “…아.”

    세빈이의 말에 조심스럽게 몸에 손을 대니 딱딱하고 차가운 질감이 느껴졌다.

    “하아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너무 긴장하고 있었나 보네.'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할 때쯤 다른 사람들도 우리 주위로 모였다. 이시카와는 세빈이의 오른손에 들린 백발의 머리를 가져오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듯했다.

    “팔다리도 없고, 눈도 없고, 머리도 엉망이군.”

    “아무리 인형이라고 해도 대역으로 삼기엔 부족한 점이 많군요.”

    “바로 그거다, 그림자 군주! 나와 생각이 통하는구나!”

    이시카와가 밝게 웃으며 세빈이를 향해 소리치자 세빈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탁.

    사와구치가 세빈이와 이시카와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이시카와의 손에 들려 있던 인형 머리를 들었다.

    “그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 나도 똑같이 생각했어.”

    “뭐, 칭찬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것이냐?”

    “아니거든.”

    ‘사와구치가 세빈이를 묘하게 견제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지금은 이런 호기심이 생길 때가 아니다. 이 대역 인형으로 어떻게 센을 바꿔 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걸 잠깐 봐 주시겠습니까?”

    그때 최민 헌터가 우리에게 손바닥만 한 종이를 내밀었고, 그것을 건네받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상자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대역 인형을 완성시키는 방법에 대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종이엔 아까 봤던 상태창과 동일한 필체로 문장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이 대역 인형은 미완성입니다. 미완성의 대역 인형으로 피사체를 대체할 경우, 희생하는 화가는 크게 분노할 것이고, 아마 피사체와 함께 죽음을 선택하겠죠.]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피사체의 위쪽으로 오십시오.]

    [인형을 완성시킬 재료가 그곳에 있습니다.]

    의심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안내였다. 쪽지에서 눈을 떼고 다른 사람들을 보자 나와 비슷한 기분인 건지 다들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일단 이동하자. 그림이 언제 완성될지 몰라.”

    “쳇, 다른 선택지가 없군.”

    이시카와가 투덜거리며 먼저 달려 나갔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흔들렸고 그 뒤를 사와구치가 급하게 쫓았다.

    재료를 곱게 줄 리가 없다. 연기자의 파편에서 몬스터를 잡고 가짜에 대한 힌트를 얻었던 것처럼 분명히 우리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겠지.

    ―바스락.

    이시카와를 따라 위쪽으로 한참 이동하자 나란히 서 있는 액자 다섯 개가 눈에 들어왔다.

    “인형에게 필요한 것들이네.”

    액자를 차분히 보던 세빈이가 말을 덧붙였다. 왼쪽에서부터 팔, 다리, 눈, 그리고 검이 금색의 프레임 한가운데에 그려져 있었다. 말 그대로 센의 대역 인형이다 보니 진짜 그의 것과 닮았다.

    ‘그럼 저 마지막에 있는 건 뭐지?’

    반면 마지막 액자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검게 칠해진 캔버스 위에 새하얀 원형 테두리가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시카와, 사와구치. 혹시 저 마지막 그림 뭔지 알겠어?”

    “저 동그라미를 말하는 것이냐?”

    “응. 아무래도 센 씨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

    나보다는 같이 싸운 동료들이 그에 대해 잘 알겠지. 두 사람은 그림을 빤히 응시하더니 곧이어 사와구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센 님의 고유 스킬 같기도 하네.”

    “오, 사와구치. 네 녀석 눈썰미가 꽤 좋구나.”

    “그냥 추측이야.”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센의 고유 스킬인 ‘아마테라스’의 후광처럼 보였다.

    ―스스슥.

    그때 하늘의 한 가운데로 푸른색 선이 그어졌다. 우리가 이 장소를 파악하는 동안 희생하는 화가의 그림은 서서히 완성되고 있었다.

    ―쿵.

    이시카와가 인상을 구긴 채로 가위를 들쳐메곤 액자 쪽으로 발을 돌렸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센 님이 위험하다! 각자 흩어져서 재료를 구해 오는 걸로 하……!”

    ―쾅.

    우리에게 이야기하며 액자로 뛰어 들어가던 이시카와가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꽤 큰 소리에 나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몸을 움찔 떨었다.

    “악!”

    “네네?!”

    이시카와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마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나자 사와구치가 기겁하며 그의 옆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이마가 약간 붉어졌을 뿐이었다

    “쳇, 마수의 결계인가……!”

    “결계겠어? 빨리 얼굴 보여줘 봐.”

    “호들갑 떨지 말아라. 네 녀석이야말로 왜 갑자기 이름을 부른 것이지? 유치원 때로 돌아간 줄 알았다.”

    “윽……!”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난 이시카와가 부딪힌 액자를 살폈다. 액자의 오른쪽 아래에 미술관에서 볼 법한 작은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두 개의 불꽃은 어둠을 밝히고]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었다. 다른 액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미 최민 헌터와 세빈이가 그것들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거기도 뭐라 쓰여 있어?”

    “첫 번째 액자는 ‘쏟아지는 빛과 꺼지지 않는 불꽃’. 그리고 이건 ‘바람 앞의 촛불’이라고 쓰여 있네.”

    “네 번째는 ‘빛은 폭풍을 축복한다’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가장 마지막 액자로 발을 옮기자 가로로 긴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빛을 품은 영웅은 어두운 폭풍 속에서도 기꺼이 지옥 불을 향해 나아간다]

    ‘빛, 어둠, 폭풍, 불…….’

    모든 액자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단어들을 쭉 읊은 후,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릿속에 이시카와가 ‘두 개의 불꽃은 어둠을 밝히고’의 액자 속으로 들어가려다 실패한 것이 떠오르자마자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이 액자에 나온 속성대로 들어가야 하네.”

    “뭐? 그런 거였어?”

    이마를 한참 문지르던 이시카와가 자신이 부딪힌 액자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이름표를 확인했다. 그러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몸이 지나가지 못한 건 다 이유가 있었군.”

    “그럼 액자에 맞게 서 보죠. 나눠서 들어가면 금방 끝날 것 같네요.”

    “흐음, 일단 첫 번째는 SS급이랑 저 붉은 머리 여자가 들어가면 될 것 같고. 두 번째는 나랑 이시카와가 들어가면 되겠군.”

    사와구치가 이름표를 보며 두 번째 액자로 발을 옮겼다. 아무래도 호흡을 한 번이라도 맞춰 본 사람들끼리 들어가는 것이 전투하기에 수월할 테니, 다들 이견은 없었다. 액자 앞에 선 우리를 보며 혼자 남은 세빈이가 입을 열었다.

    “전 여기서 기다릴게요. 세 번째 액자는 최민 헌터와 사와구치 헌터의 체력이 회복된 후에 들어가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사와구치는 쌀쌀맞게 대답한 후 이시카와와 함께 액자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간 성격 한번 이상하네…….’

    뒤를 돌아보니 세빈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세빈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조심해,’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후 액자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탁.

    나와 최민 헌터가 액자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어두컴컴했던 공간의 정중앙에 조명이 켜졌다.

    “아.”

    “팔이군요.”

    새하얀 조명이 비춘 곳엔 인형의 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냥 가져가라고 두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

    ―타앙!

    나는 자아를 들어 인형 팔의 위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펑.

    주위 공기를 진동시키며 앞으로 날아가던 탄환이 무언가를 맞히고 터트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탁, 탁.

    “조심하세요. 뭔가 오고 있습니다.”

    “네.”

    ―탁, 탁, 탁.

    발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로 어둠 속의 기척에 감각을 곤두세웠다.

    ―탁.

    마침내 녀석이 인형 팔의 바로 뒤에 서서 모습을 드러냈다.

    붓과 연필, 그리고 물감이 이리저리 붙어 있는 사람의 형체가 우리를 마주했다. 녀석의 머리엔 물감이 눌어붙은 양동이가 얹혀 있었다.

    [피에 취한 밤]

    [피부 위에 혈액과 붓, 160x50x30cm]

    [체력 : 3,000/3,000]

    [피에 취한 밤을 쓰러트리면 대역 인형의 팔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볼 법한 작품 설명이 상태창으로 나타났다. 녀석은 우리를 보며 멀뚱히 서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에 꽂혀 있던 연필 두 자루를 꺼내 손에 쥐었다.

    ―쿵!

    몬스터가 연필을 단검처럼 든 채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광!

    불의 벽이 녀석의 공격을 막는 동시에 최민 헌터는 공중으로, 나는 옆으로 빠져 녀석의 등 뒤를 노렸다.

    ―탕!

    녀석이 몸을 숙여 아슬아슬하게 내 탄환을 피하자마자 시뻘건 불길이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을 집어삼키며 폭발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졌다며 슬퍼합니다.]

    [체력 : 2,104/3,000]

    ‘체력과 방어력이 모두 낮군.’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빠르게 정리될 것 같았다. 낮말을 듣는 새로 허공을 디딘 후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겼다.

    ―쩌저적.

    음파가 공간을 가득 채우자마자 피에 취한 밤의 몸에 금이 가더니 이내 녀석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연필과 붓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최민 헌터의 불꽃이 녀석의 몸 사이를 파고들어 폭발을 일으켰다.

    [역작이 되지 못함에 슬퍼합니다.]

    [체력 : 1,245]

    “너무 쉽게 해결되니 오히려 불안하군요.”

    그때 최민 헌터가 내 옆으로 날아오며 낮게 중얼거렸다.

    ‘하긴 이 정도로 수준이 낮은 건 좀 찝찝하네.’

    녀석의 움직임은 재빠르긴 했지만, 연필을 휘두르는 것 외엔 특별한 공격 패턴도 없었고 방어력도 처참했다. 창조자의 파편 안에서 만나는 몬스터 중 가장 약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일단 멀리서 해치워 보죠.”

    “알겠습니다.”

    찝찝함을 뒤로한 채 최민 헌터에게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발밑에 있는 피에 취한 밤은 제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나를 향해 연필을 뻗을 뿐이었다.

    ―펑!!

    바주카로 바꾼 자아의 포성과 함께 굵직한 포탄이 녀석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과광!!

    공간이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포탄을 온몸으로 맞은 피에 취한 밤은 철골만 앙상하게 남아 볼품없는 모습이 되었고 연필과 붓들은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바닥을 굴렀다.

    ―타닥.

    자아를 다시 확성기로 바꾸며 조심스럽게 착지했다. 녀석은 나를 공격하려 했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다가 이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피에 취한 밤이 소멸합니다.]

    [체력 : 0/3,000]

    소멸했다는 문구가 나타나도 영 후련하지 않았다. 최민 헌터도 마찬가지였는지 녀석의 잔해를 응시하는 눈이 더욱 매서워져 있었다.

    ‘기분 탓이겠지.’

    일단 인형의 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짧은 전투의 여파로 가지런히 놓여 있던 팔이 흐트러져 있었다.

    ―달그락.

    진짜 사람의 팔처럼 보이는 인형 팔을 들어 최민 헌터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피에 취한 밤의 저주가 발동됩니다.]

    [저주 형태 : 흡혈]

    ―푹.

    “어?”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복부가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후두둑.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복부에 박힌 날카로운 연필이 다시 빠져나오면서 검붉은 피가 바닥 위에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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