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쾅!!
액자 앞에 있던 이시카와와 사와구치가 무기를 휘두르며 나무 액자를 내려쳤지만, 액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할, 센 님! 정신 차리세요!”
“안 돼, 안 돼……!”
두 사람이 다급하게 소리쳐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액자, 연필로 그려진 듯한 센, 미완성의 그림.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글자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내가 보았던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 냈다.
‘희생하는 화가의 업……!’
틀림없다. 이건 그가 짊어진 업이자 그가 갖고 있던 창조자의 파편이 벌인 짓이다.
구원자의 눈동자로 그를 봤을 때 자신을 액자 속에 가둠으로써 소원을 실현한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어.
그가 내게 말도 안 하고 파편에 먼저 손을 댔을 리는 없을 것 같고, 레일리 때처럼 파편이 먼저 센을 끌어당겼겠지.
“야, SS급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비켜! 방해된다고!”
―쾅!!
사와구치의 검이 또다시 액자를 내리쳤다. 센의 그림 주위로 날이 파고드나 싶더니, 이내 스파크를 내뿜으며 그를 튕겨냈다. 병실에 있던 소파에 부딪혀 사와구치의 몸이 뒤로 한 번 굴렀다.
‘공격 말고 다른 방법으로 파편 안으로 들어가야 할 방법을 찾아야 해.’
“센 님이 저 액자에 갇힌 지 적어도 30분은 지났을 거다.”
그때 이시카와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귀에 통역기를 끼워 넣으며 말을 덧붙였다.
“1시간 전쯤 센 님이 내게 문자를 보냈다.”
“뭐라고 왔는데?”
“대나무.”
―쾅!
이시카와가 높이 뛰어올라 가위로 액자를 한번 찍은 후 아무런 소득 없이 다시 내 옆으로 착지했다.
“위급 상황일 때 쓰는 상급 헌터들만의 암호다. 발설은 금기시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어쩔 수 없지.”
“그럼 센 씨는 그때부터 저 액자에 갇히던 중이었겠네.”
“이 몸의 추론으론 그렇다.”
‘파편이 이미 열렸던 상황인데, 어떻게 해야 다시 들어갈 수 있지?’
S급 두 명이 달려들어도 액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부수고 들어갈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난 오른쪽 눈을 감고 액자를 바라보았다.
[희생하는 화가의 파편]
[예술의 뜻을 펼칠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화가의 의지]
[*예술가라는 것을 증명한 자만이 그의 의지에 닿을 수 있다*]
‘예술가라는 걸 증명한 자…'
눈으로 병실 안에 있는 물건들을 쭉 훑었다. 부서진 테이블과 바닥을 나뒹구는 물병과 링겔들로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세빈이와 최민 헌터가 서 있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제일 적합해 보이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콰직!
벽에 박혀 있던 붓을 뽑자 콘크리트 가루 같은 것이 병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행동에 간호사들이 몸을 움찔 떨며 놀랐다.
아까부터 이게 좀 이상하긴 했지. 건물을 지을 때 붓을 넣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이 붓은 아마 이시카와와 사와구치가 병실에 도착하고 나서 창조자의 파편이 우리에게 남긴 힌트일 것이다.
“SS급, 지금 뭘 하려는 거야?”
“물러서 봐.”
사와구치를 지나 액자의 바로 앞에 섰다.
―치지직.
액자에 붓을 대자 액자의 위에서부터 검은색 액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주르륵 흘러내린 액체는 곧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로 커졌고 얼마 안 있어 옆에 문자가 나타났다.
[入口]
“이, 이건 예상치 못했군.”
이시카와가 얼떨떨한 듯 말을 더듬었다.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마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상 상황이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 그리고 몸 상태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파편 안으로 발을 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센은 액자에 갇히게 될 것이고, 실현되지도 않을 소원 때문에 무의미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압도]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말을 덧붙였다.
“지금 센 씨가 갇힌 곳은 너희들이 겪어본 적 없는 유형의 던전일 거야. 경계보다 클리어 조건이 까다롭고 마지막에 만나게 될 몬스터도 매우 강해.”
“경계보다……?”
“하지만 나와 세빈이, 그리고 최민 헌터는 이 던전을 겪어봤지.”
이시카와가 세빈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세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사와구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와구치 역시 눈동자만 굴려 이시카와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날 믿고 이 던전으로 따라와 줘.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야.”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이시카와 네네’가 동요한다.]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사와구치 미나토’가 동요한다.]
두 사람과 나 사이에 상태창이 빠르게 떴다. 그 너머로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은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곧 결심한 듯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발언 결과 : 수용]
“알겠다. 이 몸이 친히 공략 주도권을 네게 주도록 하지.”
“마음대로 해. 난 지금 당장이라도 센 님을 구하러 들어가고 싶으니까.”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후 이번엔 세빈이와 최민 헌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잔뜩 심각해진 얼굴이 전부 액자를 향하고 있었다.
‘둘 다 데리고 들어가는 게 좋겠지.’
우리 셋을 제외한 다른 S급들은 파편 밖에 있다. 혹시 모를 상황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실력의 사람들이니 두 사람의 힘을 빌려도 괜찮을 것이다.
“세빈아, 최민 헌터.”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같이…….”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물론이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적극적인 반응에 고개를 홱 들어 두 사람을 보자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최민 헌터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
“제가 신지의 헌터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탁.
최민 헌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세빈이가 내 손을 잡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지의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
“응, 고마워…….”
“예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난 네 옆에 있을 거니까.”
세빈이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듯했다.
‘그래, 해결할 수 있어.’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면 지금까지 많이 겪었다. 앞이 캄캄해질 때도 있었지만 나를 믿고 함께 싸워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우리’는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후 입구의 간호사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협회에 지금 상황을 알려 주세요. 혹시 모르니 환자들 대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신지의 헌터, 이것도 받아 주세요.”
그때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간호사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살짝 열어 보니 알약이 가득 담긴 봉투와 스프레이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스프레이는 지혈제고, 알약은 회복력을 돕는 환이에요. 상자가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져 있어서 인벤토리 안에도 들어갈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는 진지한 눈으로 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다른 간호사들을 향해 대피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SS급, 이제 들어가도 되는 것이냐?”
“응. 가자.”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액자에 생긴 검은 균열 안으로 발을 들였다.
―파아앗.
액자 안은 사방이 새하얀 공간이었고 땅과 하늘의 경계가 없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긴커녕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들어왔지? 다친 곳은 없지?”
“응. 멀쩡해.”
“괜찮습니다.”
“그래! 젠장할, 이 몸의 마안으로도 다른 녀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
“이시카와 제발 좀…….”
다행히 목소리는 들렸다. 전부 무사히 들어온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파지직.
[희생하는 화가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움직입니다.]
[뭉툭한 연필이 캔버스를 가로지를 때마다 숭고한 희생의 밑그림이 그려집니다.]
[“언젠가 꼭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희생하는 화가는 자신의 피사체를 보며 중얼거립니다.]
[피사체는 눈을 감은 채로 누워 있을 뿐입니다.]
‘이제 시작이군.’
파편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듯 눈앞에 문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희생하는 화가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싸워야 할 몬스터가 될 것이고, 그가 이야기하는 피사체는 아마 센을 가리키는 거겠지.
“곧 클리어 조건이 나올 거야. 다들 꼼꼼히 읽어줘.”
파편의 메시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하자 저마다의 대답이 돌아왔다.
[“희생을 각오한 영웅의 마지막 모습을 담는 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죠.”]
[희생하는 화가는 이 작품이 자신의 역작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자신의 피사체를 그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쿠구궁.
새하얀 공간이 진동하며 문자가 사라지더니 곧 만년필로 쓴 것 같은 글씨체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입장한 납치범 5명]
[통제받는 시간선에 입장합니다.]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피사체와 대역 인형을 바꿔치는 데 성공하면 희생하는 화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바스락.
새하얬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옴과 동시에 발이 다시 한번 땅에 닿았다. 고개를 돌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무채색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아까 봤던 그 그림 속인 것 같군요.”
그때 최민 헌터가 내 옆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과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 그리고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꽃밭까지, 전부 연필로 그린 듯했다.
―스윽, 슥.
그리고 풍경은 지금도 계속 그려지고 있었다.
“센 님!”
갑자기 이시카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달려가자 꽃이 만개한 들판에 우리를 제외한 세 사람이 어딘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닥.
“센……!”
그들의 시선 끝엔 센이 있었다. 센은 액자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꽃밭 위에 누워 있었다.
“살아 계신 것 같아. 호흡이랑 맥박도 전부 정상적으로 뛰고 있고.”
센의 몸을 살피던 사와구치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센도 그려져 있네…….’
진짜 그림처럼 평면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가느다란 연필 선으로 그려진 상태였다.
“피사체는 역시 센 님을 가리키는 거겠지?”
“응. 애초에 이 그림의 주인공이 센이니까.”
이시카와가 초조한 얼굴로 센을 내려다보았다.
“빨리 그 대역 인형인지 뭔지를 찾아야 할 것 같은…….”
―쿵.
이시카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내 등 뒤로 묵직한 무언가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자아를 조준했지만, 무엇인지 보자마자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가락을 멈췄다.
“상자……?”
사와구치가 어이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내 허리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상자가 뚜껑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다.
―바스락.
무채색의 꽃밭을 밟으며 상자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고 고개만 쭉 빼 안을 살폈다.
“윽…….”
상자 안에는 팔다리가 없는 사람의 몸통과 긴 백발을 가진 머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