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세계 헌터 교류전 한―일 시범 경기, 그 두 번째 막이 올랐습니다! 저는 해설의 속사포~
―캐스터 김수진입니다!
―어제에 이어 많은 관중 여러분들이 경기를 보기 위해 이곳 고척 스카이돔에 찾아 주셨습니다~
카메라가 관중석을 비추자 스크린에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스크린에 비친 자신을 보며 손을 흔들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밝게 웃었다.
―어제 경기, 상당히 박진감 넘쳤죠. 하미준 헌터의 자본 대첩과 차도윤 헌터의 카운터 장면은 벌써 유X브에서 조회수 5천만 회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전 세계가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오늘 경기는 아마 어제 경기보다 더 핫할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요. 바로 DF 랭킹 3위의 강세빈 헌터와 전세계 유일의 SS급이자 DF 랭킹 1위에 빛나는 신지의 헌터의 경기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속사포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DF 상위 랭커들의 경기에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라 있었고, 실시간 채팅창도 전날에 비해 훨씬 빠르게 올라갔다.
―타닥.
헌터들이 더그아웃에서 대기 중이라는 신호를 받은 해설진들이 태블릿으로 스킬 설명지를 띄워 놓은 후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탁.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체 조명이 꺼지고 필드와 스크린만이 밝게 빛났다.
―자! 그럼 지금부터 세계 헌터 교류전 한―일 시범 경기, 세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
사람들이 환호하자 스크린에 세빈과 사와구치의 모습이 나타났다. 박진감 넘치는 음악과 함께 조명이 세빈 쪽 더그아웃을 비추었고, 세빈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경기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소속 강세빈!
―강세빈 헌터는 최연소 S급 각성자이자 전 세계 최초 S급 스킬 3개 보유자죠!
―강세빈 헌터가 이번 경기에서 사용할 스킬들은~ 화면을 통해 만나 보시죠.
속사포가 흥미롭다는 듯 씩 웃으며 뜸을 들이자, 관중들은 일제히 세빈의 프로필이 뜬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세빈]
[어둠 속성]
[S급 정신계 스킬 ‘공포’]
[연계 패시브 스킬 ‘무의식’]
[무기 : S급 장검 ‘영(影)’]
[DF : S2 A75]
스크린을 본 사람들이 잠시 입을 다물더니 곧 술렁이기 시작했다.
“공격계 스킬이 아니네?”
“헐, 야 대박.”
“스킬 하나밖에 안 쓰는 거야?”
‘강세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지의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필드가 바로 보이는 창문 쪽으로 몸을 쭉 뺐다. 그는 그제야 사와구치가 황급히 자신의 공격계 스킬을 뺀 이유를 알아차렸다.
‘비슷한 조건에서 싸우려고 한 거구나.’
지의는 사와구치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정말로 공격계 스킬을 써서 세빈을 이기더라도 사람들이 진짜 승리로 인정해 주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공격계 스킬을 버리고 동등한 위치에서 전투를 하는 것이 그런 비난에서 벗어나기 좋을 것이다.
―끼익.
지의가 다시 소파에 앉으며 스크린에 비친 세빈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이 될 것이라는 걸 예상이라도 한 듯, 필드 안으로 들어가는 제 소꿉친구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속사포 씨, 파이트 클럽에서 활동하셨을 때 스킬을 적게 제출하는 헌터들도 있었나요?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의식중에 스킬을 쓰는 바람에 실격 당했습니다.
―아, 역시 그렇군요. 강세빈 헌터도 이 점을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선수 소개하겠습니다!
―일본 헌터 협회 소속 사와구치 미나토!
사와구치가 경기장 안으로 발을 들이자 일본 관중들이 열광했다. 스크린에 떠 있던 프로필이 그의 것으로 바뀌자 이번엔 모든 관객석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사와구치 미나토]
[불 속성]
[A급 이동계 스킬 ‘오니의 발자국’]
[무기 : S급 이도 '형제의 검']
[DF : S2 A45]
사와구치 역시 공격계 스킬을 제외한 것이 공개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와구치 헌터도 자신의 공격계 고유 스킬을 빼고 경기에 참가합니다!
―두 헌터 모두 근접 전투에서 더 빛이 나는 헌터라서 아주 박진감 넘치고 격렬한 전투가 예상됩니다!
속사포가 잔뜩 흥분한 말투로 소개를 마칠 때쯤 사와구치까지 필드 안으로 들어왔다. 직원이 그의 몸에 피격 센서를 붙이는 동안 사와구치는 세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쳇.”
그는 혀를 차며 세빈의 스킬 설명지를 처음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다른 스킬도 아니고 정신계 스킬만 하나 적어 넣은 종이를 받자마자 내장 깊은 곳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했다.
‘공격계 스킬이 없어도 나 정도는 이길 수 있다, 뭐 이런 건가?’
세빈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한 사와구치는 이를 아득 갈았다. 시선 끝의 세빈은 피격 센서 부착이 완료될 때까지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부착 완료되었습니다. 배리어 경화 완료 후 신호음이 들리면 경기 시작입니다.
직원들이 나가자 필드 안은 오롯이 세빈과 사와구치의 것이었다. 해설진들의 말소리와 응원단의 고성은 벽에 막혀 웅웅거리는 소리만 냈다.
“공격계, 은신계, 정신계. 이렇게 세 개의 고유 스킬이 있다고 들었는데.”
“…….”
“왜 공격계를 버리고 정신계만 쓰는 거지?”
―철컹.
세빈은 그림자 속에서 검을 뽑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심사가 뒤틀린 사와구치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말을 덧붙였다.
“자만하는 거야? 공격계 스킬이 없어도 나 정도는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말까지는 안 했습니다.”
“윽.”
사와구치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헌터석에 앉아 있는 이시카와가 눈에 들어왔다. 야마모토의 옆에 앉아 필드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사와구치를 보자마자 핸드폰을 번쩍 들었다. 핸드폰 화면 위로 붉은 글씨가 천천히 옆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상대는 그림자 군주다! 질 거면 멋지게 져라!]
“하…….”
이시카와의 응원 아닌 응원에 사와구치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저를 보며 열심히 손을 흔드는 이시카와 쪽으로 저도 모르게 시선이 자꾸 갔다.
‘미안하지만 네네, 난 질 생각이 없어.’
―탁.
사와구치가 자신의 귓바퀴에 끼워진 피어싱에 손을 대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단도 한 자루와 얄쌍하고 긴 장검 하나가 그의 양손에 들렸다.
‘길이가 서로 다른 이도…….’
세빈이 사와구치의 무기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짧지만 묵직해 보이는 단검은 찔러서 치명상을 주기 위한 용도, 반면 장검은 거리를 만들어 공격 찬스를 버는 데 적합해 보였다.
[경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선수 여러분들은 지금 자리를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드 내부에 안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두 사람은 무기를 고쳐 들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경기 시작까지 10초!
―9! 8! 7!
속사포가 선창하자 사람들은 스크린에 뜬 숫자를 보며 카운트다운을 세기 시작했다.
―0!
―쾅!!!
관중들이 0을 알리자마자 필드 내부의 경기 시작 안내음이 흘러나왔고, 그와 동시에 사와구치와 세빈이 무기를 맞부딪혔다.
[LIVE 실시간 채팅]
[역대급 난전일 듯 ㄷㄷㄷㄷ]
[가슴이 웅장해진다…]
[둘 다 공격계 스킬 안 쓰는 게 ㄹㅇ 간지ㅋㅋㅋ]
[일본 헌터 DF 랭킹 몇 위임?]
[10위. 쟤도 보통은 아님]
―챙!
상대를 먼저 밀어낸 건 사와구치였다. 세빈도 억지로 버티지 않고 뒤로 한 바퀴 돌아 물러났다. 그 틈에 거리를 다시 좁힌 사와구치가 이번엔 장검 손잡이로 세빈의 턱을 노렸지만, 세빈은 고개를 뒤로 꺾어 그 공격을 피했다.
―쿵.
세빈은 자신의 복부를 향해 있던 사와구치의 검날을 발로 밟아 땅에 박은 후 곧바로 영을 횡으로 베었다.
―사와구치 헌터, 장검을 빠르게 버리고 뒤로 물러납니다! 강세빈 헌터의 무기가 아슬아슬하게 사와구치 헌터의 다리를 스치긴 했지만 피격 횟수로는 카운트되지 않았습니다.
―사와구치 헌터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검이 더 깊게 파고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와구치는 장검의 소환을 해제했다 다시 꺼내, 자신의 손 위로 빠르게 이동시켰다.
―쾅, 쾅, 쾅.
이번엔 세빈이 먼저 사와구치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검에 실린 힘 자체가 압도적이었던 탓에 사와구치는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LIVE 실시간 채팅]
[무기 부서지겄다]
[강세빈 무기도 엄청 굵은 편은 아닌데 미나토꺼가 워낙 얇아서 더 거대해 보임ㅋㅋㅋㅋ]
[둘 다 스킬 전부 다 썼으면 재밌었을 텐데 아쉽]
―끼긱!
그때 세빈이 검을 높이 든 후 검을 역으로 쥐어 순식간에 검날을 밑을 향하게 했다. 팔을 아래로 내리는 동시에 검을 가로로 꺾자 검날은 자연스레 사와구치의 목 뒤에 닿았다.
“큿……!”
순간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낀 사와구치가 상체를 숙이자 세빈의 무릎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명치를 향했다.
―뻐억.
[강세빈 0 : 사와구치 미나토 ―1]
“커헉!”
사와구치의 몸이 붕 떴다. 그는 눈앞이 새햐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땅에 착지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장검으로 몸을 지탱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엎어져 경기 종료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뻔했다.
“강세빈 헌터가 선취점을 따냅니다!”
“검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압한 후 맨몸으로 공격! 연계가 매끄럽게 이어지는군요!”
공격을 마친 후 세빈은 그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뒤로 몇 발 물러나 사와구치를 바라보기만 했다.
“컥, 쿨럭, 윽…….”
사와구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무기를 고쳐 들었다. 세빈을 응시하는 연갈색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먹이의 숨통을 끊어 놓을 듯한 맹수의 눈이었지만 세빈은 그를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공포라는 감정의 주도권은 세빈이 각성할 때부터 그의 손안에 있었기에.
―쿵.
“헉……!”
오히려 압도된 건 사와구치였다. 세빈과 시선이 맞닿은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몸을 꽉 움켜쥔 것처럼 온몸이 저렸고 극도로 긴장한 탓에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건 정신계 스킬일 뿐이야. 정신 차려, 사와구치.’
그가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고 나서야 마비 상태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방금 사와구치 헌터의 움직임이 잠깐 멎었던 걸로 보이는데요.
―아무래도 강세빈 헌터가 정신계 스킬, 공포를 시전한 것 같습니다.
―생명체를 압도하는 공포라고 나와 있는데, 눈으로 직접 보이는 스킬이 아니다 보니 해설이 늦은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퍼버벙!
속사포가 말을 마치자마자 사와구치가 빠르게 이동했다. 불꽃이 그가 움직인 길을 따라 작게 일더니 곧 커다란 불기둥 서너 개가 치솟았다.
사와구치는 불기둥들의 한 가운데 선 채로 양손에 다시 검을 들었다. 세빈은 폐부를 데우는 뜨거운 공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 이제 네가 갖고 있는 스킬도 다 봤으니까.”
―철컹.
“본격적으로 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