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휘이잉!
휘슬이 울리자마자 잿빛 소용돌이가 이시카와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이시카와 헌터, 태풍의 눈을 바로 사용하네요!
―이시카와 헌터는 아마 차도윤 헌터와 거리를 좁히는 걸 가장 우선시할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금세 천재지변이 이시카와 헌터를 집어삼킬 테니까요.
―반면 차도윤 헌터는 이시카와 헌터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원거리 공격을 계속 퍼부을 것으로 보입니다.
―쾅!
이시카와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더니 도윤 쪽으로 빠르게 하강했다. 도윤은 바람을 일으켜 그를 튕겨내곤 곧바로 활시위를 당겼다. 날아가는 화살에 바람을 한 번 더 실어 가속시키자 바람 화살이 연둣빛 궤적을 남기며 이시카와의 다리를 향했다.
[차도윤 0 : 이시카와 네네 ―1]
이시카와가 태풍의 눈으로 화살을 막으려 했지만 화살이 반으로 갈라져 양쪽에서 날아온 탓에 결국 한쪽 종아리를 내주고 말았다.
―차도윤 헌터, 선취점을 따냅니다!
―민첩하고 차분한 공격이었네요. 방금 건 이시카와 헌터가 약간 방심한 것도 있어요.
[LIVE 실시간 채팅]
[역시 가랑비 딜의 의인화 차도윤]
[도윤이 파이팅]
[야금야금 공격 넣고 점수 승할 듯]
이시카와는 얇은 핏줄기가 떨어지는 다리를 보며 혀를 한번 차더니 이내 씩 웃으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제법 아프구나. 이 몸의 육체에 피를 낸 건 정말 오랜만이야.”
“…….”
“하지만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이 몸의 피가 땅에 흩뿌려지면 지옥의 권속들이 올라와 네 숨통을 조일 것이다!”
―콰과광!
도윤이 이시카와의 말에 귀 기울이려는 순간 그가 도윤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바람을 탄 이시카와가 도윤과 가까워질수록 태풍의 눈이 점점 범위를 넓히더니 금방 도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칫.”
―피잉!
뒤로 물러나며 시위를 당겼지만 화살은 이시카와의 태풍에 집어 삼켜질 뿐이었다.
[LIVE 실시간 채팅]
[애니X이트 의외로 잘 싸우네]
[네네 일본 헌터들 중에서 팬 제일 많음]
[ㄹㅇ? 그냥 오타쿠 같은데]
[센이랑 카렌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뭐가 제일 많아ㅋㅋ]
[나 일본 살아서 현지 반응 앎. 헌알못ㅉㅉ]
[센은 숭배의 레벨이라서 별개고 카렌은 라이트팬들만 많음. 찐 폭도들은 다 네네 팬임]
[네네쨩―! 부숴버려! (ノ*ФωФ)ノ (번역됨)]
―쿵!
채팅창에서 설전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날렵하게 갈린 가위가 도윤의 발 바로 앞에 꽂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이시카와가 즐겁다는 듯 이를 보이며 웃자 도윤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조금 위험하지만……!’
도윤이 이시카와의 손목을 활로 내리친 후 곧바로 자리를 피했다.
―콰과광!!
그러자 그 자리에 벼락과 함께 커다란 돌풍이 일었다.
“천재지변!”
“순식간에 이시카와 헌터를 덮칩니다! 바람이 얼마나 센지 이시카와 헌터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네요!”
[차도윤 0 : 이시카와 네네 ―2]
스크린의 하단에 뜬 점수판이 이시카와의 실점을 알리자 도윤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필드 바닥까지 파고든 탓에 돌풍에 흙먼지가 실렸다. 짙게 깔린 먼지 탓에 이시카와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윤은 필드의 가장자리로 달려가 다시 공격 거리를 확보했다.
―후우웅.
갑자기 불어온 잿빛 바람이 먼지를 순식간에 날려 보내자 도윤은 물론 경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바, 바위가 나타났습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비석인 것 같은데요?!
아나운서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방금까지 이시카와가 있던 자리에 공동묘지에서나 볼 법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도윤의 천재지변 때문에 금이 살짝 나 있었지만,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LIVE 실시간 채팅]
[?]
[???]
[ㅇ?]
[머임?]
[오타쿠 어디 감?]
속사포는 이시카와의 스킬 설명지를 확인하더니 숨을 훅 들이켰고 곧바로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왔다.
―잠깐 이거 설마……!
―펑!
그가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묘비가 터지더니 그것이 사람의 형체로 바뀌었다.
―또각.
“와아아아!!”
“네네! 네네! 네네!”
긴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이시카와가 돌의 잔해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일본 응원단이 일제히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시카와 헌터의 변신계 스킬, 쿠노이치가 분위기를 반전시킵니다!
―쿠노이치는 무생물로 변신하는 스킬로 단순히 겉모습만 바꾸는 것이 아닌, 성질마저 완전히 바뀌죠!
―방금은 묘비로 변신해 차도윤 헌터의 천재지변을 이겨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1점을 더 잃긴 했지만 전투 불능 상태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거였군.’
도윤은 그제야 수십 번도 더 넘게 봤던 이시카와의 스킬 설명지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반면 이시카와는 당당한 눈으로 도윤을 바라보았고, 태풍의 눈을 시전하며 바람에 올라탔다.
―챙!
이시카와가 도윤의 활을 쳐올렸다. 도윤이 팔에 힘을 주어 버텼지만, 이시카와의 주위에 부는 태풍의 눈에 휩쓸려 몸이 저 멀리 날아갔다.
[차도윤 ―1 : 이시카와 네네 ―2]
―파바박!
날아가는 와중에도 도윤은 시위를 당겨 바람 화살을 발사했다. 이시카와는 화살을 피해 몸을 낮춘 후 가위를 넓게 벌려 그것들을 한 번에 반으로 잘랐다.
“확실히 활을 다루는 녀석이라 팔 힘이 좋구나. 공격을 당했을 때도 곧바로 반격하는 배짱도 있고.”
“아까부터 쫑알쫑알 엄청 말 많네.”
“후후후… 피가 끓는군.”
―철그럭.
이시카와가 도윤을 향해 가위를 들어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널 내 권속으로 삼겠다!”
“…….”
[LIVE 실시간 채팅]
[차도윤 표정으로 욕하는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이 도대체 무슨 얘기 하는 거임ㅋㅋㅋㅋㅋㅋㅋㅋ]
[도윤이 저런 얼굴 첨 봄]
[이쯤 되면 차도윤을 저런 얼굴로 만든 네네가 궁금해짐]
[네네 한 줄 요약 : 가엽게도 중2병이 대2때 옴]
[네잘알 ㅇㅈ]
[아 ㅁㅊ 진짜로 중2병임?]
카메라가 눈까지 질끈 감은 채 얼굴을 구긴 도윤을 비추자마자 채팅창은 웃음으로 도배가 되었다.
“이시카와…….”
핸드폰으로 일본 중계의 실시간 채팅을 보고 있던 사와구치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그대로 핸드폰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어 버렸다.
제 소꿉친구가 필드 안에서 어떤 소리를 하고 있을지 머릿속으로 빤히 그려지기 때문이었다.
'또 헛소리하고 있으려나.'
지의 역시 입을 움직이는 이시카와가 스크린에 비칠 때마다 그가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같은 공간에 있을 도윤을 안타까워하면서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이시카와를 다시 응시했다.
그의 스킬들은 대부분 근거리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해설진이 이야기한 대로 스킬의 상성적인 측면에서는 도윤이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동계 스킬이야.’
이시카와는 연계 패시브 스킬로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했지만, 도윤은 이동과 관련된 스킬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시카와가 비행 스킬로 도윤과의 거리를 좁히면 태풍의 눈과 무기를 이용한 공격으로 역습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쾅!
지의의 우려가 현실이 된 듯, 이시카와는 또다시 바람에 올라타 도윤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날카롭게 갈린 가위 날의 도윤의 팔 바로 옆의 벽에 박히자마자 도윤은 반대로 몸을 돌려 뒤로 물러났다.
―휘이잉!
이시카와의 바람이 아슬아슬하게 도윤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금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공중에서 흩어지는 동안 도윤은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일촉즉발의 상황! 화살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합니다!
―아~ 역시 이시카와 헌터 만만치 않네요. 태풍의 눈으로 화살들을 전부 튕겨내며 DF 랭킹 11위로서의 저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콰과광!!
천재지변과 태풍의 눈이 맞부딪혀 그들의 주변 필드 바닥이 깊게 패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면 아무래도 이 몸이 조금 불리할 것 같군.”
이시카와가 도윤을 향해 날아가자 초록빛 칼바람이 사방에서 그를 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쉴드처럼 그의 주위를 맴도는 태풍의 눈에 부딪혀 이시카와의 비행 궤도를 방해하는 것이 전부였다.
‘저 비행 스킬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으려나.’
도윤은 고개를 흘긋 돌려 맹렬하게 날아오는 이시카와를 바라본 후 자신의 무기를 액세서리 형태로 돌려놓았다. 그러곤 천재지변의 출력 위치에 모든 집중을 쏟아부었다.
―쾅, 쾅, 쾅.
이시카와를 피해 달리는 동시에 일부러 태풍의 눈 주위로 천재지변을 일으켰다. 작은 번개와 상쾌한 향기가 나는 바람이 잿빛 태풍에 휘말려 이시카와에겐 조금의 상처도 주지 못했지만, 그의 비행 방향을 교묘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차도윤 헌터가 무기까지 내려놓고 이시카와 헌터를 피해서 필드 전체를 뛰어 다니고 있습니다!
―슬슬 체력적으로 한계가 올 텐데 말이죠. 일단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바람 공격, 묘하게 성가시단 말이지.’
이시카와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도윤이 일으키는 천재지변 때문에 몸은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처럼 불규칙적으로 흔들렸고, 태풍의 눈의 방어력도 서서히 깎였다.
―까득.
그가 이를 갈며 도윤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 안 있어 도윤이 고개를 돌려 이시카와와 눈을 마주쳤다. 그 시선이 자신을 놀리는 듯해 속이 부글부글 끓던 이시카와는 결국 참지 못했다.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후우웅.
이시카와가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도윤을 향해 가속해서 날아갔다. 날카로운 가위가 도윤의 등 한가운데에 박히기 직전.
―타닥!
도윤이 공격을 예상했다는 듯 갑자기 자세를 낮췄다. 속도를 줄이지 못한 이시카와는 가위로 허공을 휘저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날아가 버렸고, 뒤늦게 몸을 돌려 도윤을 바라보았을 땐 이미 도윤이 저를 향해 활시위를 당긴 채였다.
―퍼버벙!!
―차도윤!
―차도윤!
속사포와 아나운서가 흥분한 듯 동시에 소리쳤다. 관중석에서도 감탄이 섞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시카와 헌터의 비행 반동을 이용해서 거리를 확보한 후, 이어지는 화살비 공격! 엄청난 연계입니다!
―아! 그리고 지금은 천재지변으로 또다시 공격을 이어갑니다! 대단하네요. 차도윤 헌터!
―점수 차를 순식간에 10점 이상으로 벌려 놓습니다!
[차도윤 ―1 : 이시카와 네네 ―14]
“윽, 으…….”
한바탕 공격이 휩쓸고 간 필드 위에서 이시카와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화살이 파고든 부위가 엄청나게 쓰라려 움직일 때마다 이시카와의 얼굴이 구겨졌다.
―철컹.
이시카와는 양손으로 가위를 꼭 쥔 채 도윤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봐주지 않겠다.”
“그러든가.”
―쾅!
팽팽한 기싸움이 이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시카와가 먼저 도윤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