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탁.
미준의 손 위로 은색 도끼가 뚝 떨어졌다. 그는 가볍게 손목을 풀며 제 앞에 있는 카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역시 제법 거대한 크로스 보우를 양손에 들고 눈으로 천천히 필드 내부를 훑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줄기라.’
경기 전에 전달받은 카렌의 스킬 정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일종의 매복 지뢰를 설치해 그것에 닿으면 공격이 시작되는 형태의 스킬이었다.
카렌의 무기는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데다가 공격을 받으면 낙인까지 중첩되어 더 큰 공격으로 이어진다. 이번 경기가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갖고 시작한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쿠구궁!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미준이 땅을 찼다. 굵은 나무뿌리가 용처럼 치솟아 순식간에 필드 전체를 헤집어 놓자 카렌이 빠르게 필드를 뛰어다니며 공격을 피했다.
―하미준 헌터가 ‘대지의 보은’을 시전하면서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츠구나가 헌터, 아직은 상황을 지켜보는 듯 빠르게 이동하며 나무를 피합니다!
―파바밧.
크로스 보우에서 발사된 물의 화살이 나무뿌리를 강하게 파고들어 네 갈래로 찢어 놓았다. 카렌이 뒤로 굴러 바로 저격 태세를 취한 후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갈기갈기 찢긴 나무뿌리의 사이로 날아간 화살이 미준의 움직임을 쫓기 시작했다.
―아~ 츠구나가 헌터의 화살이 하미준 헌터를 추격합니다!
―츠구나가 헌터의 무기는 S급 크로스보우 '시나노가와'입니다. 일정 확률로 상대를 쫓는 유도 화살이 발사되는 기능이 붙어 있죠. 그리고 대부분의 S급 헌터가 그렇듯 츠구나가 헌터의 무기도 하미준 헌터가 제작했습니다.
이미 카렌의 무기에 대한 지식이 있던 미준은 그와 거리를 좁히는 대신 나무뿌리를 방패처럼 만들어 화살들을 막았다.
―투웅.
화살 박힌 나무 방패는 땅으로 떨어지자마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역시 노련하네.’
카렌은 숨을 고르며 미준을 바라보았다. 그와 나무뿌리가 한 몸처럼 움직여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금방 유효타를 허락하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탐색을 마쳤다고 생각한 카렌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다시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콰과광!
“뭐, 뭐야?!”
카렌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잔뜩 엉망이 된 땅에서 나무뿌리가 불쑥 튀어나왔고 카렌의 다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카렌은 민첩하게 뒤로 굴러 발등뼈가 부러지는 건 막았지만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미준이 자신의 뒤로 다가왔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뻐억!!
“커헉!”
―첫 유효타!!
미준의 도끼 등이 정확히 카렌의 오른쪽 팔을 내리쳤다. 스크린 하단의 카렌의 스코어가 0에서 ―1로 줄자 한국인들이 많은 관중석은 환호와 함성으로 한껏 소란스러워졌다.
―아~ 역시 하미준 헌터, 베테랑입니다. 베테랑이에요.
―무리해서 승부를 보는 게 아니라 상대의 피격 포인트를 차근차근 떨어트리려는 작전으로 보입니다.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줄 수 있는 스킬은 부족할지 몰라도, 하미준 헌터의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거든요!
속사포와 아나운서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필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 힘만 드럽게 센 능구렁이 같은 놈이……!’
카렌이 인상을 팍 쓰며 얼얼한 오른쪽 팔을 매만졌다. 입고 있는 방어구의 회복력 강화 효과 덕에 뼈에 금이 간 정도로 끝난 것이지, 만약 이게 아니었다면 경기 초반부터 골절로 시작할 뻔했다.
“어머, 이래서야 지은이한테 프러포즈 하겠어?”
“…아직 초반이잖아요, 미준 씨~ 고작 피격 횟수 하나 올린 것 정도로 너무 들뜨신 것 아니에요?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네.”
“그런 말 많이 들어. 그래서 지은이가 나한테 껌벅 죽었잖아.”
미준이 히죽거리며 말을 걸자 카렌도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띤 채로 맞받아쳤다. 지금쯤 VIP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고 있을 제 연인이 미준의 입에 오를 때마다 카렌은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 함정계 스킬을 쓰는 듯한 움직임은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미준의 웃는 얼굴의 뒷면엔 카렌의 함정계 스킬에 대한 경계심이 숨어 있었다. 아무리 S급 스킬이어도 아무런 시전 동작 없이 함정을 설치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즉, 지금까지는 카렌이 자신의 패턴을 탐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헌터들에게 마이크가 없어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듣지 못하는 게 아쉽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심리전이라도 오가고 있는 걸까요?”
속사포가 흥미롭다는 듯 씩 웃으며 턱을 매만졌다. 아나운서는 그의 말에 적당히 대꾸해 주며 해설석 테이블에 설치된 태블릿으로 사람들의 채팅창을 확인했다. 채팅 참여자는 어느새 700만 명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LIVE 실시간 채팅]
[둘 다 웃으면서 얘기하네]
[하미준이 쟤 꼬시고 있는 거 아님?]
[ㅋㅋㅋㅋ합리적 의심]
[지금 저 츠구나가 카렌이 설마 내가 아는 그 카렌인가]
[ㅇㅇ맞음 안티 로맨틱 도쿄 주연]
[ㅅㅂ 안로도 그거 내 인생 영화]
―푸쉬이이.
그때 카렌의 주위로 희뿌연 안개가 모여들었다. 미준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무뿌리를 높게 세워 미리 방어벽을 만들었다.
―아 저 안개는 설마……!
속사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타다닥.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가 걷히고 그 안에서 카렌과 똑같은 형체가 걸어 나왔다. 그들의 얼굴엔 전부 일본 전통 가면, 노멘(能面)이 씌워져 있었다.
“츠구나가 헌터, 드디어 노멘을 시전했습니다!”
“노멘은 츠구나가 헌터의 분신을 소환하여 싸우는 스킬입니다. 하미준 헌터도 상대하기 까다로워지겠네요.”
카렌이 인벤토리에서 노멘을 꺼내 쓰자 분신들 사이로 완전히 섞여 들었다.
[LIVE 실시간 채팅]
[개무서워ㄷㄷㄷㄷㄷ]
[헷갈리는 것보다 무서워서 못 싸울 듯]
[으아ㅏㅏㅏㅏ]
실시간 채팅창은 물론 현장에서 경기를 보던 사람들도 화들짝 놀랐다. 노멘을 쓴 사람 열 명이 양옆으로 나란히 서서 미준을 마주하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었다. 관중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파바바박.
수십 배로 늘어난 화살의 양 때문에 미준이 나무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화살을 견디지 못한 나무 방패가 하나둘씩 쓰러지자 미준은 재빨리 새로운 나무뿌리를 뽑아 그 뒤로 몸을 숨기며 필드를 크게 돌았다.
―피이잉.
그때 유도 화살 네 개가 미준을 쫓기 시작했다. 미준이 인상을 구기며 자세를 낮춘 후 화살 쪽으로 나무 벽을 세우자 화살들은 아슬아슬하게 그것에 박혔다.
“빈틈 발견~”
“이런 망할……!”
―찌익.
수평으로 날아오는 유도 화살들은 피했지만 미준의 머리 위로 도약한 카렌의 화살은 피할 수 없었다. 시원한 물방울을 튀기며 날아간 화살이 미준의 허벅지를 스쳤다.
카렌은 가볍게 착지한 후 다시 노멘 무리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하미준 ―1 : 츠구나가 카렌 ―1]
순식간에 동점이 됐다. 미준의 실점에 한국 관중은 탄식했고, 일본 관중은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아~ 동점을 허용하는군요!
―안 그래도 원거리 무기라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제 머릿수까지 차이가 나니 더욱 영리한 경기 운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의는 심각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았다.
‘시간 끌수록 하미준 헌터한테 불리해질 거야.'’
물을 이용한 함정, 낙인 중첩 공격, 그리고 카렌 본인의 공격까지. 카렌이 미준에게 유효타를 줄 기회는 많지만 미준의 공격은 상대적으로 단순했다.
나무뿌리로 지형을 뒤흔들어서 빈틈을 만든 후 또 다른 나무뿌리로 공격하거나, 아니면 본인이 직접 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콰드드득.
그리고 그 사실은 미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무 벽 뒤에서 다시 빠져나온 후 노멘 무리가 있는 쪽으로 땅을 걷어찼다. 무리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뿌리는 지면을 향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펑.
미처 피하지 못한 노멘 절반이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소멸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또다시 방아쇠를 당겨 물 화살을 뽑아냈다. 미준이 화살 비를 피해 빠르게 달려 나가면서 눈으로는 화살과 노멘들의 위치를 빠르게 훑었다.
‘슬슬 어떤 녀석이 진짜 카렌인지 알겠네.’
―쩌적!
미준이 제 등 뒤를 노렸던 화살을 나무뿌리로 막은 후 노멘의 틈으로 과감히 들어갔다.
―아! 하미준 헌터 이번엔 꽤 위험한 선택을 합니다! 이건 도박인데요!
―장기전이 되기 전에 승부를 보겠다는 걸까요?!
속사포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뒤로한 채 미준은 그들이 발사하는 화살에 집중했다.
노멘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어디까지나 본체를 흉내 낸 것이기 때문에 유도 화살이 나갈 리 없다. 그리고 지금 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녀석들의 화살이 그러했다.
‘하지만 저 오른쪽에 있는 녀석은 좀 달랐지.’
미준의 시선 끝에 걸린 노멘은 그를 향해 크로스 보우를 들었다.
―파바박.
그가 빠르게 뽑아낸 물 화살 중 세 발은 허공을 갈랐고, 다른 두 발은 미준의 다리를 향했다.
[하미준 ―3 : 츠구나가 카렌 ―1]
화살이 스쳐 피격 횟수가 상승하고 땅 위로 소량의 피가 흩뿌려졌지만, 미준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미소 지었다.
‘찾았군.’
―콰과광!!
노멘들이 있던 땅 위로 나무뿌리가 치솟았다. 명백하게 죽이려는 기세의 공격에 노멘들의 몸이 이리저리 꺾여 형체를 잃었다.
[LIVE 실시간 채팅]
[와 카렌 죽으면 어쩌려고 저럼]
[상대방 죽이면 실격패임?]
[실격퍀ㅋㅋㅋㅋ 고소 당하지]
[고소만 당하겠냐?]
파괴적인 공격에 실시간 채팅창은 마비가 올 정도로 빠르게 올라갔다. 속사포와 아나운서도 입을 쩍 벌린 채 미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미준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필드 쪽으로 달려가 그가 유일하게 공격하지 않은 노멘을 향해 도끼를 높이 들었다.
―달그락.
금이 간 가면이 바닥 위로 떨어지자 미간을 한껏 구긴 카렌의 얼굴이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역전된 상황에 어이가 없는지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야, 이 정신 나갔…….”
“천만 영화 배우님이 입이 그렇게 험해서야 쓰나.”
―하미준 헌터가 본체를 찾아냈습니다! 츠구나가 헌터를 향한 빈틈없는 속공!
―츠구나가 헌터,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쾅, 쾅, 쾅!
미준이 도끼 등으로 카렌의 몸을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카렌은 자신의 크로스 보우로 막아보려 했지만 물리적인 힘 차이로 계속해서 뒤로 밀릴 뿐이었다.
[하미준 ―3 : 츠구나가 카렌 ―17]
―쏴아아아.
‘물소리?’
점수를 세 배 이상 벌려 놓으며 미준이 주도권을 가져오려고 하던 그 순간, 그의 귀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물로 된 커다란 여자의 형체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렌의 고유 스킬, ‘하시히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