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속사포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마자 양쪽의 커다란 스크린에 경기 방법에 대한 영상이 흘러나왔다.
[제한 시간 30분 안에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쪽이 승리하는 경기입니다.]
[헌터들은 사전에 제출한 스킬만 사용할 수 있으며 만약 그 외의 스킬 사용이 확인될 경우 즉시 실격패입니다.]
[30분 안에 결판이 나지 않을 경우 신체에 부착된 센서를 이용하여 피격 횟수를 계산합니다.]
[피격 횟수가 적은 쪽이 승리하게 됩니다.]
‘전에 들었던 설명이랑 크게 달라진 점은 없네.’
안내 영상이 끝나자 곧바로 화면이 속사포를 비추었다.
그의 옆엔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정장 차림의 여자가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곧바로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경기의 캐스터를 맡은 김수진 아나운서입니다.
―그리스 타임 어택 중계에 이어 이번 경기에서도 함께 합을 맞추게 되었는데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모습을 연출했다. 그리고 곧이어 스크린에 하미준 헌터의 얼굴과 카렌 씨의 얼굴이 등장했다. 그러자 관중들이 환호하며 그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네! 그럼 선수 소개하겠습니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소속 하미준!
“와아아아!”
“미준 언니!!”
“미준 누나아!!”
관객석 여기저기서 하미준 헌터의 이름이 터져 나오는 동시에 그가 더그아웃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화려하네.’
그는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쓰리피스 수트를 입고 있었다. 왁스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그의 눈썹 위에 박힌 피어싱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아무리 봐도 던전보다는 패션쇼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고개를 들어 스크린을 보자 한쪽에선 그가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필드로 나아가는 모습이, 다른 스크린에선 그의 프로필이 떠 있었다.
[하미준]
[대지 속성]
[S급 창조계 스킬 ‘도깨비 방망이’]
[A급 공격계 스킬 ‘대지의 보은’]
[무기 : S급 손 도끼 ‘나무꾼’]
[DF : S1 A36]
―하미준 헌터는 S급 창조계 스킬이자 자신의 고유 스킬인 도깨비 방망이, 그리고 A급 공격계 스킬인 대지의 보은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을 바탕으로 한 근접 전투가 예상되는 가운데, 하미준 헌터가 필드 앞에 도착했습니다.
“대지의 보은은 그렇다 치고, 도깨비 방망이는 어떻게 사용하려고 하지?”
하미준 헌터의 프로필을 보던 세빈이가 중얼거렸다. 하미준 헌터의 전투는 주로 대지의 보은을 활용한 근접전이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도깨비 방망이까지 사용 스킬로 넣은 건진 모르겠지만, 나름의 작전이 다 있겠지.
―네, 그럼 하미준 헌터와 경기를 펼칠 헌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 내가 다 긴장되네.”
이번엔 야마모토 씨가 말을 뱉었다. 그는 테이블에 팔을 올려놓은 채 상체를 숙였고, 얼마 안 있어 스크린에 카렌 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일본 헌터 협회 소속 츠구나가 카렌!
“카렌! 카렌! 카렌!”
미팅 때 봤던 모습과 다르게 그는 자신의 남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린 상태였다. 위아래로 입은 검은색 전투복은 몸에 딱 맞게 만들어져 있어, 방어보다는 빠른 이동을 더 중시하는 차림으로 보였다. 허리와 팔뚝에 두른 주머니들만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고유 스킬이 함정계 스킬이라고 했었지…….’
스크린에 뜬 그의 정보를 보는 대신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카렌 씨를 응시했다.
[각성자 츠구나가 카렌]
[물 속성]
[고유 스킬 S등급]
[S급 함정계 스킬 ‘하시히메’ : 공기 중의 수분으로 시전자만 볼 수 있는 물줄기를 생성한다. 생명체 또는 물체가 물줄기에 닿으면 수신(水神) 하시히메가 해당 개체를 공격한다.]
[연계 패시브 스킬 ‘바람둥이의 낙인’ : 시전자에게 네 번 공격 받은 생명체에게 바람둥이의 낙인을 새긴다. 하시히메는 낙인이 새겨진 생명체를 우선하여 공격한다. 각인이 36개가 모이면 하시히메들이 소환되어 생명체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A급 소환계 스킬 ‘노멘’ : 시전자의 형상을 한 노멘들을 소환한다. 노멘들은 시전자의 명령대로 행동한다.]
[귀속 무기 : S급 크로스보우 '시나노가와', 사용자의 능력을 증폭시키며 일정 확률로 유도 화살을 발사한다. 멀리서 발사할수록 파괴력이 증가한다.]
[무기 비문 : 굽이치지 않고 유유히 흘러가는 고요한 강과 같은 삶.]
[업 해당 사항 없음]
[사명 해당 사항 없음]
[*구원 해당 사항 없음*]
카렌 씨는 자신의 고유 스킬이 전투계라고 보기에 애매하다고 했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스킬이었다. 더군다나 공격계 스킬은 분신들을 소환한 스킬이었다. 거리를 좁혀서 타격을 줘야 하는 하미준 헌터에게는 영 껄끄러운 스킬이었다.
스크린을 보니 카렌 씨는 이번 경기에서 연계 패시브 스킬까지 자신이 가진 스킬 전부를 사용하는 걸로 나와 있었다.
―츠구나가 헌터는 함정과 소환 스킬을 활용한 인해전술에 굉장히 능한 헌터입니다. 특히 연계 패시브 스킬인 ‘바람둥이의 낙인’이 아주 중요한 스킬인데요. 이 중첩 공격은 매우 파괴적이어서 B급 보스 몬스터의 페이즈 스킵을 몇 번 만들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츠구나가 헌터의 DF는 S1 A77로 하미준 헌터보다 우위에 있어, 하미준 헌터의 입장에선 조금 어려운 경기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카렌! 파이팅~!”
일본 쪽에서 온 응원단이 힘차게 소리치자 카렌이 안경을 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자, 그럼 경기 시작을 위해 양측 헌터들 모두 필드 안으로 입장 부탁드립니다!
거대한 유리 큐브의 문이 열리고 하미준 헌터와 카렌 씨가 필드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그들의 몸에 센서를 부착하는 동안 해설석으로 이동한 속사포와 아나운서가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필드 소개를 조금 드리자면, 가로세로 100미터, 그리고 높이 30미터의 특수 제작 필드입니다.
―이번 경기를 위해 한국 부산물 연구소에서 특별 무상 제공해 주신 아이템이 있죠?
―맞습니다! 바로 액체형 배리어, ‘배리어 겔 type.S’입니다!
아나운서가 밝게 이야기하자 스크린에 액체형 배리어가 담긴 유리병과 함께 멋진 폰트로 쓰인 ‘배리어 겔 type.S’가 나타났다.
―안미래 연구소장과 아자디바르 남매 연구원이 합작하여 만든 액체형 배리어죠?
―네, 맞습니다. 필드의 내외 벽을 배리어 겔로 코팅하고 강도 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S급 공격도 막아 냈다고 합니다!
―S급 공격을요?
―네! 액체가 경화되어 완전한 배리어 형태를 띠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5분! 그리고 경화 이후엔 투명해져서 아주 감쪽같다고 하네요.
―이야, 이거 이번 경기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시민들 안전을 위해서라도 모든 건물에 설치해야겠는데요?
성능을 설명하는 아나운서의 또박또박한 목소리와 속사포의 매끄러운 진행이 만나 나도 모르게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액체형 배리어의 광고를 넋을 놓고 보았다.
―쿵.
얼추 준비가 다 끝났는지 직원들이 필드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아~ 말씀드린 순간! 경기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럼 액체형 배리어를 분사하겠습니다!
―취이익.
큐브의 가장 위에 달려 있던 분사기에서 희뿌연 액체가 천천히 큐브를 덮으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관중석에선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 진짜 감동적인 순간이에요.”
“왁, 깜짝이야!”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소리를 꽥 질렀다. 나 때문에 덩달아 놀란 세빈이도 어깨를 흠칫 떨며 나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미나! 무하!”
“안녕하세요~”
경기장 입구에 있던 피자집의 피자 박스를 펼쳐 놓은 아자디바르 남매가 나를 보고 활짝 웃고 있었다. 한 조각 권하는 그들에게 손을 내저은 후 입을 열었다.
“미래 씨는 안 왔어요?”
“같이 왔어요! 편의점 들르신다고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하셔서 피자만 냉큼 사서 들어왔죠.”
미나가 피자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지금 사용하는 배리어도 지난번에 테스트했던 거랑 동일한 건가요?”
“네! 일단 ‘배리어 겔 type.S’는 가장 클래식한 버전으로 가기로 했거든요.”
무하가 세빈이의 말에 대답하자 미나가 상체를 앞으로 빼며 곧장 말을 덧붙였다.
“경화 시간은 상대적으로 길지만 견고함이 S 타입의 두 배 이상인 P 타입이랑, 방어력이 낮은 대신 경화 시간이 최대 30초를 넘지 않는 Q 타입도 현재 개발 중이에요.”
“S 타입의 생산 라인도 확보해 둔 상태라 나중에 주문 들어오는 거에 맞게 돌리려고요.”
“아자디바르 연구원분들이시죠?”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야마모토 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아자디바르 남매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액체형 배리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아, 저는 일본 헌터협회 소속 헌터 야마모토 켄지로입니다!”
“안녕하세요! 미나 아자디바르입니다!”
“무하 아자디바르예요.”
“엄청난 연구라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건물에 발라서 사용하는 배리어면 저 분사기도 건물 상층에 설치해야 하는 건가요?”
“아, 네! 저 분사기도 부산물을 가공해서 만든 건데…….”
미나가 분사기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야마모토 씨가 눈을 빛내며 핸드폰 화면을 빠르게 두드렸다.
‘계약을 미리 걸어 놓을 생각인가?’
핸드폰 화면엔 계산기와 메모장이 동시에 켜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판매가 진행되기 전에 미리 주문 리스트에 일본의 이름을 올려놓으려는 거겠지.
웃는 얼굴로 남매의 설명을 듣던 야마모토 씨가 계산을 끝냈는지 핸드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아, 혹시 가계약이라도 체결할 수 있을까요? 계약금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송금도 가능합니…….”
“예, 예. 계약 관련은 저랑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소장님!”
인기척도 없이 귀신처럼 나타난 미래 씨가 야마모토 씨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야마모토 씨는 어깨를 흠칫 떨더니 어정쩡한 자세로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거 뭐냐, 계약서 사본입니다. 필요한 정보 입력하고 다시 주시죠.”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저희랑 협력 관계라서 특별히 해 드리는 겁니다? 원래대로라면 납기 순서도 경매로 부치거든요.”
“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요즘 저희 쪽 던전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현 협회장님이랑 센 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거든요.”
거침없는 미래 씨의 화법에 야마모토 씨는 잠시 허둥대다 곧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배리어 경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배리어가 덧씌워졌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네요. 이 배리어가 상용화되면 여러모로 던전 피해를 줄일 수 있겠어요.
속사포의 말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하미준 0 : 츠구나가 카렌 0]
스크린이 두 사람을 비추는 동시에 하단에 센서가 감지한 피격 횟수를 띄웠다. 본격적인 경기 준비가 마무리된 것이다.
―자 그럼 5초 후에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5! 4! 3!”
화면에 뜬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