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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221화 (221/366)
  • 221화

    사전 미팅 장소는 협회 건물 근처에 있는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로비를 통과하니 히터의 뜨거운 바람이 얼굴 위로 훅 끼쳤고,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코트 주머니에 대충 꽂아 넣었다.

    “신지의 헌터~ 마침 타이밍이 맞았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았다.

    “아, 하미준 헌…터?”

    그러자 평소보다 훨씬 화려한 차림의 하미준 헌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자 그는 한껏 넘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신경 쓴 걸 바로 알아보는군. 어때, 좀 달라 보여?”

    “어… 다르다기보단 그냥 좀 과하네요.”

    “신랄한 평가로군. 샵까지 다녀왔는데.”

    하미준 헌터는 서운하다는 듯 입을 비죽거렸지만 와인색 스리피스 수트에 명품 로고가 박힌 롱코트를 어깨에 걸친 그의 모습은 패션쇼 런웨이 위에 세워도 전혀 손색없을 정도였다.

    ―우우웅.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레스토랑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에도 하미준 헌터는 넥타이 핀을 몇 번이고 뺐다 끼우기를 반복했다.

    “잘 보여야 할 사람이라도 있어요?”

    “난 모든 공주님 왕자님께 잘 보이고 싶지.”

    “그럼 오늘은 왜 샵까지 다녀온 거예요?”

    “웬수가 있거든, 웬수가.”

    하미준 헌터가 질색하는 얼굴을 하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하미준 헌터가 누굴 이렇게 싫어하는 건 처음 보네요.”

    “신지의 헌터, 애인 뺏겨 본 적 있어?”

    “네?!”

    ―띵.

    엘리베이터가 가장 상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일본의 S급 헌터는 총 여섯 명, 그중 다섯 명이 이번에 입국했어. 나머지 한 명은 비상 상황을 대비해 국내에서 대기 중.”

    “…그거랑 애인 뺏겨 본 얘기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예요?”

    하미준 헌터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내게만 들릴 정도의 크기로 말을 덧붙였다.

    “입국한 헌터들 중에 내 애인 뺏은 녀석이 있다고.”

    “허…….”

    “내 연애사 최초이자 마지막 환승 이별이었다니까? 아직 잘 사귀고 있어서 더 열 받아.”

    연애는 관심이 없어서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지만, 늘 여유로운 하미준 헌터를 저렇게 화나게 만들 정도이니 그의 애인을 뺏은 쪽도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다.

    ―드르륵.

    직원이 문을 옆으로 밀자 미리 와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양쪽 다 제일 높은 쪽이 안 왔군.’

    우리는 김강희를 제외한 모든 헌터들이 와 있었고, 일본 쪽은 센을 뺀 젊은 헌터들뿐이었다.

    ‘다들 개성이 엄청나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에 안대를 낀 여자는 나를 흘긋 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고, 그의 옆에 앉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고개만 까딱하곤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마 친근한 태도로 나온 건 가장 안쪽에 앉은 두 남녀였다.

    그중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하미준 헌터를 보며 안경을 고쳐 썼다.

    “미준 씨~ 오랜만이에요~”

    잠깐의 정적을 깨고 하이 톤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온몸으로 반가운 티를 내며 손을 흔들었고, 그럴 때마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하미준 헌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앞에 앉는 동안 난 하미준 헌터와 최민 헌터 사이에 조용히 앉았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내 맞은편에 앉은 남자 헌터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 두 사람은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툭.

    옆에 있던 최민 헌터가 테이블 밑으로 뭔가를 보여 주었다.

    [왼쪽부터 이시카와 네네, 사와구치 미나토, 야마모토 켄지로, 츠구나가 카렌입니다.]

    핸드폰 화면에 뜬 글을 본 후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오랜만이네, 카렌. 요즘 바빠 보이던데.”

    “하~ 너무 힘들었죠. 오랜만에 드라마 찍으려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니까요?”

    “우리 한진우 헌터도 그렇고 카렌도 그렇고 대단한 사람들이야~ 헌터만 하는 것도 힘든데 엔터테이너로서 살고 있잖아.”

    이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오직 하미준 헌터와 츠구나가 씨만이 떠들고 있었다.

    츠구나가 씨는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며 말을 덧붙였다.

    “얼마나 바빴는지 지은이 만날 시간도 없더라고요.”

    “생각보다 오래가네? 걔 롱디 힘들어하잖아.”

    “정말요? 전~혀 못 느꼈어요!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살자고 해야 하나?”

    “지은이 동거 싫어해. 2년 동안 만나면서 그것도 몰랐어?”

    ‘아, 저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그제야 그들이 친근한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상냥한 말투로 이야기할 뿐이지 그들의 말엔 뼈가 있었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는 너무 오랜만이라서 긴장되네요…….”

    두 사람이 그들만의 설전을 벌이는 동안 내 앞에 있던 남자 헌터, 야마모토 씨가 숨을 길게 내쉬며 머쓱하게 웃었다. 이 중에선 제일 무난한 성격으로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소개를 안 드렸네요! 야마모토 켄지로입니다. 야마모토라고 불러주세요.”

    “신지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는 츠구나가 카렌이에요. 카렌으로 불러 주시면 좋겠어요.”

    “네. 잘 부탁드려요, 카렌 씨.”

    “저야말로요~”

    카렌 씨가 사르르 웃으며 자신을 소개할 때쯤 야마모토 씨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심드렁하니 있던 남녀에게 눈짓했다. 그제야 두 사람이 나를 바라보았다.

    “…사와구치 미나토입니다.”

    “이시카와 네네. 네네 님이라고 불, 읍…….”

    “이시카와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 네… 신지의입니다.”

    사와구치 씨가 이시카와 씨의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색하게 그들에게 인사하며 고개를 돌리자, 이시카와의 맞은편에 있던 세빈이와 차도윤 헌터도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웅.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인벤토리에서 꺼내 화면을 켜자 상단 알림창에 메시지 아이콘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아까는 더 어색했어요ㅠㅠㅠㅠ ― 한진우 헌터]

    [특히 저 안대 끼신 분 자꾸 혼자서 중얼거리시구 ― 한진우 헌터]

    [ㅠㅠㅠㅠㅠㅠㅠ ― 한진우 헌터]

    ‘하미준 헌터 없었으면 더 숨 막혔겠네.’

    아무리 신경전이라고 하더라도 하미준 헌터가 츠구나가 씨와 말하고 있는 덕에 방 안은 적막하진 않았다. 그가 오기 전 분위기가 얼마나 삭막했을지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드르륵.

    한진우 헌터의 문자에 이모티콘으로 답장을 보내기 무섭게 방문이 열렸다.

    “저희가 마지막이었군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센과 김강희가 나타났다. 센은 TV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 기모노에 털이 달린 외투를 입고 있었다. 높게 틀어 올린 새하얀 머리카락이 은근하게 반짝거리고 있어 그를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두근.

    ‘…젠장할.’

    98번째의 회귀에서 내가 센을 죽였던 순간이 떠올랐다. 일본 헌터들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내 탄환 한 발에 너무나 쉽게 목숨을 잃었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 그 시간선은 일본이 유독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텁.

    그때 옆에 있던 최민 헌터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의 차분한 옆얼굴이 보였다. 담백한 다정함에 불안정했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내쉬며 어지러웠던 감정을 추슬렀다. 이번엔 가장 최선의 미래를 만들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졌으니까.

    “안녕하세요, 한국의 헌터분들. 일본 헌터 협회 소속 센입니다. 존칭 없이 편하게 불러 주세요.”

    센의 소개와 함께 또 한 번의 통성명이 오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꾸역꾸역 인사를 하던 이시카와 씨와 사와구치 씨도 센의 앞에선 나름 정중하게 행동하려 듯했다.

    “시범 경기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 건가요?”

    “그러고 보니 우리도 아직 못 들었네.”

    “아,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빈이가 사무적인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인벤토리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방식은 국내 파이트 클럽 시스템과 유사합니다. 일대일 경기로 진행하고 전투 불능 상태를 만드는 쪽이 승리입니다. 10초 이상 움직이지 못하면 전투 불능 상태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경기 시간은 30분이에요. 그사이에 결판이 나지 않으면 몸에 부착한 센서를 통해 수집한 피격 횟수로 승패를 결정하죠. 당연히 더 적은 쪽이 승리합니다.”

    “방어 전략은 안 통하겠네요…….”

    김강희가 덧붙여 설명하자 야마모토 씨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세빈이는 태블릿 화면을 두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경기에서 사용할 스킬을 미리 고지해야 합니다. 그 외의 스킬을 쓰면 바로 실격패이니 무의식중에 스킬을 사용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죠.”

    “흥, 재밌는 규칙이네.”

    잠자코 듣고 있던 이시카와 씨가 짧게 말을 뱉었다.

    센서를 제외하곤 파이트 클럽과 방식 자체는 거의 동일했다. 결국 상대의 스킬을 미리 파악해 전략을 잘 짜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다.

    ‘센만 미리 확인해 둘까.’

    모두의 시선이 세빈이와 김강희를 향했을 때, 오른쪽 눈을 살짝 감으며 곁눈으로 센을 바라보았다.

    [각성자 아마노 레이]

    [빛 속성]

    [고유 스킬 S등급]

    [S급 강화계 스킬 ‘아마테라스’ :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가호를 받아 일정 시간 동안 공격력, 방어력, 회복력, 이동 속도가 대폭 상승한다. 지속 시간은 시전자의 체력에 따라 달라지며, 재사용 대기 시간은 1시간이다.]

    [연계 패시브 스킬 ‘야타노카가미’ : 시전자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전자의 시신경에 전달한다.]

    [A급 공격계 스킬 ‘광휘’ : 일직선의 빛줄기를 소환해 대상을 공격한다.]

    [귀속 무기 : S급 장검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사용자의 능력을 증폭시키며 사용자는 무기의 무게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무기 비문 : 너와 나는 네가 태어난 땅을 지킬 유일한 검이다.]

    ‘저게 본명이군.’

    일본의 헌터들은 본명 대신 한 음절의 헌터명을 쓰는 사람이 많았고, 그중 센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재빨리 눈동자를 밑으로 내려 그가 뒤집어쓴 업을 살폈다.

    [‘카르마 : 희생하는 화가’ : 절대자 ‘창조자’가 각성자 ‘아마노 레이’에게 씌운 희생하는 화가의 업. 각성자가 액자 속에 스스로 갇힐 시 소원이 실현된다.]

    [아마테라스의 의지 : 네가 태어난 땅을 네 손으로 지켜라. (미달성)]

    [*희생하는 화가의 업 청산*]

    희생하는 화가, 그 업의 설명을 보자마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정확히 저 액자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희생함으로써 어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센은 창조자의 힘을 지금 바로 받지 않았다는 것.

    그가 희생하고 나서 소원이 실현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창조자의 힘이 약해진 것을 직접 실감하진 못했을 것이다.

    ‘만만치 않겠어.’

    창조자가 센의 목숨을 담보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소원이 꽤 까다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소원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선 센과 깊은 신뢰를 쌓아야 할 것이다.

    ―드르륵.

    양쪽 눈을 둘 다 뜰 때쯤 직원들이 음식을 갖고 들어왔다. 아까보다는 조금 풀어진 분위기와 함께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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