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19화 (219/366)

219화

<두 개의 빛>

-터벅터벅.

아무도 없는 협회 본부 복도는 내가 한 발씩 나아갈 때마다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제1회의실이라고 했지…….’

복도를 따라 쭉 들어가자 가장 안쪽에 ‘제1회의실’이라는 표지판이 붙은 유리문이 보였다.

-우웅.

옆에 있던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고, 그곳엔 보고 싶었던 얼굴과 껄끄러운 얼굴이 함께 있었다.

“신지의 헌터, 어서 오게.”

“지의야.”

김강희와 그의 맞은편에 앉은 세빈이였다. 김강희를 향해 태연하게 인사한 후 세빈이의 옆에 앉자 세빈이가 내 쪽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몸은 좀 어때? 귀국한 지 이틀밖에 안 됐잖아.”

“계속 집에서 쉬어서 괜찮아.”

“그럼 다행이네.”

세빈이가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공식 파견 요청이 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워낙 갑작스럽게 열린 게이트였으니까요.”

“그리고 소문만 무성하던 칼리의 창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참 공교로워.”

김강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신지의 헌터가 갈 때만 기묘한 일이 생기니 말이야.”

“…….”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웅.

어색한 기류가 흐를 때쯤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엔 하미준 헌터와 최민 헌터, 그리고 차도윤 헌터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니까 더 반갑네? 아,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회장님.”

“그래, 와 줘서 고맙네, 다들.”

그들은 저마다 편한 자리에 앉은 후 이 회의를 소집한 김강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일단 와 달라고 해서 오긴 했는데…….’

김강희는 아무런 설명 없이 헌터넷으로 국내 S급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세빈이가 몬스터가 됐던 그 일을 물어보기 위해 소집했다고 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우리를 부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머릿속이 복잡했다.

반면 김강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안경을 닦더니 다시 쓰곤 우리를 둘러보았다.

“한진우 헌터는 아직 파견 중이라 오늘 회의 참석은 어려울 걸세. 이건 내가 따로 전달하겠네.”

-드르륵.

김강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회의실 앞쪽에 있던 스크린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가 화면을 두드리자 헌터 협회 로고가 돌아가던 영상에서 글자가 쓰인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세계 헌터 교류전]

‘교류전?’

예상치 못한 주제였다. 다들 아무 말 없이 화면 속 글자만 들여다보았고, 하미준 헌터는 휘파람을 불며 놀라움을 표했다.

“하미준 헌터와 강세빈 헌터는 올해 초에 얼핏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헌터 교류전을 개최하려고 하네.”

“처음엔 랭킹전으로 하시려던 것 아니었어요? 그래서 파이트 클럽들 조사해 본 건데.”

“그랬지. DF 랭킹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랭킹전을 운영하려고 했네.”

하미준 헌터의 질문에 김강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운영하면 랭킹전에만 집착하는 헌터들이 나올 것 같아서 말일세. 헌터들도 사람이다 보니 당연히 경쟁심이 생기지 않겠나.”

“던전 공략은 안 하고 랭킹전 전술만 짜는 헌터들도 있겠네요.”

“역시 차도윤 헌터는 내 의도를 잘 캐치하는군. 바로 그 말이네.”

차도윤 헌터가 김강희의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곧바로 내 눈치를 보더니 표정을 관리했다.

김강희와 멀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머릿속 김강희는 여전히 자신을 지옥 같던 집에서 꺼내 준 구원자로 자리하고 있으니까.

‘언젠가 깨닫는 날이 오겠지.’

차도윤 헌터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다시 김강희를 바라보았다.

“웬만한 서류 절차는 진행 완료되었네. 이제 필요한 건 홍보와 사람들의 관심이지.”

-탁.

김강희가 화면을 두드리자 다른 슬라이드가 나타났다.

[세계 헌터 교류전 ‘한-일 시범 경기’]

“그래서 일본 헌터 협회와 함께 시범 경기를 먼저 진행하려 하네.”

“오.”

“그리고 이번 시범 경기는 교류전을 홍보하는 것은 물론, 다른 목적도 있지.

-위잉.

김강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회의실 문이 열렸다. 그러자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다들 와 있었네.”

“미래 씨!”

“어, 네팔 갔다더니. 언제 돌아왔냐?”

미래 씨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후 김강희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마침 잘 됐군. 시범 경기 이야기 중이었네.”

“아… 그럼 배리어에 대한 건 제가 설명하면 돼요?”

“부탁하네.”

김강희의 말에 미래 씨가 스크린 옆에 기대어 섰다.

“뭐, 그… 일본 헌터 협회랑 시범 경기하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여기서 꼬맹이들의 배리어를 본격적으로 보여 줄 거다.”

“정말요?!”

“그럼 가짜겠냐?”

김강희가 말한 다른 목적이 배리어에 대한 것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나를 향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후, 미래 씨는 스크린을 두드렸다.

“오, 뭐야. 이미 슬라이드에 나와 있네.”

“자네가 시간 맞춰 안 오면 내가 대신 설명하려 했으니 말일세.”

스크린엔 파이트 클럽에서 본 큐브 형태의 필드와 커다란 야구 경기장이 떠 있었다.

“장소는 고척 스카이돔. 여기 한가운데에 큐브형 경기장을 세워 두고 액체 배리어를 외벽에 전부 바를 거다.”

“경기장 크기는요?”

“가로, 세로 100미터에 높이는 30미터. 일대일로 싸우기엔 충분하겠지.”

“경기가 꽤 많이 치러질 텐데, 배리어 양은 충분해?”

“하!”

하미준 헌터의 질문에 미래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소리를 뱉었다.

-턱.

그러곤 우리의 테이블 위로 명함 세 장을 던졌다. 내가 그것들을 집어 테이블 한가운데로 옮기자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쭉 빼고 명함의 주인을 살폈다.

“…설마 이 기업 대표들한테 지원금을 받은 건가요?”

차도윤 헌터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명함과 미래 씨를 번갈아 보았다.

명함의 주인들은 전부 국내외 대기업 대표들이었다. 평범한 대기업이 아니라 거의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세계적 기업들.

미래 씨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차도윤 헌터를 비웃는 듯한 얼굴을 했다.

“지원금? 고작 지원금 따위였으면 교류전은 꿈도 못 꾸지, 멍청아.”

“…….”

“생산 독점 계약을 맺었다.”

“허업.”

상상 이상의 결과에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켰다.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됐어……!’

지난 시간선들에 비해 배리어의 개발 속도도, 그리고 상용화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내가 사도들에 대한 걸 해결하는 동안, 미래 씨와 아자디바르 남매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저 세 기업들이 합동 투자해서 액체형 배리어 생산 설비를 마련해 줬다. 기존의 공장에서 공정 방식만 조금 바꾸면 되는 것이라 공사가 금방 끝나더라.”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으니 배리어 단가도 낮아졌겠네?”

“어.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

미래 씨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이번 시범 경기 때 이 배리어를 큐브 외벽에 뿌릴 거다. S급 놈들 공격엔 깨질 수도 있지만 관중석으로 공격이 바로 날아갈 일은 없겠지.”

“주문이 엄청 들어오겠네요.”

“그래서 기업 녀석들도 독점 생산 계약을 따내고 싶어서 눈깔이 돌았던 거지. 하, 그놈들 빌빌거리는 꼴을 늬들이 봤어야 했는데.”

세빈이의 말에 대답한 후, 미래 씨는 키득거렸다. 미간은 늘 그렇듯 구겨져 있는데 입꼬리만 올라간 게 우스워 나도 모르게 같이 웃었다.

-짝.

김강희가 손뼉을 마주치며 주의를 환기시키곤 다시 스크린 옆에 섰다.

“들었다시피 이 배리어의 성능을 알리는 것도 시범 경기의 목표 중 하나일세.”

그가 스크린을 누르자 국내 S급들의 사진과 함께 일본 헌터 협회 소속으로 보이는 헌터들의 사진이 나타났다.

“다나카 협회장과 협의를 한 결과, S급 4명을 선정해서 경기를 하기로 했네. 대전 상대는 그들이 입국하고 나서 제비뽑기로 정할 예정이고.”

“경기는 언제예요?”

“27일과 28일. 하루에 두 경기씩 할 걸세.”

“이야, 주말이네. 사람들 표 구하느라 박 터지겠구만~”

하미준 헌터가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김강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헌터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김강희가 창조자의 편이라는 걸 알고 있는 이상 그의 모든 언행은 의심의 대상이었다. 세빈이를 공격했던 것처럼 갑자기 게이트를 열어 S급들을 몰살시킬 생각인지, 아니면 그저 협회장으로서 할 일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텁.

“지의야?”

“어, 어?”

세빈이가 내 손을 두드리고 나서야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한참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아, 미안.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아직 전투의 피로가 남아 있을 겁니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괜찮아요. 그… 무슨 얘기 하고 있었죠?”

양옆에 앉은 세빈이와 최민 헌터를 안심시킨 후 김강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네. 다음 주 수요일 오전에 사전 미팅 참석이 가능한지 알고 싶어서 말일세. 아, 물론 점심 식사도.”

“아, 네… 됩니다.”

“그럼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원 참석이군.”

김강희는 화면을 끈 후 다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경기를 잘 준비해 주길 바라네.”

* * *

-쿵, 쿵, 쿵.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사슴 형태의 몬스터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그의 손에 들린 새하얀 검은 춤을 추듯 가볍게 허공을 가르곤 보스 몬스터의 목에 정확히 꽂혔다.

-쿵!

뒤에 있던 다른 헌터들이 손을 써보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와 동시에 던전의 클리어를 알리듯이 몬스터의 시체 위로 상급 부산물과 아이템이 떨어졌다.

“센 님과 함께 던전을 클리어하다니, 아직도 안 믿어져…”

“그러니까!

“요즘 현장에 자주 나오시는 것 같네. 다시 복귀 하시는 거 아니야?”

젊은 헌터들이 센을 보며 잔뜩 신이 난 채로 이야기했다. 센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엔 기대와 존경이 서려 있었다. 일본 헌터들의 우상이자 정신 그 자체인 그는 그 자리에 반듯하게 선 채 몬스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강한 녀석이 아닐 텐데…….’

창조자가 세상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한 이후부터 던전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게이트의 등장과 폭발 주기는 점점 짧아졌고 몬스터의 수준 역시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는 경우도 잦았다.

“센 님!”

그때 젊은 헌터들이 센의 옆으로 뛰어왔다. 그들은 센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함께 던전을 공략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 저희도 센 님을 본받아 모두에게 모범이 되는 헌터가 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세 사람의 말에 센은 눈을 크게 뜨다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들고 있던 검을 다시 반지로 돌려 놓았다.

“여러분 같은 헌터들이 있기에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센이 그들의 어깨를 두드린 후 게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창조자의 힘이 약해진 건 맞지만 지금은 그를 믿는 수밖에 없어.’

센은 자신이 창조자에게 빌었던 소원을 떠올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손에서 검푸른 빛이 잠시 뿜어져 나오다 곧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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